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 5월 다섯번째 주일
이사야서 6:1-8, 로마서 8:12-17
성령강림절, 성령은 자녀의 영
정해빈목사
독일의 종교철학자 루돌프 오토는 1911년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던 중 모로코의 한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기도찬양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 기도찬양을 듣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이 체험에 근거해서 쓴 책이 [성스러움의 의미, The Idea of the Holy]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람은 진선미(眞善美)에 더하여 거룩(聖)을 사모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신비체험을 통해서 신의 특별한 사랑/능력을 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신적인 존재를 만날 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체험은 두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번째 반응은 두려움이고 두번째 반응은 황홀입니다.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신적 능력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이 순간 절대적인 능력 앞에서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신이 신을 마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합니다. 신비체험의 두번째 반응은 황홀입니다. 사람은 신비체험을 하는 순간 처음에는 두려워 떨지만 나중에는 신의 능력을 만나면서 황홀/환상/감격/기쁨을 체험합니다. 신비로운 환상이나 방언이나 능력을 받기도 하고 신의 특별한 사랑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비체험은 일상생활에서는 만날 수 없는 황홀하고 매력적인 순간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이 순간이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변화산에 서 있는 베드로가 황홀체험을 하고 나서 이 산에 초막을 짓자고 말한 것처럼, 황홀한 체험에 계속 머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고 황홀/환상/감격/기쁨에 머물고자 하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무당들도 신비체험을 하고 신들림을 경험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비체험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다 있습니다. 신비체험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고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경험하는 신비체험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거짓된 것인지는 신비체험을 경험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신비체험을 경험한 사람은 그 신비체험을 통해서 얻은 능력과 기쁨을 가지고 고통받는 이웃을 구원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진실로 모든 종교에는 신비체험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러한 신비체험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체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광신적인 신비체험, 나에게 오면 환상을 보여주고 미래를 알려주고 병을 고쳐준다는 무당같은 신비체험은 우리의 삶을 병들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이 특별한 신비체험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있게 일상생활을 들여다 보면 내가 살아있는 매 순간이 신비체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명상센터에 가보면 “마음 깨닫기, Mindfulness)”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의 맛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먹는 법을 배우고 미로 같은 동그란 길을 걸어가면서 명상하는 법을 배웁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두 걸음을 걷고 다시 숨을 내쉬면서 두 걸음을 걷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지금 걷고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마음을 발끝에 모으고 조용히 걸으면서 걷고 있는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방법이 걷기 명상입니다.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꼼꼼하게 꽃을 바라보면서 꽃과 대화를 나누거나 조용히 나 자신, 내 마음/감정과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또는 토요일 온라인건강교실을 통해서 내 몸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대단하고 특별한 환상이나 신비체험은 아니지만 이런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나의 삶 곳곳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먹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신비체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경험한 신비체험을 기록했습니다. BC 740년 52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던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남유다는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북쪽의 앗시리아는 남유다를 침략하려고 하였고 서쪽에는 새롭게 등장한 베벨론이 남유다를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고 날개에 둘러싸여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하늘에서 부르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습니다. 이 환상을 본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주님을 만났으니 죽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신비체험의 첫번째 반응인 두려움과 떨림을 이사야가 경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한 날개가 제단에서 숯을 부집게로 들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주님께서는 이사야를 징계하신 것이 아니라 이사야를 깨끗하게 하셨고 이사야를 축복하셨고 이사야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물으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이 질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단수로 계신 분이 아니라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누가 갈 것인가 물었을 때 이사야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신비체험이 처음에는 놀라움/두려움/죄책감으로 시작해서 황홀/감격/기쁨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세상으로의 파송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하늘의 능력을 받은 후에 산 아래로 내려가신 것처럼, 이사야도 신비체험을 통해서 하늘의 능력을 받은 후에 주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체험은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끄럽고 두렵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황홀/감격/기쁨을 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신비체험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황홀/감격/기쁨/능력을 가지고 고통받는 세상을 위해서 일하도록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와 삶과 기쁨을 나눕니다. 종의 영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을 말하지만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사랑과 풍성함과 기쁨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 중에는 청교도 신앙처럼 하나님을 무서운 아버지로 여기는 신앙이 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계명을 엄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 사람의 신앙이 두려운 신앙에 속한 것은 그 사람이 자녀의 영이 아니라 종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신앙에 빠진 사람은 자신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도 두려워합니다. 그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을 쉽게 과장하고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고 배척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슬람교나 성소수자들을 원수로 여기고 그들이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것처럼 과장되게 공포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종의 영이 아니라 자녀의 영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화롭게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진실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사야처럼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사도바울처럼 이방인을 환영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특별한 신비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일상생활의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체험이든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시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을 따라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세상을 위해서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ave a Comment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