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네번째 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너의 아우가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누가복음 15:1-3, 25-32
정해빈목사
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누가복음 15장 말씀이 [탕자의 비유] 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제목을 달았습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면 탕자(蕩子), 방탕한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되지만 [되찾은 아들의 비유]로 제목을 붙이면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이야기가 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3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맨 처음에 [잃은 양의 비유]가 나오고 그 다음에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나오고 세번째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다녔고 찾은 후에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여인이 동전 드라크마 열 개가 있었는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그것을 찾을 때까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이웃 사람을 불러서 내가 잃었던 동전을 찾았으니 함께 기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두번째 비유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 비유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 모두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집에 남아있는 큰아들이나 집을 떠난 둘째 아들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줄 모르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큰아들과 둘째아들 모두가 불효자식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의 밭을 관리했지만 감사할 줄로 몰랐습니다. 아버지의 말처럼,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도 축복이었고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지도 못했고 감사함도 없었고 여유도 없었습니다.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이 못마땅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불평하는 큰아들을 향해서 너는 항상 나와 같이 있고 나의 것이 다 너의 것이지만 둘째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기뻐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이 큰아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지 않는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감사할 줄도 모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한다면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둘째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낭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미워한다면 우리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을 만날 때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나에게 너그럽게 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큰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닮아서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불쌍히 여겼더라면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더 믿고 신뢰했을 것입니다.
큰아들도 불효를 저질렀지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른 것은 둘째아들이었습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큰 아들은 2/3, 둘째 아들은 1/3의 유산을 받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도 자신의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한 것도 불효였고 받은 유산을 가지고 먼 곳으로 가서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낭비한 것도 불효였고 마지막에 거지가 되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난 것도 불효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거의 죽게 되었다가 집으로 돌아온 둘째아들을 안아 주었고 옷을 입혀 주었고 반지를 끼워 주었고 잔치를 벌여 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둘째가 재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한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고 해도 아버지는 그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옛날 사회에서는 자식이 헐벗고 굶주린다면 그것은 아버지에게 큰 수치가 되었습니다. 좋은 아버지라면 마땅히 모든 자녀들을 먹이고 입혀야 합니다. 자녀들이 재산을 낭비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돈보다 생명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그 아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지 못한 첫째아들도 문제이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둘째아들이 더 큰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에 우리의 자녀들이 둘째아들처럼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재산을 낭비한다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돈만 낭비한다면, 일할 생각도 안하고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면 부모의 마음은 답답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자녀는 정신적인 상처가 있어서 사람들을 안 만나고 바깥으로 나가지도 않고 집 안에만 있으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큰아들 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처럼 열심히 살지 않는 동생을 향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일찍 세상에 뛰어들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과 고민이 많아서 행동이 느린 사람도 있고 일할 생각은 안하고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정 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직장이나 가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 안하고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할 의욕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고 집으로 돌아온 자식을 입혀주고 씻겨주고 먹여 주었습니다. 그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녀이니까 헐벗어서도 안되고 굶주려서도 안된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둘째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었습니다. 비록 둘째아들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가 보기에 게으르고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도 기본적인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리켜서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가치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비록 그들이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든지 버림받아서도 안되고 굶주려서도 안되고 헐벗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이 온전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큰아들 같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 모두는 허물이 많은 탕자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보기에 둘째아들처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을 이해해 주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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