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지혜와 사귐의 성령
잠언서 8:1-4, 22-31
정해빈목사
2005년에 만든 다큐멘타리 영화 중에 [펭귄의 행진, March of the Penguins]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극에 사는 펭귄들은 얼음 빙하 위에서 사는 동물인데 여름이 가까워지면서 빙하가 녹으면 물에 빠져 죽기 때문에 빙하가 있는 내륙 안쪽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닷가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지만 빙하에서는 바닷가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부모 펭귄의 고생이 시작됩니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펭귄들은 내륙 안쪽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대장 펭귄이 길을 알아보고 앞장서서 걸으면 나머지 펭귄들은 일렬로 서서 행진을 합니다. 2개월의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펭귄들은 짝을 맺어서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은 엄마 펭귄은 아빠에게 알을 전해주고 나서 바닷가로 가서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엄마 펭귄이 물고기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아빠 펭귄과 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빠 펭귄은 알을 두 다리 사이 깃털 속에 품은 채로 엄마 펭귄이 음식을 가지고 올 때까지 4개월을 버텨야 합니다. 두 다리 사이 깃털 속에 있는 알이 얼음바닥에 떨어지면 알이 죽기 때문에 아빠 펭귄은 알에서 새끼가 나올 때까지 항상 조심스럽게 또 따뜻하게 알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면 약 1천 마리의 아빠 펭귄들은 동그랗게 서서 서로 체온을 유지하면서 눈보라와 씨름을 합니다. 맨 바깥쪽에 있는 펭귄이 가장 크게 추위를 느끼며 눈보라와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바깥쪽에 있는 펭귄들은 가장 안쪽으로 들어오고 안쪽에 있는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렇게 교대를 하면서 아빠 펭귄들은 알을 보호하고 서로를 지켜줍니다. 아빠 펭귄이 품고 있던 알에서 아기 펭귄이 태어나면 아빠 펭귄은 아기 펭귄 속으로 자신의 액체를 넣어주면서 아기를 돌봅니다. 멀리 바닷가로 간 엄마 펭귄은 물고기를 입속으로 최대한 많이 삼킨 다음에 다시 2개월을 걸어서 아빠와 아기가 있는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물고기를 토해내서 아빠와 아기를 먹입니다. 엄마 펭귄이 돌아오면 이번에는 아빠 펭귄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다시 먼 바닷가로 나갑니다. 이런 식으로 아빠 펭귄과 엄마 펭귄은 아기가 자랄 때까지 번갈아가면서 물고기를 잡아 옵니다. 그리고 아기 펭귄이 성인이 되면 부모는 성인이 된 펭귄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합니다.
[펭귄의 행진] 다큐멘타리를 보면 펭귄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자연의 시련에 대처하고 자녀를 키우고 서로 협력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펭귄들은 어디서 저런 삶의 지혜를 얻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지혜를 주신 것이 아니라 펭귄과 같은 동물과 식물에게도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자연의 시련에 잘 대처하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모든 피조물들에게 알맞은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 6월 4일 CBC 라디오 방송에서 캐나다 북쪽에 사는 원주민들이 밤하늘에 보이는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가리켜서 “여행자의 오솔길‘이라고 부른다는 방송을 들었습니다. 저 멀리 밤하늘에 북두칠성 거인이 살고 있는데 그 거인이 자신들을 위해서 방향과 길을 안내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보면 미신 같지만 그들은 이런 생각을 통해서 우리들 보다 훨씬 더 자주 밤하늘을 쳐다보고 밤하늘을 경외합니다. 도시에서는 잘 안보이지만 원주민들이 사는 곳에 가면 북두칠성과 은하수가 바로 앞에서 쏟아지는 것처럼 환하게 잘 보입니다. 그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밤하늘의 북극성과 북두칠성과 은하수를 보면서 날짜를 계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언제 보름달이 떠오르고 언제 초승달이 되는지, 언제 계절이 바뀌는지를 자녀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시계가 없어도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을 통해서 낮의 시간과 밤의 시간, 사계절의 시간, 언제 물고기를 잡아야 하고 언제 이동을 해야하는 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부터 자연의 변화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주민들이 자연의 변화와 이치를 깨닫고 이에 적응하면서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생활의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펭귄들은 펭귄들 나름대로, 원주민들은 원주민들 나름대로의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수 있도록 모든 피조물에게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잠언서 8장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보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의인화해서 지혜가 사람들을 향해서 나의 말을 들으면 너희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잠언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옆에 있었고 지혜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세상 창조에 기여하였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님께서 나를 데리고 계셨다. 주님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하나님의 세상 창조를 도와드렸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었습니다. 식물이 땅 속에 씨앗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 속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고, 펭귄과 같이 동물들의 일상생활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서 창조된 사람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모든 곳에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는 우리들을 깨우쳐주고 우리들을 위로하고 우리들을 일으켜 줍니다. 지혜는 우리가 하나님 뜻 안에서 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지혜는 우리들을 사랑하고 우리들을 보며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하늘의 지혜를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혜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혜가 성령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지혜이고 지혜가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보혜사 성령의 다른 이름이 지혜입니다. 성령께서는 때로는 바람과 불처럼 강하게 역사하시지만 때로는 비둘기처럼 조용하게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잠언서 8장은 하나님의 성령을 지혜로 표현했는데 특히 여기 나오는 지혜는 히브리어로 여성명사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우리를 가르쳐 주고 깨우쳐 줍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령강림절 두번째 주일에 항상 삼위일체주일을 지켜왔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볼록한 타원형 3개가 서로 겹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있는 왕관 타원형은 성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고 왼쪽에 있는 십자가 타원형은 성자 구원자 예수님을 가리키고 오른쪽에 있는 비둘기 타원형은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게 존재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자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또 그 다음을 보시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성부/성자/성령님을 사람으로 표현해서 그린 그림, 3분이 한 식탁에 앉아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삼위일체 신앙은 협력과 사귐과 교제의 신앙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함께 일하시고 함께 협력하시고 함께 교제하십니다.
잠언서 8장에서 지혜가 우리를 보며 기뻐하였다고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보며 기뻐하십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기독교가 협력과 사귐과 교제의 신앙이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협력하시고 상의하시고 교제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신앙생활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서로 교제를 나누고 서로 협력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곳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풍성하고 기쁜 신앙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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