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로 / 윤혜림

주현절 여덟번째주일 / 2월 세번째 주일
산 아래로
마태복음(Matthew) 17:1-9
윤혜림 전도사

 

제가 2주전에 와서 설교할 때 ‘물 댄 동산’에 대해 설교했는데요. 지난 주 저의 스승이신 김혜란 목사님께서 또 물에 대해 설교하셔서, 우리 박정애 장로님께서 이번주에 또 제가 물에 대해 설교를 하려나 말씀하시는 예배 영상을 제가 보고 왔습니다. 이번주는 제가 물에 더해서 산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J

그리스도교는 ‘생명수’로 대표되는 물 뿐만 아니라 산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가 있던 곳이죠.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곳은 ‘시내산’입니다. 그리고 ‘시온산’이라고 하는 구약에서의 아주 중요한 산은 이후 법궤를 옮기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웠던 ‘은혜의 땅,’ ‘거룩의 땅’을 의미하죠. 또한 신약에 와서도, 갈보리 산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산, 감람산은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신 산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 산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산은 하나님의 계시의 터전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이용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서도 산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오늘 좀 전에 부른 찬송가인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또 다른 찬송인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주님은 산 같아서’ 와 같은 찬송은 하나님을 산에 비유하여, “산을 바라본다”가 즉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오늘은 주현절의 마지막 주인, 산상변모주일 입니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드러내시고 변모하신 순간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주이지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산 위에서의 예수님의 변모사건은 정말 황홀경과 같은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습이 변하셔서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죠. 그리고 구약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했던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 앞에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나눕니다. 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정말 놀랍고, 영광스럽고, 마음과 시선을 모두 빼앗겨 어찌할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라는 생각을 했을테죠.

이 산상 변모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율법과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에 사실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다른 중요한 인물들도 있는데, 왜 하필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는지 궁굼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모세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하나님께 받은 자로,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자들 중 가장 초기 인물이면서 가장 위대했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설명할 때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고 예언을 이루기 위해 왔다고 하시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율법과 앞으로 올 세상을 대변하는 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니라, 그분의 정체성은 과거의 율법과 미래의 예언의 연속성 상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이 어떤 이야기의 연속성 상에 위치해 있는지도 정말 중요합니다. 오늘의 본문 직전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시죠.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막 대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하고 예수께 말하죠. 이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따끔하게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예수 당신을 따라 오려 거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엿새 뒤 베드로와 두명의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 위로 올라가셔서 이런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영광에 휩싸인 베드로가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성을 직접 목격하고, 이분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 아니라, 산 위에서 영광스럽게 머무르시면서 찬양 받으시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겪는 것 보다 그 아름다운 황홀경 속에 머물면서 상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죠. 예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손을 내미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오늘의 말씀은 위대한 예언자들과 함께한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에 대한 것이지만, 그 가르침은 산 위에서 영광을 누리고 정주하는 아니라, 산 아래로 주님과 함께 내려가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자마자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는 아이를 고치신 것입니다. 영광의 자리를 떠나,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을 떠나, 예수께서 산 아래로 제자들을 이끌고 내려오신 것은, 산 아래에 아직도 고통 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떠나, ‘죽으심’으로 인류 모두를 구원해야 할 지대한 십자가의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산상에서의 예수님의 변모가 황홀하고 아름다웠던 만큼, 그 자리를 떠나 오히려 고통과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예수의 모습은 그리스도교가 어떤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운동의 시작은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있었습니다. 율법에 얽매여 사람을 보지 못했던 종교를 뒤엎고, 억압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구원하고, 제국의 권력에 항변했던 예수께서는 결국 당신께서 예언 하신 대로 당시 정치.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시게 되지요. 그리고 이런 예수를 따라 살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이어 나갑니다. 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는 신앙, 세상의 권력에 맞서며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신앙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었죠.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부터 그 정체성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권력의 중심에 선 그리스도교는, 산 아래로 내려가 낮은 이들을 구원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 가장 높은 곳에 성전을 짓고, 스스로 선택 받았다고 여기는 이들 만이 상주하는 곳으로 교회는 변화하기 시작하죠.

이후로도 그리스도교는 역사속에서 많은 경우, 약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자들의 힘을 확장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어 오곤 했습니다. 이 캐나다 땅에 처음으로 유럽인들이 정착했을 때, 그리스도교를 전파한다는 이름으로 원주민 기숙학교를 짓고, 폭력과 차별로 원주민 아이들을 학대하고, 학살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끔찍한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권력을 내려놓고 약자들과 함께 하고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을 가르치셨는데, 그 정신을 잃어버린 그리스도교는 역사속에서 정말 많은 만행을 저질렀죠. 애석하게도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종교가 된 것에는 한편으로는 식민주의의 힘을 입어 다른 종교와 문화를 탄압하고 제압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요.

그런데 한편, 한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교 정신이 나타낸 힘은 조금 달랐다고 합니다. 한국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는 식민지를 확장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일제강점기에 제국의 힘에 맞서 항거하고 부정의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작용을 했었죠. 3.1운동 또한 그리스도교가 중심이 되어 낮은 이들이 함께 들고 일어난 평화 시위였습니다. 즉, 한국에 전파되었던 초기 그리스도교는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도록 낮은 이들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예수운동의 정체성을 그대로 반영한 종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한국의 그리스도교 또한 오늘날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만 혈안이 된 것은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가 큰 힘과 돈을 가지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세상의 낮은 이들을 보살피는 것을 등한시하는 것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나아가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있는 물은 언젠가 썩게 되지요. 어떤 곳에 상주하는 순간 누구든, 무엇이든, 본래 그 순수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고인물이 되고 썩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산 위에 초막을 짓고자 했던 베드로가 보여준 모습은 사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곳을 발견하면 그곳에 상주하고 정착하고 싶어하죠. 안정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안전한 자리, 영광스런 자리를 떠나 산 아래로 우리들을 계속해서 인도하십니다. 고인 물이 아니라, 산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생명수가 되라는 것이지요. 세상과 함께 깨어져버린, 오늘날 그리스도교에 몸담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낮은 곳에서부터 세상을 변혁시키는 새로운 교회를 꿈꾸고 세워 나갈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예수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은 우리는 예배를 마친 후 예수님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갑니다. 산 위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면, 그 이후엔 반드시 산 아래로 내려가서, 즉 세상으로 나아가서 예수님을 따라 낮은 이들 속에 함께하며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모든 행동, 즉, 산 위에서의 영적체험들은 산 아래에서의 사명으로 연결이 되어야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제가 구약의 이사야서에 기반해 설교를 할 때에도 이와 같은 말을 했었는데요. 오늘 신약의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산상변모사건을 이야기 할 때에도 동일한 메시지를 여러분께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정말 다양한 가지각색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낮은 이들을 일으키고 생명수를 흘려 보내는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입니다. 차별과 아픔이 없는 세상, 낮은 이들이 높아지고 높은 이들이 낮아져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영감을 주고 지혜를 주는 책이 바로 우리의 성경입니다.

때로는 그 성경 속 이야기가 부정의한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각성 시키기도 하고, 세상에 얼마나 고통 당하는 이들이 많고 깨어진 이들이 많은 지, 권력과 돈에 얽매였을 때 우리가 어떤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2000년 전 사회에 기반한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아직도 의미가 있고 큰 영감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세상의 깨어짐, 고통 받는 이들을 바라볼 줄 아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문제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갔던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면서 우리 또한 오늘날 이 사회를 변혁시킬 지혜와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것이고 마흔살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인 사람은 머리가 없는 것이다.” 젊어서 보수주의자인 사람은 열정이 없는 것이고, 나이가 들어서 개혁주의자인 사람은 현실을 볼 줄 모르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심장,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나이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정치 시스템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고 따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장은 예수님의 열정이 있으셨던 낮은 이들 가운데에서 뛰어야 하며, 우리의 머리는 이익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상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일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정의하는 것들, 나이, 성별, 인종, 사회/경제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가지지 못한 것을 따지지 않고, 모두 함께 모두를 위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한 곳에 상주하고 그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더 힘써야 할 부분은 힘쓰고 바꾸어야 할 부분은 바꾸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지요.

이번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현절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이 현현하셨다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이고, 사순절은 예수님이 부활 이전에 당하신 고난의 사십일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산상변모주일은 바로 이 주현절과 사순절 사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현절을 마무리하고, 사순절을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라 저 산 아래로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면서 함께 부르실 찬송은 ‘내 진정 사모하는’ 인데요. 곡 가사에 이런 부분이 등장하죠.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우리가 예수님을 발견할 자리는, 산 꼭대기가 아니라, 산 아래입니다. 예수께서 당신께서 있으실 자리, 교회가 있을 자리가 산 밑이라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산 밑에서 백합을 발견하듯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의 아픈 곳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는 사순절 기간 동안 산 아래로 함께 내려가자고 계속해서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함께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내려가셔야 할 산 아래는 어디인지를 고민하고, 그 산 아래에 직접 내려가 낮은 이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는, 그리고 그 낮은 곳으로부터 세상을 변혁시키는, 예수를 따라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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