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일곱번째 주일/ 7월 세번째 주일
말씀의 하나님, 세상, 그리고 나
창세기(Genesis) 25:19-34, 로마서 8:1-11, 마태복음 13:1-9, 18-23
유상진 목사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요? 지금 우리가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요? 우리는 여러 성서의 전거들을 통해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을 표현은 해야 하겠고, 그러다 보니 서툰 우리의 입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르자고 약속을 한 거지요.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려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삼위일체 신관은 그저 신비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지만 그래도 일반적으로 삼위일체 신관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한 분이시고, 존재 방식으로 세 위격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나마 우리는 각각의 위격들을 상징하는 성서의 여러 표현을 심심찮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일테면, 길, 진리, 생명, 창조, 말씀, 사랑, 빛, 은혜, 바람, 불, 비둘기…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상징어들은 다 일맥상통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삼위일체 신관의 세 위격을 가장 동시적으로 상징하는 표현은 아마도 “말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적에 말씀으로 창조하시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것 이전에 말씀이 먼저 존재했던 겁니다. 말하자면, 로고스, 이 말씀은 모든 존재의 토대입니다. 뜻하는 바는 다르지만 하이데거라는 독일의 철학자는 시적인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다 아실 겁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1:1) 그리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1:14)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동시에 말씀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6장 17절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여기서는 말씀을 성령 자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라는 단어는 삼위일체 신관의 세 위격을 공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과 “말씀”이라는 표현은 동일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 동일한 무게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의 하나님”이라고 썼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 곧 말씀(Logos)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Kosmos)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Ego)와의 삼각관계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하나님, 곧 말씀과 세상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대표적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속해 있는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가 이 13장에만 여섯 개가 들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종의 머리말 같은 비유라고 보시면 됩니다. 첫 번째 본문인 1절에서 9절까지는 비유 자체를 기록하고 있고, 두 번째 본문인 18절에서 23절에는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해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해석의 첫 마디를 들어보십시오. 19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이라고 시작하십니다. 이 첫 마디에서 알 수 있듯이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천국 말씀에 대한 청중들의 이해도 내지는 청중들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전체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비유입니다. 23절의 말씀을 더 읽겠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깐 이런 겁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 돌짝밭에 뿌려진 씨, 또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부류이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깨닫는 부류라는 겁니다. 지금 어떤 적당한 중간이 없습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엇갈림은 어떻게 보면 좀 난감하고, 불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을 깨닫는 부류에 속하십니까? 아니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부류에 속하십니까? 그리고 도대체 적당한 중간도 없는 이 극명한 대척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한 발 더 다가가 보십시다.
마태복음 13장 1절과 2절의 말씀입니다.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오셔서, 바닷가에 앉으셨다. 많은 무리가 모여드니,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무리는 모두 물가에 서 있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 앉아 계셨는데 많은 무리가 모여들어서 어쩔 수 없이 배에 올라앉으신 모양새입니다. 예수님은 뭍에 대어 있는 배 위에 앉아 계시고 무리는 바닷가에서 선 채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장엄하고, 평화스러운 장면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닙니다. 해변 모래밭에는 수많은 사람의 발 도장이 찍혔을 겁니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각각의 발자국들이 섞였겠지요.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기도 했을 것이고, 자리를 잡기 위해 버티기도 했을 겁니다. 혹은 자리 잡기를 포기하고 점심 끼니가 담긴 봇짐을 끌어안은 채로 그냥 그 무리에 몸을 맡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해변을 채운 무리의 모습만 그려 보아도 이 세상 전부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Kosmos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각각의 발자국들이 섞여서 알 수 없는 자취를 남기고, 이리 밀리기도 하고 저리 밀리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기 위해 버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혹은 자리 잡기를 포기하고 알량한 점심 끼니 도시락 하나가 상하지 않게, 끌어안은 채로, 혹은 양손으로 높이 들고 그냥 그 무리에 몸을 맡깁니다. 이게 우리의 한 세상이 아니고 뭡니까? 나는 그 어느 한 부분에 속해 있는 한 존재로서 이 세상을 살아내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뒤엉켜 자신을 바라보는 무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씨를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새들이 와서, 그것을 쪼아먹었다. 또 더러는 흙이 많지 않은 돌짝밭에 떨어지니,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났지만, 해가 뜨자 타버리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러나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13:3b-9) 이게 무리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 전부 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무리의 반응이 어땠겠습니까? 우레와 같은 박수가 나왔겠습니까? 아니요, 분위기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0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 개인적으로 묻는 거지요. 뭐 예수님의 이 말씀 후에 그 해변에 붐볐던 무리가 하나, 둘 흩어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아한 듯이 묻는 겁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일종의 컴플레인을 한 겁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때 거기서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말씀이었습니다. 뭐 지금이라면, 도대체 어떤 바보 같은 농부가 그 아까운 종자씨를 길과 돌짝밭, 그리고 가시덤불에 뿌리는가?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귀한 사연이라도 있는가? 하고 말씀이라도 한 번 더 새길 텐데 그런 여지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농경법에는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요아힘 예레미야스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근동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파종을 하고 난 다음에 밭을 경작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흔히 농부들의 통로가 되는 밭고랑에 떨어진 씨가 있겠지요? 그것이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에 뿌려진 씨가 되는 거지요. 당연히 가시엉겅퀴나 돌짝밭에 씨를 뿌린 것이 아니고, 파종 후에 밭을 갈다 보니 씨가 뿌려진 곳이라도 가시엉겅퀴도 나오고, 돌짝밭도 나온다는 겁니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농부의 파종방식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저는 이 추론에 동의하지만 추론의 논리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저지대의 농부들이 화전민도 아니고, 어떤 땅을 처음 개간하는 것은 아닐 거 아닙니까? 어떤 농부든 자신의 땅에서 한해의 농사만 지어도 땅의 지기를 알아차리지요. 당연히 아무리 파종 이후에 밭을 갈아도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요 말씀을 읽었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혼자 속으로 농부의 파종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귀한 종자씨를 길이나 자갈밭에 뿌리는 바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그때 이스라엘의 기후에 주목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의 봄 4월에서 5월 중순에 노란 송홧가루가 날리잖아요? 제 어릴 적에는 한참 봄비가 내리고 난 다음에 고인 빗물 위에 노란 송홧가루가 떠다니는 걸 자주 보았습니다. 이 풍경을 여러분도 보셨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네 가지 밭에 씨를 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딱 이 상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팔레스타인의 연간 강수량은 500MM입니다. 우리 고국 한국의 강수량은 1300~400MM정도 됩니다. 벤쿠버도 우리나라 강수량과 비슷하고요, 우리가 사는 토론토도 900MM정도 됩니다. 팔레스타인의 강수량이 두 배 이상 적은 거지요. 그만큼 팔레스타인에서는 물이 귀합니다.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습니다. 건기인 거지요. 그 귀한 비가 언제 내리냐? 10월 중순부터 2월까지 약 4달간의 우기에 내립니다. 이 4달동안 팔레스타인 전체 강우량의 80%에 해당하는 400MM 비가 내립니다. 이것이 성서에 등장하는 이른 비와 장마비입니다. 늦은 비는요? 4월에서 5월 초까지 마지막으로 내리는 100MM 가량의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부들은 10월 중순부터 12월 초순까지 2달에 걸쳐서 곡류부터 시작해서 콩까지 파종을 했습니다. 이 시기에 파종을 하지 않으면 수확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치수 시설이 미비했을 고대 근동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우기에 갑작스럽게 불어난 물이 개간 전, 밭에 뿌려 놓은 씨앗들을 흘려보낼 수 있었을 겁니다. 흐르는 물 위에 씨앗을 뿌린 것이나 다름없지요. 물에 씻긴 씨앗이 물 따라 사람이 다니는 고랑으로 흘렀을 가능성은 100%입니다. 그 물이 씨앗을 쓸면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가시 엉겅퀴가 무성한 저지대에 고이는 것도, 또 물이 잘 흡수되는 자갈밭에 고이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거지요. 반면에 이랑 위에 잘 안착한 씨앗도 있었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네 가지 밭에 뿌려진 씨앗은 제가 어릴 때 봄비에 떠다니던 송홧가루를 보는 것 만큼 흔했던 겁니다.
제가 이 농부의 파종방식을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은 이런 아주 당연하고 그들의 눈에 너무나 흔한 농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집을 떠나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특별한 것을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목마른 마음으로 지혜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병을 고치고 싶어서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전에 전해 들은 벳새다의 기적을 기대하면서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쟁과 결핍으로 흔들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교훈을 찾으려고 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무리에게 너무나도 흔한 일상의 풍경을 이야기하시면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그러셨던 겁니다. 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사람들은 터덜터덜 발을 끌며 떠납니다.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실망은 다시 예수님의 반대 방향으로 찍힌 수 많은 발자국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둘씩 그렇게 뒤돌아 각자의 생업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이 풍경도 마찬가지입니다. Kosmos, 저는 오늘의 이 세상을 고스란히 다 드러내고 있는 풍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언제나 떠난 이의 빈자리는 남은 이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초라해도 이렇게까지 초라할까요? 아무리 이사야의 예언(사6:10)을 인용한 것이라지만 예수님의 변명치고는 좀 유치한 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5절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태도를 한탄하시는 겁니다. 그리고서 남은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풀어 주십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서의 두 번째 본문에 해당됩니다. 제가 마태복음 13장 19절에서 23절에 걸친 예수님의 해석을 간략하게 읽겠습니다. “길에 뿌린 씨는 하늘나라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돌짝밭에 뿌린 씨는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환난이나 박해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는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 좋은 땅에 뿌린 씨는 그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많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깐, 말씀과 세상 사이에서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양태를 이 네 가지 밭으로 표현하신 겁니다. 말씀과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문제 삼고 계신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은 이 삼각관계를 색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강세현집사님께서 낭독해 주신 창세기 25장의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 주인공은 야곱과 에서입니다. 쌍둥이 형제이지요. 가깝고도 먼 이 두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가문의 적통은 맏아들의 계보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이스라엘의 오래된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들의 조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동생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은 이 역사의 전주곡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19절에서 26절까지에 동생이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온 이 쌍둥이 형제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고요, 27절에서 34절까지에 성인이 되어서 맏아들의 권리를 사고파는 두 형제의 팥죽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어릴 적, 교회학교를 다닐 때부터 이 이야기를 백번은 더 들었습니다. 사실 이야기 자체로만 보면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쌍둥이 동생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출생한다는 것도 그렇고, 형제들끼리 죽 한 그릇으로 맏아들의 권리를 사고판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뭐 어쨌든, 아버지 이삭으로서는 한숨 나올만한 일입니다. 불운한 가정사입니다. 여러분은 야곱과 에서 중에 한 사람을 친구로 삼으라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에서와 친구로 지낼 겁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사실 이 쌍둥이 형제들의 인간성을 까놓고 보면, 에서가 훨씬 더 매력적입니다. 야곱은 남의 약점을 잘 이용해서, 속여먹는 데는 도가 튼 사람입니다. 당장 배가 고파 어쩔 줄 모르는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고작 팥죽 한 그릇으로 맏아들의 권리를 사들이는 이야기가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이외에도 야곱의 전적은 화려합니다. 눈먼 아버지 앞에 양의 털을 뒤집어쓰고 와서 거짓말을 해 가면서 아버지로부터 맏아들의 축복을 받는 모습은 그야말로 양의 탈을 쓴 여우 아닙니까? 뿐만이 아니라, 삼촌 라반의 재산을 미신 같은 교묘한 방식으로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에서의 성품은 야곱과 정반대입니다. 당장 오늘 본문의 팥죽 사건에서 보듯이 맏아들의 권리에 그렇게 연연해하지 않는 호연지기를 우리는 에서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쳤다가 20년 만에 돌아온 동생 야곱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정작 야곱은 밴댕이 속알딱지처럼 밤새도록 형의 보복을 두려워하면서 시름을 앓았잖아요? 그러나 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가로채고 도망쳤던 동생을 그야말로 혈육의 정으로 대하는 겁니다. 그의 앞에서 야곱의 허물은 눈 녹듯이 녹습니다. 이 정도만 보아도 그의 대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에게도 이런 쌍둥이 형제의 인간성이 보이지 않았겠어요? 실제로 이삭은 에서를 더 선호했습니다. 우리가 둘 중에 누군가를 친구로 삼아야 한다면, 단연 에서를 먼저 꼽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 구약성서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적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야곱이어야만 한다기보다도 에서에게서 일종의 결격 사유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창세기 25장의 제일 마지막 문장을 읽겠습니다.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
여러분, “맏아들의 권리”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진 것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의 맏아들의 권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연관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맏아들의 권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창세기 25장의 마지막 문장을 “에서는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겼다.”라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야곱을 선택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인간성과 에서의 대범함과 에서의 남자다움 때문에 에서를 더 친구삼고 싶어 했던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면도 생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추위와 더위와 배고픔을 느끼도록 만들어 놓으셨잖아요. 삼시 세끼를 먹어야만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신 분이 하나님 아닙니까? 오히려 에서는 식구들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하루 종일 들로 산으로 토끼 잡으러 다녔던 사람입니다. 야곱은요? 형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형의 권리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면, 야곱을 벌하시고, 형 에서를 선택하시는 게 사실 더 타당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배고픔을 이용한다는 것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아마 이것이 에서의 항변이라면 항변일 겁니다. 창세기 25장 32절에, “이것 봐라,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한 사람은 누구인가? 야곱인가? 아니면, 에서인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맏아들의 권리가 아니라 당장 배고픈 것을 해결해야겠다는 에서의 반응 속도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배고픔의 문제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최소한 입고, 자고, 먹고, 배설하고, 그리고 그 선순환을 위해서 노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 자체를 건강하게, 그리고 나름 여유롭게 산다는 것은 좋은 겁니다. 그 와중에 풍요한 문화와 적당한 복지를 향유 하면서 살면 더 좋은 겁니다. 뭐 두말하면 잔소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아마 저의 동갑내기 친구도 제 말을 이해할 겁니다. 저는 조그만 직장에 매일 출근하면서 하루의 일당을 받는 사람입니다. 날품을 파는 사람입니다. 제 받는 급료는 얼마 되지 않아서 저희 다섯 식구가 사는 아파트의 랜트비를 내고 이런저런 공과금을 내고, 식료품을 사면 아껴아껴 써도 매달 마이너스통장의 빚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대소사에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내면 살림살이는 더 쪼그라들지요. 저는 살림을 사는 저희 집사람에게 빚이 얼마나 있냐고 묻는 사람입니다. 집사람에게 늘 미안한 가장이지요. 당연히 대학 졸업반인 저희 큰애와 지금 학업을 중단하고 직장을 구하고 있는 둘째에게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독립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단돈 100불을 준 적이 없으니 아비로서도 미안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 반면에 제가 아는 동갑내기 친구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이민을 와서 영어도 잘하고, 나름 그럴듯한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돈을 법니다. 물려받은 유산이 많아서인지 고급 자가용이 3대가 있고요. 좋은 집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주 예쁘고 늘씬한 두 따님에게 좋은 과외를 시키고, 꼬박꼬박 고액의 용돈도 줍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걱정거리를 제가 종종 듣습니다. 그 걱정거리는 언제나 돈을 아끼는 방법, 돈을 버는 방법으로 귀결됩니다. 일테면 집값 동향 같은 굵직한 항목에서부터, 오늘의 가스비가 몇 센트 올랐고, 내일 몇 센트 내려가니 자동차의 가스를 언제 넣어야 한다는 등의 세부 항목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는 소정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은퇴하고 최소 70살 정도가 되면 롱텀케어에 가야 하는데 요즘은 100세 시대고, 요사이 괜찮은 롱텀케어가 월 6000불 정도 되니 물가 상승률 등을 고려해서 70살이 되기 전에 자신의 통장에 최소 200만불 이상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나름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사는, 뭐 저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 친구가 저보다 더 배고프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자주 놀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뭐 그런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하지요. 사실 이렇게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에 무엇이 유익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이 살아갑니다. 직장에서 승진하고, 혹은 사업을 확장하고, 몇 개의 집을 사고팔면서 재화를 축적하고, 꼬박꼬박 건강을 체크하고, 노후를 설계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가장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돈이고, 돈이 실질적인 현실이니, 그것에 자신의 인생을 몰빵합니다. 거의 죽기 직전까지 돈을 법니다. 마치 사냥에서 지금 막 돌아온 에서처럼 늘 허기져 있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날 저녁에 먹을 라면값이 없는 가난을 폄훼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허기져 있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 정신을 말하는 겁니다. 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의 생필품의 갯수가 70개였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생필품이 900개로 늘었습니다. 10배는 더 풍요로워 진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더 배고파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그 허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아니 먹으면 먹을수록 그 허기는 더 심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렇게 거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서 내 삶의 근원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꽃 피워질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습니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 그럽니다. “야, 이것 좀 봐라, 지금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하나님이고, 뭐고, 무슨 상관이냐?” 그럽니다. 제가 굳이 다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이 끝없는 사람들의 허기가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부조리들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사실요. 이렇게 말씀과 세상과 나와의 삼각관계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 본문은 말씀과 세상과 나와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5절에,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라고 되묻는 에서가 육신의 것을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요? 말씀을 받았어도 악한 것들에게 그것을 빼앗기는 사람도, 말씀이 그 속에 뿌리내리지 못해서 세상의 환난과 박해 앞에 쉽게 무너지는 사람도, 말씀이 그 마음에 심겨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도 육신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로마서 8장 6절 이하의 세 절은 이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의 육신에 속한 생각을 점강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에,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7절에,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입니다.” 8절에,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제가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지만 어떤 글에서 이런 점강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압니다. 어떤 문제의 원인이나 변화들에 대해 세부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쓰는 문학적인 기교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이런 진술은 육신에 속한 생각의 결과로 죽음보다,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보다, 지금 당장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한 것이지요. 지금 이 한 세상에서 우리의 한 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 곧 말씀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통과 교재가 이루어지고 있다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곧 말씀과의 온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오늘 서신서의 마지막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여기서는 반대로 점층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마침내 죽음의 권세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에, “말씀이 좋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육십 배가 되고, 어떤 것은 백 배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 곧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은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 세상과의 관계 설정이기도 합니다. 이 셋은 삼각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것 봐라, 나는 지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다. 지금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가 뭐 그리 대단한 거냐?”고 되묻는 항상 배고픈 에서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성령에 속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펄펄 살아서 죽음의 권세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말씀처럼 100배, 60배, 아니 30배의 열매라도 맺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정답은 없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말씀의 씨앗이 이제 겨우 우리의 가슴에 싹을 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스스로 딱딱한 길이 될지, 엉겅퀴 무성한 가시밭이 될지, 돌무더기가 될지, 혹 우리의 가슴이 건강한 토양이 될지 아직은 모릅니다. 우리는 그냥 끝없이 신앙하고, 구도하고, 수양하고, 소망하면서 하루하루를 걸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는 어떤 특정 장소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가 묵묵히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눅17:21)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희미하게 보이는 말씀의 하나님이, 로고스가 우리 존재의 깊이에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에서 마주 읽은 시편의 노래는 이미 이 말씀을 존재의 차원에서 경험한 사람의 노래입니다.
“주님께서 땅을 돌보시어, 땅에 물을 대주시고, 큰 풍년이 들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큰 복을 내리시어, 한 해를 이렇듯 영광스럽게 꾸미시니, 주님께서 지나시는 자취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목장마다 양 떼로 뒤덮이고, 골짜기마다 오곡이 가득합니다.”(시65:9a, 11, 13a) 여러분, 이 노래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이 시인의 목장이 양 떼로 뒤덮이고, 이 시인의 밭에 오곡이 가득했을까요? 시인 자신이 소유한 들과 언덕에 기름이 뚝뚝 떨어졌을까요? 어땠을 것 같아요? 사실, 이 시인의 노래만 놓고 본다면, 시인이 굉장히 배부르고 기름지게 잘 먹고 잘사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허기진 세상이 설정해 놓은 성공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의 시는 그런 세상 성공자의 노래가 아닙니다. 아무리 먹어도 그 허기가 가시지 않는 에서의 세상 아닙니까?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농사가 잘된다면 이런 노래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노래는 너무 궁핍했기 때문에, 아니 그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하나님에 전착했기 때문에 나오는 찬양입니다. 여러분, 에릭 엔스트롬이라는 사진작가의 작품 “기도하는 노인”을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탄광촌에서 신발 흙털개를 파는 한 노인의 사진입니다. 그 신발 흙털개 장사는 그렇게 신통치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그 노인의 식탁 위에 있는 빵 반 조각과 죽 한 그릇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앞에서 진심어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찍은 엔스트롬의 사진을 그의 따님이 그림으로 그려 놓은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유명한 “기도하는 노인”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배고팠던 사람만이 한 끼의 식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않습니까? 이 시인의 노래도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내 존재의 고향이 되어주신, 마침내 이 세상의 토대, 가장 궁극의 말씀이 되어주신 하나님 앞에서 감격하며 부르는 찬양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그 허기가 가시지 않는 에서의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는 시인의 노래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내 밥상 위의 떡이 아무리 작아도,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먹고도 늘 허기진 사람보다 훨씬 더 깊은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아니 이미 이 지상에서 천상을 사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절을 마지막으로 읽겠습니다. “아아, 내 저 깊은 곳에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고, 즐거운 노랫소리는 도무지 그쳐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늘밤 잠들기 전에 이 노래가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길 마음 깊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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