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열세번째 주일/ 8월 네번째 주일
Feeling을 넘어선 Faith
로마서 12:1-1,
윤혜림 전도사
제가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한국사회에 꽤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습니다. 우리 알파교회 성도님들도 아실텐데요, 7월 말부터 갑자기 묻지마 범죄가 한국 이곳저곳에서 많이 일어났습니다. 연달은 사건의 시작점이 된 신림역 흉기난동 사고의 피의자는 범행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나는 불행하게 사는데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고, 분노에 가득 차 범행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범죄를 전형적인 묻지마 범죄 중에서도 ‘시기’ 유형이라고 진단하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습니다.
충격을 준 또 다른 사건은 서울의 한 초등학교의 교사가 학부모의 갑질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이초 교사 사망 사건인데요. 이 사건을 계기로 학부모들에 의한 심한 교권 침해 사례들이 정말 많이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어떤 학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두고 “왕의 DNA를 가진 아이이니 왕자에게 말하듯 듣기 좋게 말해달라. ‘하지마’ 혹은 ‘안돼’와 같은 제재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달라”며 교사를 압박했다고도 알려졌죠. 내 아이가 자기 자신이 최고라고 느낄 수 있도록,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라는 일부 학부모들의 무리함을 넘어 어처구니 없는 요구가 참 많다고 합니다.
비단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열등감, 우월감, 시기심, 자만심이 넘쳐나는,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우울과 폭력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토론토에서도 여름 동안 다양한 폭력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처럼 부정적이고 잘못된 감정에서 기인해 수많은 사회문제들이 일어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은 우리 시대를 “공감의 시대”로 명명했습니다. 2010년, Jeremy Rifkin이라는 미래학자는 “The Empathic Civilization”이라는 책을 편찬했고, 이는 한국어로 “공감의 시대”로 번역되었습니다. 현대는 경쟁의 시대였던 근대의 개인적 틀을 벗어나 타인과 공감하는 시대가 열릴 것임을 강조하였죠. 그로부터 7년 후, 또 “공감의 시대”로 번역된 책이 편찬되었는데요, Frans de Waal 이라는 학자의 The Age of Empathy입니다. 그 또한 “탐욕의 시대가 가고 공감의 시대가 왔다”고 반가워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공감의 시대가 왔다며 우리 사회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내다보았는데, 대체 왜, 지금 우리 사회는 공감을 통한 화합은 커녕, 전쟁이 또 발발하고, 혐오범죄는 끊이지 않고, 묻지마 범죄는 계속되며, ‘내 아이가 최고여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탐욕이 더 만연하고 있는 것일까요?
장대익이라는 우리나라 학자는 공감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의 과잉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즉, 내 주변 사람, 내 아이, 내 공동체, 즉 내집단에 대한 공감의 과잉이 외집단을 만들어내고 그 경계를 더 강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집단 선호와 외집단 폄훼는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니기에 내 주변인에 대한 공감이 과해질 수록 ‘내 사람들’이 아닌 타집단에 대한 공감은 갈 수록 더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경계가 점점 견고해 지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 쌓아온 이들은, ‘나 혼자서만 고통받을 수 없다’라는 마음에 다른 이들의 삶을 망쳐버리고자 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삶 속에서 느낌, 즉 감정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영역에서 모티브가 되고 아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 공감, 우정 등의 인간관계에 관한 것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삶의 목표인 ‘행복’ 또한 감정의 개념으로 이해되지요. 하지만 정말, 우리 삶에서 이토록 중요한 부분들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으로만 이루어져 있을까요?
과학적 근거에 따르면 인간이 사랑을 ‘느끼는’ 기간은 보통 18개월, 길어도 3년이라고 하죠. 사랑하는 상대를 보았을 때 기쁨이 샘솟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도파민이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이 계속 분비되면 대뇌에 항체가 생성되어 더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의 유효기간이 정말 그것 밖에 되지 않을까요? 아니, 사랑에 정말 ‘유효기간’이 존재할까요? 사랑을 몸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에 좌지우지 되는 감정으로만 이해한다면 물론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사랑’을 감정을 넘어선, 믿음, 헌신, 함께한 시간, 노력, 추억, 이런 모든 것이 합해진 전인적인 면에서 이해한다면 결코 그 유효기간을 따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신앙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척도로 삼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울부짖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의 신앙이 좋다고 우리는 종종 생각하죠. 하나님의 사랑이나 감사함이 느껴지지 않거나 우울감이 찾아온 날에는 나의 신앙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파민 호르몬의 유효기간이 있듯이, 오랜 시간 그리스도인으로 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느낌이 무뎌지는 것, 그 뜨겁게 타올랐던 열정이나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과 감정을 새로이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감정에만 기반한 것이 아님을 알고 그를 넘어서는 전인적인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며, ‘그것이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몸’은 우리의 육신만이 아닌, 전인적인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삶 전체, 감정, 사고, 육신, 영혼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합당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2절: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이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나 자신을 비교하게끔 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좌절감과,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타인에 대한 잘못된 우월감과 자만심을 느끼기도 하죠. 앞서 언급한 사례들처럼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사고들을 잘 들여다보면 대부분 나와 타인을 비교함에서 온 열등감 혹은 우월감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고유한 우리 존재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이 시대의 풍조입니다. 우리의 존귀함의 원천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게 하며, 결국 우리는 그것을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찾으려고 합니다. 타인보다 내가 나아 보이면 나는 존귀한 존재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존귀하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 자신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사실 타인의 존귀함 또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4절,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으나 그 지체들이 다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씀, 그리고, 6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야 말로, 타인과의 비교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일러줍니다. 팔이 하는 일과 눈이 하는 일은 전혀 달라 애초에 무엇이 낫다 덜하다 비교가 불가능한데, 저마다 다른 신령한 선물을 하나님께 받은 우리가 하나의 기준을 놓고 서로 비교하며 열등감과 우월감을 가지며 존귀함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가요?
우리의 신앙은 타인과의 비교를 부추기는 세상의 풍조를 거스를 줄 알아야 하고, 사회 현상과 그날의 기분에 좌지우지 되는 감정feeling을 넘어설 줄 알아야 합니다. Feeling보다는 fact에 기반한 faith로 성숙해야 합니다. 그 fact는 바로, 우리 각자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떠 존귀하게 만드셨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들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안에서 우리 각자는 서로 비교 할 수 없는 역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풍조에 이끌려 그때그때 느껴지는 우월감/열등감의feeling에 기반한 것이 아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한 사랑을 늘 받고 있다는 fact에 닻을 내리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앞서 언급한 장대익이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공감의 반경’에서 공감을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 두가지로 분류하는데요. 정서적 공감, 즉 느낌에 기반한 공감은 내 사람들, 내집단에 대해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느끼는 공감입니다. 한편 인지적 공감, 즉 사고에 기반한 공감은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역지사지’를 해 볼 줄 아는 의도적인 인지적 공감입니다. 인지적인 공감을 통해 내 주변인을 넘어서 공감의 반경을 점점 더 확대 할 때, ‘공감의 시대’가 정말 우리 사회의 화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감정의 중요성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놓친 부분을 짚어내 느낌에 기반한 공감이 아닌 사고에 기반한 공감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통찰이 첨예하게 다가옵니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사고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는 저자의 의견에 십분 동의하는 한편, 저는 우리는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느낌의 공동체, 사고의 공동체를 넘어선 신앙의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느낌의 영역, 사고의 영역을 넘어선 영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그 영의 영역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전인적인 우리의 존재 자체를 아우르는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한명 한명 존귀하게 창조하셨다는 Fact를 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이끄는 대로—나의 일, 나의 감정, 나의 공동체에만 몰두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다른 이들의 일, 다른 이들의 감정, 다른 이들의 공동체 또한 살피게 됩니다. 왜냐 — 내 능력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오늘의 3절말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각 사람의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는 바울의 말은 우리 각자의 존귀함만큼이나 타인의 존귀함을 알라는 말입니다. 겸손함을 넘어 이 세상 만물의 존귀함을 아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feeling을 넘어서 fact에 기반한 faith를 가지고 변화된 풍성한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그 삶을 기뻐하십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feeling만을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내 신앙이 좋다고 느끼는 것에 만족하고 그치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우리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계속적으로 새로이 변화하여 삶이 바뀌는 것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타인과 나를 비교하며 자신 또는 타인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이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또 다른 이가 가지지 않은 나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함께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 새로운 생활은, 일상에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눈으로 소중하게 바라보고, 그가 가진 재능, 은사, 능력을 알아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해낼 수 있도록 내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타인을 Empower 하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가지고 나의 power을 쫓고 추구하라고 가르치는 이 사회 속에서 내 능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Empower하며 함께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시대에 절실합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육신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는 날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없는 것 같은 날이 있기도 합니다. 또한 타인에게 존경과 사랑의 감정, 진정한 공감의 감정을 가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질투심과 시기심, 그리고 혐오와 같은 비교와 배척의 감정을 가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번 한주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정말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Feeling을 넘어선 Faith을 훈련하는 우리들은, 그 감정에 좌지우지 되어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삶의 반경을 좁히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순간 순간 드는 감정들을 좋으나 나쁘나 하나님께 내어 드리며,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히 여기시는만큼 다른 이들도 존귀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삶의 반경을 넓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받은 은사와 능력으로 다른 이들을 empower하는 삶을 살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 까지 영적 공감의 반경을 넓혀 그들의 삶을empower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또 다른 한주, 이번 한 주를 지내면서 우리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그 답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자연히 드는 feeling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fact에 기반한 faith를 각자의 삶 속에서 실천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 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늘 우리 각자에게 닿고 있다는 fact가 여러분의 영 깊은 곳까지 닿는, 그리고 그에 힘입어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또한 나눌 수 있는 한 주를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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