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후 열두번째 주일 / 8월 두번째 주일
요한복음 6:48-51
김훈 목사
예수님은 별명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한번 알아 볼까요? 선한 목자, 포도줄기, … 어린 양, 생명수, 길.진리.생명, 전능의 왕, 하나님의 아들, 선생 혹은 납비 등등 많습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생명의 양식 혹은 생명의 밥, 떡 이란 새 이름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받은 인상을 나타낸다고도 하겠습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가 맞고 어떤 것은 틀리는 것이 아니라, 모두 초대 교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여러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초점은 생명의 양식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 생명의 바켙, 생명의 떡 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양식이니라”는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인상을 주어 왔습니다. 오늘은 신학자+음악가의 합작, 화가, 그리고 문학가가 이해한 이 구절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 토마스 아퀴나스 (13세기) 세사ㄹ 프랑크 (19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자입니다. 13세기에 그는 하늘의 양식을 ..” 하는 유명한 가사를 썼고, 18세기에 세사ㄹ 프랑크는 곡을 부칩니다. 그래서 유명한 “하늘의 양식을 ..” 하는 찬양곡이 나옵니다. 영어 번역이나 한국어 번역은 지나친 의역이어서 본래의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라틴어 에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주님을 먹는다니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에서 먹는다니를 :”영양을 공급하니로 바꾸어 표현을 부드럽게 합니다. 아퀴나스의 라틴 시가를 직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사들의 빵이 사람들의 빵이 되었다
하늘에 속한 빵이 형상들을 끝냅니다
주님을 먹으니,” 얼마나 신비한가
가난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종이
“천사들의 빵이 사람들의 빵이 되었다.” 는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늘에 속한 빵이 형상들을 끝냅니다” 하늘의 빵이 “상징”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났음을 말합니다. 즉 빵이 여기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겸손한 종들이” “주님을 먹으니,” 얼마나 신비한가. 하는 뜻이 됩니다. 이 찬송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먹는다 – Manducat [먹는다] dominum [주님] 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나 아퀴나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가난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종이 주님을 먹는구나. 오~ 신비로운 일이여,…
아퀴나스는 13세기에 살았던 신학자로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기 이전의 신학자입니다. 그는 이 성찬식 노래 가사에서 하늘의 빵이 신비스럽게 “사람들의 빵”이 되었음으로, 사람들이 실지로 이 빵을 먹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과 피의 “본질”은 빵과 포도주에 나타나납니다. 예수님의 본질은 목자로, 양으로, 길로, 진리라는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듯이 포도주로 빵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맛과 질감은 일상의 빵과 포도주의 맛을 빌리고 있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의 본질을 갖게 되나, 그 맛은 여전히 빵과 포도주인 것입니다. 아퀴나스의 이해는 16세기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천주교는 포도주와 빵이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바뀐다고 이해하여 빵과 포도주의 맛을 부정하고; 개신교에서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 빵과 포도주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본질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실지의 포도주와 떡의 맛 안에서 예수님의 본질을 섭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 화킨 소롤라 이 바스티다 (1897)
19세기 스페인 화가 바스티다는 배 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립니다. 커다란 배의 돛을 배경으로 군중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예수님을 그리고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제가 본 많은 그림들은 실제로 빵을 들고 있는 모습의 예수님을 그렸는데, 바스티다는 빵을 그리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이 자신을 군중들에게 빵으로 내어 주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배의 돛은 잘 차려진 식탁의 비싼 식탁보이며, 예수님은 식탁의 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스티다의 천제성은 이렇게 자신의 몸을 군중들에게 내어 주지만, 황금빛의 돛은 인육을 먹는다는 식인 행위의 기괴한 느낌을 가려버리고 있습니다. 이를 처다 보는 군중들은 평화롭고 기대에 차 있으며, 경건한 모습입니다.
실지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 란 말씀을 하기 조금 전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셨습니다. 바스티다는 이러한 문맥을 고려하여, 우선, 예수님은 빵으로 이들의 배를 채우시고, 그런 후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바스티다는 예수님은 빵으로 이들의 배를 채우시고 이번에는 “생명의” 빵을 주신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아닐까요? 배고푼 사람들에게 “밥은 가서 먹고 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우리도 우리 이웃을 물리적인 떡을 먹여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이 있음을 표현한듯 합니다.
- 문학
그의 허술한 모습을 보고 동네 여인숙과 모텔들의 주인들은 방이 없다고 문을 닫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마을 끝에 있는 외딴 집에 가보라고 합니다. 그가 외딴 집을 찾았을 때, 주인은 그를 정중하게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식탁으로 가는 동안 그는 집안의 은 식기들에 압도됩니다. “이것들이라면 충분한 빵을 살만해..” 하고 생각하고는, 친절한 주인이 잠이 들자, 은 식기들을 챙겨 그 집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날카로운 눈을 가진 순경에게 붙들려 다시 집 주인에게 끌려 옵니다. “순경 나으리,” 집 주인이 순경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친구에게 준 선물이지요.” 그리고 놀라워 하는 도둑에게, 급히 떠나느라, 더 귀한 선물을 잊었군” 하고 말하면서, 은 촛대들을 건네 줍니다. 메사해진 순경은 떠납니다.
집 주인은 말을 잃고 서 있는 도둑에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오. 이 선물을 가지고가 당신을 위해 새 삶을 만드는데 쓰시요” 하고 말합니다. 이 경험을 가지고, 죄수 24601이라고 알려진 쟝 발쟝은, 아직도 쫓기고 있으나,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위고는 허구적인 신부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빵을 주시어, 우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려 애쓰십니다.
두번째로, 미리엘의 감독은 발쟝을 희망과 의미 있는 삶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어느 도시의 시장으로 있을 때, 한 노인이 마차에 깔리는 장면을 봅니다. 여기에 형사, 쟈베르도, 시민들도 그리고 쟝발쟝도 있었습니다. 쟝은 힘이 센 사람으로 이 사람만 이 마차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쟝발장이 이 노인을 구하면, 형사 쟈베르는 그를 쟝발쟝으로 금새 알아보고 체포할 것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른척 고개를 돌리면, 쟝발쟝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때 쟝은 이 노인을 구하는 –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도구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작은 마을 감독이 쥐어준 은 촛대, 빵의 효과가 아닐까요. 노인을 구한 쟝발쟝은 다시 어두운 도주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배고프십니까? 우리가 배고파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맞이하시고, 희망의 근원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초대하시고, 그리고 희망의 도구로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후란시스 아시시의 기도로 오늘 오후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Jesus’ self designation as the Bread of Life has inspired many people, such as Thomas Aquinas, y Bastida, and Victor Hugo.
Aquinas’ poem : Panis Angelicus .. Emphasizes that Jesus’ body gives its essence to ordinary bread; while they taste like bread (accidentals). He emphasizes that people are actually EAT the essence of THE LORD, tasting the taste of ordinary bread.
According to Y Bastida, Jesus gives himself as real bread, after the feeding of 5000. In this context, the focus of this title falls on the Bread “of life.”
In Les Miserables, Hugo shows how father Myriel fed the convict and help him to become an instrument of LIFE.
Jesus feeds us in body and in spirit, enabling us to be instrument of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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