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Creation)
9월 첫주일부터 시작되는 창조절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 중 가장 최근 들어 지키게 된 절기이다. 아직 세계교회가 합의한 절기는 아니어서 모든 교회의 절기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만 창조절에 대한 공감대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 기간에 성령강림절 역시 계속된다. 다만 일 년의 절반쯤 되는 긴 기간을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의미를 붙이려는 것이다. 전반은 성령절기로, 후반은 성부절기로 나누어 하나님의 달력 안에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을 더욱 분명히 하려는 뜻이 있다. 성자, 성령 절기와 함께 성부 절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기억하고 창조질서 회복을 실천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담고 있다.
창조절 제정에는 그만큼 우리 시대가 부닥치게 된 현실적 고민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의 파괴, 변화하는 기후, 무너져 내리는 생태계가 보내오는 위기신호에 둔감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지구공동체의 불안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은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창조절을 지키는 일은 그런 생명의 지혜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경에서 처음과 나중 그리고 중심인 주제는 ‘창조’이다. ‘혼돈에서 질서로의 창조’로 출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마친다.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이고, 마지막 부분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 21:1)에서 보듯 ‘창조’를 빼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모든 구원의 메시지는 바로 ‘창조와 창조 사이’에 있다. 유대교에서 랍비의 가르침은 인간을 가리켜 ‘쉬타후 라코디쉬 발루후 후’라고 불렀다. ‘하나님과 함께 창조과업을 이루는 사람’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 창조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다. 잠언은 지혜로운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 여기에서 1인칭 ‘내’는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자신을 경험한다. 경건한 이들의 예배는 한 마디로 ‘코람 데오’이다.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일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사람은 영원하고 보편하신 자의 발끝을 만져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친밀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느낄 수 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지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외면한 인류가 겪는 세상은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이다. 우상의 질서가 만연한 결과 인간은 존엄을 잃고, 샬롬의 세계는 파괴되어 왔다.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불신앙의 시대는 피조세계의 상실이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상들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힘과 물질을 숭상하며, 죄와 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죽음을 강요하는 모든 우상의 문화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다.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 14:12).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생명의 존엄을 지키시고, 평화를 회복하시는 주님이심을 고백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완성하셨다.
창조절은 자연사랑과 회복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창조의 삶을 배우는 절기이다. 절기를 지키며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그 분의 창조사역에 동참한다. 창조절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러기에 생명이 있는 한, 날마다 창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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