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대림절 두번째 주일 / 12월 두번째 주일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이사야서 40:9-11, 마가복음 1:1-5
최성혜 목사

최성혜목사 설교(1)동영상 보기

최성혜목사 설교(2)동영상 보기

달력은 태양과 달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월을 첫 달로 시작해서 12월을 지나면 한 해가 흘러갑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교회력은 교회의 주요 절기에 맞추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시작합니다. 양력 1월이 시작이 아닌, 성탄 4주 전인 대림절을 시작으로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창조절로 이어집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은 태양도 아니고 달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매년 빠르면 11월 말 또는 12월 초가 되면 새로운 교회력이 시작되는데, 그 처음은 ‘기다림’으로 시작됩니다. 이 기다림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리는 희망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기다림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사야서는 오늘의 본문인 40장을 기점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40장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으면서 ‘너희가 지금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망한다.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오라’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그러나 40장 이후부터는 이미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에 끌려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죽지 못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대체적인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전 586년,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다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 수 없도록 예루살렘의 성벽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집에 불을 지르고, 그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버렸습니다. 단순히 전쟁에서 진게 아니라 나라가 완전히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 옛날 다윗 왕조를 통해서 누리던 영광을 다 잃어버리고, 성전 파괴는 물론이요, 땅까지도 빼앗겨 버리는 비통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삶의 근거를 모두 잃어버린 처지가 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살던 땅을 모두 빼앗겼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노예와 같은 포로 생활을 살며 생명을 유지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난과 절박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하나님께 구원의 손길을 내밀면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의 본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으셨으며 절망과 위기와 희망을 잃어버린 이 바벨론 포로의 시기에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로하고 회복되며 구원으로 인도하실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이 기다림은 실로 긴 시간입니다. 이 시간 동안 하나님은 침묵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침묵이라는 것은 어떤 말이나 어떤 행동보다 더 큰 힘을 갖습니다. 저희 아이가 놀다가 너무 흥분해서 컨트롤이 힘들어 보일 때 아이를 잠시 품에 안고 1부터 10까지 숫자를 세어주면서 잠시 침묵하게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들뜬 마음과 생각을 가라 앉힙니다. 제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 혼이 날 때 무서운 시간 중 하나가 바로 이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뭔가 잘못한게 있는데 엄마가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 둘, 셋’을 셀 때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엄마가 왜 혼을 내실까? 내가 무엇을 잘못 했을까? 내가 어떤 행동을 했지? 어떻게 해야 엄마한테 잘못한 걸 용서받을 수 있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이 침묵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며 잘못을 뉘우치고 또 잘못된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는 깨달음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동 심리학자는 이 침묵의 숫자세기를 마법의 주문이라고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역시 큰 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잠잠히 기다리며 그들과 함께 하셨고, 이 깊은 침묵의 시간을 통해 그들 스스로가 과거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질책과 외면이 아닌 위로와 소망으로 그들을 안아 주셨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한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돌봐주시고 새로운 희망의 땅으로 인도하심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제가 동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어쩌다보니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군견이나 사냥개로 잘 알려진 셰퍼드입니다. 네.. 상상하시는 바와 같이 비주얼이 험상궂습니다. 저에게 반갑다고 달려와 안기면 제가 뒤로 밀려날 정도로 힘이 세고, 벌떡 일어서면 얼굴과 얼굴을 맞댈 정도로 덩치도 제법 큽니다. 이빨도 크고 날카롭고, 다람쥐 같은 동물들을 보면 크게 짖어대서 동물들도 저희 집 개를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저희 개가 무서워하는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저의 ‘씁~’하는 소리입니다. 웬만하면 지지 않고, 사납게 덤벼들 수 있어 보이는 개이지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나 심한 장난을 제지하는 주인의 소리에 ‘아, 내가 뭘 잘못했나보다’ 생각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하고 싶은 것을 억제했는데도 그 험상궂은 녀석이 반항하거나 덤벼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네, 바로 주인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하고, 자기 본능을 억제하는걸 배우고 주인의 뜻에 맞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저희 개가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렇게 저희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상대방을 제대로 알고 그래서 서로에게 길들여 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 길들여지면 우리가 그분의 생각과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손수 빚으시고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며,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이 관계를 벗어나거나 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습니다.

대림절을 보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묵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다림 가운데 침묵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올바르게 성찰하며 하나님께 속한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 놓고, 화해와 순종과 회개의 결단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그리스도를 희망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장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행적을 기억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치도록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왜 하필 마르고 건조하며, 사람이 살지 못하는 광활한 땅에서 외쳤을까요? 광야와 회개는 따로 떼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어 궁핍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도 멀어져 있습니다. 이런 광야의 삶으로 자신을 옮긴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회개의 선포는 광야같은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진실해집니다. 이지적이고 관념적인 회개가 아닌, 실제적인 삶, 즉 고민하고 갈등하며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우리 삶의 현실에서 온전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와 기도 훈련을 할 때 제일 힘들어했던 부분이 회개의 부분이었습니다.
아이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걸 참 어려워했습니다. 뭔가 잘못했다는건 마음으로 알겠는데,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해야하고, 또 자기 입으로 용서를 구해야만하는 자신과 싸우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도 자기 고집을 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압니다.
아이를 보면서 어쩌면 이게 나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된 저 역시 자존심을 꺾이지 않으려고 고집부리고 자기를 합리화하며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양심은 이미 알고 있지만,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때론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하며 그를 포용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해 참 싫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침묵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겸손하고 온유하며 은혜와 거룩함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우리는 이제 그분 앞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존심과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자녀로 길들여지기 위한 영적인 훈련에 분발해야 합니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이웃을 포용하는 믿음의 행위를 결단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종교적 갈망을 넘어서 정의와 평등 세상을 이루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회를 이루고자 모두 함께 참여하며 힘써야 합니다.

영성훈련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스토리를 나누며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아주 작은 참새가 비둘기에게 물었습니다.
“비둘기야, 눈송이의 무게를 알고 있니?”
비둘기가 대답합니다.
“눈송이에 무슨 무게가 있겠어. 허공처럼 전혀 무게가 없겠지.”
참새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를 들어봐. 내가 눈 내리는 전나무 가지에 앉아 눈송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지. 가지 위에 쌓이는 눈송이 숫자를 말이야. 눈송이는 정확히 374만 1,952개였어. 그런데, 그 다음 374만 1,953번째 눈송이가 가지에 내려앉으니까 가지가 그만 뚝 부러져 버렸어. 무게가 없는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는데 말이야!”
참새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에 잠긴 비둘기가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그래, 맞아. 세상에 평화가 내리는 데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부족한지도 몰라.”

우리의 지극히 작은 기도가 날마다 쌓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사랑의 표현이 가족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지극히 작은 용서가 나를 대적하는 원수까지도 포용하게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겸손과 위로의 말이 쌓여 우리 교회를 행복하고 신명나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섬김과 돌봄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어가게 합니다.

진실된 기다림으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매주설교로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