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이상적인 현실 / 유상진 목사

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 10월 네 번째 주일
너무도 이상적인 현실
요엘(Joel)2:23-32, 디모데후서(2 Timothy) 4:6-8, 16-18 누가복음(Luke) 18:9-14
유상진 목사

 

아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성서의 구절일 겁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구절 자체를 줄줄 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 전체가 노랫말이 되어서 수없이 불러 지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 결혼식 때에 축가로 많이 부른 구절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그 유명한 사랑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요.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라고 시작하는 아마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성서의 한 구절일 겁니다. 그 고린도전서 13 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 입니다.” 이 구절은 이 사랑장의 백미 중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행동강령 같은 “믿음”이라는 것보다, “소망”이라는 것보다 더 가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행위로서의 “사랑”, 그것을 말하기 위한 절정의 구절이라고 이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의문이 들지 않으세요? 아무리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어도 그렇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이라는 가치, 혹은 “소망”이라는 가치와 비교할 수 있는가? 사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그중에 그 어떤 것이 ‘으뜸이다!’라고 그렇게 쉽게 단언할만한 가치들은 아니지요.

성도님들과 성경 공부를 할 때 저는 이런 부분을 만나면, 좀 쉽게 설명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저는 주로 시간적인 개념을 차용해서 설명을 합니다. 이런 거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삽니다. 바깥에서 우리들을 향해서 “믿는 사람들” 이라고 지칭할 정도니깐요.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이 이제 내 눈 앞에 실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이상 그 믿음은 믿음 이 아닌 거지요. 현실인 거지요. 믿음이 현실이 되었을 때, 믿음은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소망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가 마음에 강렬하게 품고 있는 어떤 이상이 현실이 되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그 소망은 기능을 상실합니다. 그 반면에 사 랑이라는 행위는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믿음이 의미 없고, 소망이 그 기능을 상실할 때, 사도 바울의 진술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그때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시간을 염두에 두고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라고 고백한 겁니다. 뭐 이렇게 설명하는 거지요. 여러분은 제 설명이 마음에 드세요? 여기서 생각을 조금만 더 넓혀 보겠습 니다.

우리 알파한인연합교회는 1967년에 세워진 토론토 최초의 한인교회입니다. 그 처음의 이름은 토론토한인연합교회였습니 다. 그러니깐 오늘 우리는 55년 전에 캐나다 토론토 땅에 세워진 이 교회에서 수십 년을 함께한 믿음의 동지들과 예배드리고 있는 겁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여기 계신 어르신들은 이 교회의 산증인들이십니다. 우리는 그 뜨거운 젊음으로 이 교회를 세우고, 정의를 위해서 함께 어깨를 걸기도 했었습니다. 무구한 역사 속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신앙하고, 운동하고, 그래서 많은 것을 성취하기도 하고, 또 우리들의 역사 속에서 아쉬운 것들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 55년의 세월을 우리는 함께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뭡니까? 지금 우리에게 실재하고 있는 것이 뭡니까? 더구나 요전까지 우리 중에 함께 예배드리던 신앙의 동지들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가 4년 전에 이 교회에서 청년담당 파트타임 목사로 있을 때 뵙던 분 중에 보이지 않는 분들도 계십시다. 저는 감히 그분들이 어디 가셨는지 묻기에 겁이 납니다. 여러분, 우리의 세월이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남은 게 뭐가 있나요? 지금 실재하고 있는 것은 뭔가 요? 저 사랑장의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사랑”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능력인 사랑이신 그 분만이 지금 현재 우리의 현실입니다. 실재입니다. 제가 사랑장을 이렇게 고쳐서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하나님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하나님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지 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이 사랑장을 가장 담담하게 읽어 내려가실 수 있는 신앙의 노장들과 함께 몇 주 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저에게는 한없는 영광입니다. 어르신들에게 말씀드리기는 송구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 생의 끝이 있 다는 것은 우리가 출생하는 것 만큼이나 은혜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극명한 현실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어떤 젊은이가 이상을 품고, 인생의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걸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열심히 삽니다. 일정 정도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이루었습니다. 그런 성취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살다가 어느새 팔십 살이 되었다고 합시다. 아니 그렇게 살 다가 어느새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동안 자신이 이룩해 놓은 모든 업적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던 칭송도 다 의미 없어집니다. 그 젊은 시절, 가장 뜨겁게 추구했던 어떤 가치들도 자신의 기억에서 다 사라집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그런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게 되는 겁니다. 그 엄연한 궁극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거지요. 여러분, 제가 인생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하나님의 창조 행위 안에서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거기에 허무가 있을 수가 없지요. 단지 궁극적인 것 앞에서 나머지 것들은 의미 없어지는 거지요. 절대적인 것 앞에서, 나머지는 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저 유명한 사랑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것이 가장 최종적인 은혜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실을 더 빨 리 깨닫고 거기에 집중하면서 산다면, 세상이 말하는 잘 사는 기준에 매달려서 자신의 많고 작음 때문에 조바심치고, 두려워 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잘 입든지 못 입든지, 잘 먹든지 못 먹든지 이 세상이 말하는 그 어떤 것들보다 실재하는 사랑의 능력에 기대어 살 겁니다. 내가 잘 나가든지 못 나가든지, 높든지 낮든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삶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은혜 아니고, 뭡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 본문의 말씀은 이 궁극적인 현실 앞에 선 어떤 사람의 자기고백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의 전반부에 속하는 디모데후서 4장 6절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부어 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 음을 지켰습니다.” 오늘의 서신서 디모데후서는 전통적으로 목회서신으로 분류하고 있는 성서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연구 에 의하면 이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라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첫 구절에 그 대로 다 드러납니다. 그 당시의 감옥생활이라는 게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죽음을 생각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또한 재판 과정 이 그렇게 순조롭게 돌아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로마의 변방에서 참수형을 당합니다.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다.”라는 말은 그 당시의 제사법을 인용한 진술입니다. 그 당시의 제사법이 그랬습니다. 어린양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불사르기 직전에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가장 마지막 절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부어드리는 제물로 이미 부어졌다는 거지요. 그는 죽음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 편 지를 써 내려간 겁니다. 재판정에서나 들을 수 있는 피고의 최후 진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 오늘의 서신서 본문 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달려갈 길을 마쳤다, 믿음을 지켰다. 그리고요? 8절에,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생명이 이 세상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건 여전히 분명합니다. 사업에 성공해서 흥하기도 하고, 실패해서 망하기도 하고, 자식이 잘 자라주어서 기쁘기도 하고, 아니면 자식을 키우면서 울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잘해서 그야말로 핵인싸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해서 아웃싸이더가 되기도 하고, 가정생활에서도 준수하게 모범을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이런저런 오류를 범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우리는 병들고 늙습니다. 그렇게 아등바등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살다가 결국에는 죽습니다. 우리 의 육체는 우리가 사는 작은 별, 이 지구의 한 줌의 먼지로 화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하고, 함께 산 삶 의 경험을 추억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더 세월이 흐르면 아무도 우리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렇게만 본다면 생명을 가진 한 존재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마당에 바울은 자신의 전 존재,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다.” 여러분, 어느 것이 더 이상적입니까? 어느 것이 더 현실적입니까?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자랑합니다. 그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더욱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명을 누린다고 선전합니다. 뭐 요즘 말로 100세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런 데 여러분, 솔직히 저는 제 주변에서 100세를 넘기는 분을 단 한 분도 뵙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00세를 살면 뭐 하고, 90 세를 살면 뭐 합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원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생명 연장의 이상을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 같습니까? 아니요, 거꾸로 생명을 파괴합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전쟁 무기가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미안하지만 지금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유전자 조작이나 과학의 도움으로 이룬 인간들의 풍요가 오늘의 기후위기를 불러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간의 지적 수준이 더 높아져도 세상이 여전히 평화와는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뭐 AI니, 로봇이니, 자율주행이니 하는 것들이 미래를 완벽한 세상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는 선전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까지의 전적을 보아도 그것은 너무나 비현 실적입니다. 어떤 마술사가 하나님께 내기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처럼 자신이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선전합니다. 그 내기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방송기자들도 취재를 합니다. 그야말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그 내기장 중앙 에서 마술사는 흙을 한 줌 가져와서 물을 타더니, 주술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야, 니꺼 갔다가 해라!”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사는 인간에게 정작 인간의 것이라는 것이 뭡니까? 제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 해도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물질들의 재활용 외에 뭐가 있습니까? 물론 과학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과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착각이 잘못입니다. 진정한 생명은 무로부터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에서 고백했듯이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나의 생명이 나왔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이 가장 이상적인 현실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 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자신의 생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요? 자신의 생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드릴까요?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완성해보려고 전력 질주해 왔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노력해서 받은 학위, 모은 재산, 직장의 이력, 그리고 알량한 삶의 경험에서 얻은 상처들… 뭐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놓고 한 번 보십시오. 이런 것으로 나의 생명이 완성되었다 라고 말할 바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안 계실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주 단적인 예로, 외로움을 극복하신 분이 계십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가족들과 한 집에 살아서 외롭지 않았나요? 아니요, 외로움은 근본에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외로움의 뿌리는 우리의 마지막 순간과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지막 순간에 나와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 함께하지 못합니다. 아니 그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는 살면서 언제나 외로움에 시달립니다. 오늘 서신 서 본문 16절의 바울도 그렇습니다.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에 진한 외로움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반전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이 완성하실 것이라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현실 앞에서 바울의 반전을 한 번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것이 어떤 한 사람의 가장 절실한 이 지상에서의 최후 진술이라면 이제 곧 그가 참수형을 당할 신 세라도 그의 생을 불행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바울이 보는 것은 마치 사자의 입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그 죽음의 장벽 뒤에 있는 영원을 보는 거지요. 그러니 지금 현재의 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가 아니라, 가장 소중한 영원 의 한 점,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지상에서 영원의 한 점을 살고 있습니다. 너무도 소중한 우리의 한 생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구약성서 본문 요엘 2장 23절에서 27절의 말씀에는 유일하게 반복되는 문장이 한 개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겠지요. 그 문장이 뭐냐?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 이다.”라는 문장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 부분인 21절, 22절에 역시 두 번 반복되는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문장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26절, 27 절에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자 여러분,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나오는 중요한 개념인 이 문장만 보고 한 번 얘기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놓고 볼 때, 이 요엘의 신탁은 정확한 겁니까? 저 애굽에서의 노역과 목숨을 건 탈출, 그보다 더 험한 광야생활과 힘겨운 가나안 정착,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 나라라고 하나 세웠는데, 그나마 분열되어서 적대시하다가, 기원전 8 세기에 당시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고 있던 아시리아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신흥 제국 바벨론 에 의해서 남유다도 멸망합니다. 서러운 포로 생활을 했고, 그나마 되돌아 온 황무지 고향 땅은 얼마 있지 않아서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이게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유대민족은 최근 2차 세계 대전, 저 죽음의 수용소 홀로코스트까지 온갖 박해와 수치를 당합니다. 사실 그들의 역사는 두려움과 수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요엘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줄기차게 외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더구나 요엘의 시대적 상황을 기록한 부분은 메뚜기떼의 재앙이 심했다는 사 실이 강조됩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가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메뚜기떼의 공격이 자신들을 수탈한 주변의 강대국을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정치공학적이든, 자연공학적이든 요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겪었던 IMF 나 코비드-19의 창궐보다 더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겁니다.

여러분, 이게 단순히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돈키호테 같은 한 예언자의 객기입니까? 아니지요. 여러분, 제가 27절을 천 천히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엘은 이 엄청난 재난과 공포와 수치와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 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다는 것,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이제 곧 참수형에 처해질 바울의 고백과 닮아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게 어떻게 바울만의 이야기이고, 요엘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인생을 돌아보아도 그렇고, 세상을 봐도 그렇습니다. 요엘 시대에 벌어졌던 메뚜기떼의 공격과 비슷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코비드-19 같은 질병의 창궐이나 천재지변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악행으로 만든 문제도 차고 넘칩니다. 여러분, 세상이 공정하게 돌아갑니까? 아니지요. 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돈 때문에 생기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일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접합니다. 개인적으로는요? 뭐가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 게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에는 하나님이 안 계신 듯이 보이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삶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느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단지 그것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극과 극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럴겁니다. 기도도 극과 극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누가복음 18장 11절과 12절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여러 내용을 나열했습니다. 뭐 훌륭한 사람이지요. 이에 반해 세리는 감사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건지 그 모양새를 13절 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뭐 기도의 내용을 보면 당연히 저 성전 중앙의 바리새인보다 훨씬 못난 사람입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아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도 세상의 논리와 극과 극입니다. 본문 14 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여러분, 이 극명한 차이는 어디에서 온 건가요?

제가 아마 이렇게 질문을 고쳐서 드리면 이 극명한 차이의 원인을 쉽게 파악하시게 될 겁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 분, 이 둘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의식합니까? 누가 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 같습니까? 누가 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바리새인의 기도를 한 번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 같은데, 그 기도의 주어는 단 한 문장도 빠지지 않고 “나”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거지요. 어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만 그런가요? 항상 자기 자신을 의식하면서 자기 앞에서 사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결론적으로 타인을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도 고스란히 나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는 거지요. 그래서, 상대적인 우월감 에서 만족해합니다. 자기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흐뭇하기도 했겠지요. 사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날 기업들은 우리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좀 있어 보인다고 유혹합니다. 누구보다 돋보이고, 잘나 보이기 위해서 경쟁하라고 강요합니다. 어느새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경쟁과 선동과 욕망이 대신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도대체 느낄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는 자기 자신도, 혹 자신의 한탄을 듣고 비웃을 타인도 의식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실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현실로 느끼는 세리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의 자비를 구할 수밖에 없는 초라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 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면서,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 하늘 위,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 이 아니라, 내 앞에 올곧게 마주 서 계신 하나님,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 앞에 서면 내 못난 그림자는 점점 길어만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인식이 뭡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 말고 뭐 있습니까?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것이 유일합니다. 그 하나님은 이렇게 정직하게 하나님을 의식하는 모든 이에게 해방을 주십니다. 그가 설사 매국노에 사람들의 멸시를 받는 세리였어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다.”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무엇이 의식되어 지십니까?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이 되어 버리고 만 초로의 내 자신만 보이십니까? 아니면, 나를 두고 모두 떠나버린 매정한 세상만 보이십니까? 아니면, 지난날 인생살이의 수치와 두려움만 보이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양식을 먹어 치우는 메뚜기 떼만 보이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더 여쭙겠습니다. 한 번 뿐인 나의 인생, 무엇을 보고, 무엇을 의식하면서, 끝낼 작정이십니까? 혹 나를 위 해 예비된 의의 면류관이 보이십니까? 숱한 재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너무도 이상적인 이 현실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저는 설교자로서 안심하고 우리가 함께 서두에 읽었던 사랑장의 일부를 고쳐 읽으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비록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없을지라도, 내게 하나님 한 분이면 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없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을지라도, 또 내가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이 없을지라도 내게 하나님 단 한 분이면 된다. 내게 비록 나누어 줄 소유가 넉넉하지 않아도, 내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만한 용기가 없어도, 내게 하나님 단 한 분이라면 나는 족하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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