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댄 동산 같은 삶 / 윤혜림

주현절 여섯번째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물댄 동산 같은 삶
이사야서 58:1-12,
윤혜림 전도사

여러분은 언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시라는 것을 인지하십니까? 예배드릴 때, 찬양할 때, 식사 전, 혹은 자기 전 기도할 때, 보통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이 확 와 닿죠. 그렇다면 이런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는 일상 생활에서는 어떠신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매일의 삶에서 여러분께 어떤 의미인가요?

오늘의 본문, 이사야서 58장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아주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유다 땅으로부터 추방당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부터 자신의 땅을 되찾고 공동체를 재건해가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땅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경제적/사회적 부정의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잡아먹고 있었죠. 극심한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것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많은 믿는 이들은 종교적 행위에만 치중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금식을 하고, 어떤 이들은 일부러 자루 옷을 입고 기도하며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있었죠. 하지만 이들이 그런 고행을 감내하며 열심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보이지 않자, 이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해 이들께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바로 본문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사야서 58장 2절: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가기를 즐거워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형식적이고 외면적이기만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자기의 뜻을 구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시작합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는데, 주님, 왜 보아주시지 않으십니까? 고행을 하는데 왜 알아주시지 않습니까?” 이들은 불평합니다. 이들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또한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는 금식의 본래 의의는 잊고, 고행의 대가로 복을 바라는 이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위해 주변의 약한자들을 더 힘들게 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꾸짖고 계십니다. 이는 비단 금식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이름 하에 하는 모든 행위들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예배와 모든 신앙의 행위를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예배가 되지는 않는지, 우리가 주님을 예배한다는 명목 하에 하는 행동들이 혹시 우리 주변의 약자들의 희생을 가져오지는 않는지, 환경을 더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는지, 주님을 예배하겠다고 나온 자리에서 타인을 헐뜯고 다툼을 벌이고 있지는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조금 불편해도 재사용이나 재활용이 가능한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을 줄이는 사소한 것부터,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본래 이유를 되새기고, 신앙의 방향성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 다툼이 생겼다면, 예배의 시간을 통해 마음을 새로이하고 화해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신앙적 행위들에 의해 약자들이 더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잘못된 신앙을 집어내고 바로잡아 줍니다. 또한 더 나아가, 무엇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모습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6,7절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멘.

주변의 고통과 아픔, 사회적인 부정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입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라는 해방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배를 채울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물질주의이지만, 누군가 타인의 배를 채울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영성이다. 여러분 눈에 세상의 부정의가 보이시나요? 물질주의, 개인주의에 물든 이 세상속에서 여러분의 눈에, 타인의 아픔이 보이고, 파괴되어 가고 있는 환경이 보이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경제 시스템의 부정의가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그 영성을 가진 이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의 부정의, 억압, 전쟁, 가난, 빈부격차, 환경파괴,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  등을 목격할 때 하나님께 도대체 어디에 계시느냐고 울부짖고 기도하고는 합니다. 하나님,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왜 일하지 않으시나요, 어디에 계시나요!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죠. 하지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보냈는데, 너는 어디에 있느냐. 그 부정의, 세상의 고통 앞에, 그 깨어짐을 목격한 네가, 세상의 아픔을 알아보는 영성을 가진 네가, 무언가 해주기를 내가 이토록 바라고 있는데, 왜 너는 앉아서 나에게 기도만 하느냐.’

저명한 생태여성주의 신학자 샐리 멕페이그는 “풍성한 생명”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부정의 앞에 하나님께서 부재 하시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부정의를 바로 잡아야 할 우리가 그 자리에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깨어진 세상을 고쳐 나갈 일을 아무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걱정이 된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그 일을 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눈에 그 부정의가 보이고, 굶주린 자들이 보이고, 헐벗은 자들이 보인다는 것은, 여러분이 그를 위해 일해주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 나가야 할지 모르겠는 부정의 앞에 우리는 주님께 기도 말고는 할 것이 없다고 종종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동시에, 그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바뀌기를 또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대화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알아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힘이 아닌, 지혜와 용기를 통해 사람들을 마음을 움직이시고, 변화를 이끌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변화는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물질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자신의 배와 주머니를 채울 생각만 하도록 우리를 컨트롤 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성을 마음에 품은 우리들은, 세상의 부정의를 바꾸고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돌보며 시스템을 바꾸어 나가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정말 피곤하고 고된 삶입니다. 매주 주일에 소중한 시간을 내어 예배에 참여하고, 교회에서 섬기고, 주중에도 교육받고 회의를 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거기에 매 순간 이 사회의 부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직접 찾아서 실천해 나간다는 것은 정말 여간 고되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사용하시고 내버려두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을 실천하는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은 늘 함께하시고 힘을 주실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8절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면, 즉, 세상의 약한이들을 위해 네가 힘쓰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서 빠르게 회복 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이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이미 이 원리에 기반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뇌는 이타적인 행위를 했을 때 보상중추가 자극되어 기분이 좋아지도록 한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 이타적인 사람들은 삶을 더 의미 있게 보고, 절망감과 우울감을 덜 느낀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타주의는 신체적 건강과도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British Columbia 대학에서 흥미로운 연구를 했는데요. 고혈압을 앓고 있는 실험 참가자들을 모집한 후에 그들에게 50불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실험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 집단은 받은 돈을 온전히 그들을 위해 쓰고, 다른 집단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쓰라고 요청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실험 참가자들의 혈압을 측정했는데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 돈을 쓴 집단은 혈압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지만, 타인을 위해 돈을 사용한 참가자들의 혈압은 현저하게 낮아졌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거나 식이요법을 사용하여 혈압을 낮춘 수준과 비슷한 아주 눈에 띄는 결과여서 매우 흥미로웠다고 하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참 놀랍게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타인을 위해 힘쓰는 이들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느끼고, 빠르게 건강 회복을 할 것을 하나님은 약속하셨고, 이미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고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정의를 위해 힘쓰는 일을 하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서 그 앞에 가실 것이며, 영광이 그들의 뒤에서 호위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또한, 9절, 그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소외된 자들을 위해 힘쓰는 이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부어 주시고, 언제나 그 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구절인 10절-12절 말씀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 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아멘.

물 댄 동산’ 이라는 말은 제가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물 댄 동산은, 땅에서 저절로 샘물이 솟아오르는 동산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누군가가 물을 끌어 놓아 만든, 물을 동산입니다. 왜 물을 댔을까요? 물이 필요한 곳에 물이 없기 때문에 물을 댔겠죠. 물이 없어서 초목이 자라지 못하고 동물도 없고, 생명을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땅에 물을 대면 그때부터 풀이 자라나면서 생명이 약동하기 시작합니다. 동물들이 찾아오고, 물고기들이 뛰놀고, 꽃이 피고, 새가 날죠. 황폐한 곳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물 댄 동산’ 입니다.

굶주린 이들, 소외된 이들을 보살피고, 이 땅의 부정의에 맞서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물 댄 동산’ 같은 이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황폐한 땅에 물을 대시고, 회복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 생명의 원천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하여 물을 공급해주시고, 지혜와 용기를 주시고, 힘을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곳에 계신 여러분 모두를, 한 분 한 분을, 그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소외된 자가 없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이 땅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알게 되었으나, 그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속에서, ‘이미’와 ‘아직’ 그 사이의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에 맞서는 것, 우리가 가진 것들을 소외된 이들과 나누는 것, 전쟁과 다툼을 끝내고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 오염된 자연을 회복시키고 보살피는 것은, 한번 실천하고 끝낼 단발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신앙의 모습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타인의 고통과 세상의 깨어짐을 직시하는 영성을 가지고 세상의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나 기도와 같은 종교적 행위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 각자의 종교적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 스스로를 채웁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를 얻고, 풍성한 영으로 채워진 우리는, 이 예배를 마치고, 이제 그것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황폐한 땅에 물을 대기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죠. 그런 점에서 물의 원천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 생명수를 공급받기 위해, 기도와 예배는 반드시 전제 되어야 하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공급받은 물을 가두어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은, 주일에 시작해서 주일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오히려, 세상에 나간 월요일에 시작해서 토요일로 이어지고, 주일은 하나님의 집에 와서 회복하고, 물을 마시고, 힘을 충전 받고, 새로운 영감을 얻고, 앞으로 올 또 다른 주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가난과 굶주림, 압제 받는 이들, 기후 변화와 전쟁을 목격하며 이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앞으로의 한 주를 내다봅시다. 이번주,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물 댄 동산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오늘 여러분이 찬양과 예배와 기도를 통해 공급받으신 하나님의 영을 어떻게 세상에 흘려 보내시겠습니까? 이번 주, 여러분 눈에는 어떤 소외된 이들이 보이시나요? 그들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여러분 기도 속에서 여러분께 어떤 지혜와 용기를 주시나요. 황폐한 땅에 찾아온 생명의 물과 같은, 물 댄 동산과 같은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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