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 / 신중현 목사

대림절 네 번째 주일 / 12월 세 번째 주일
사람 사는 세상
마태복음(Matthew)1:18-25
신중현 목사

 

사람사는 세상 (World of the Redeemer)

세 아들을 둔 유대인 아버지가 유산으로 양 17 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세 아들들이 유산을 나누기 위해 모여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정해 주신 유산 분배의 몫은 큰 아들에게 ½, 둘째에게 1/3 막내에게 1/9이었습니다.

자, 계산해 보십시다. 그런데 이게 좀 간단치가 않지요? 17 의 ½은 8.5, 1/3은 5.6666… 그리고 1/9은 1. 8888…    땅이라든지 무생물이라면 괜찮지만 살아있는 양이잖아요. 몇 마리를 죽여야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몫을 “정의롭게” “산술적으로 정확하게” 나눠 가질 수 있을까요?

세 아들은 성급하게 양을 죽이기 시작하는 대신에 이웃에 사는 랍비를 찾아가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랍비가 말합니다. “때 마침 잘 왔네. 마침 누가 어제 나한테 양 한마리를 주고 간게 있는데 가져가서 함께들 나눠 갖도록 하게나”. 감사드리고 돌아와서 다시 계산을 합니다. 얼마나 간단해졌나요? 18의 ½은 9, 1/3은 6, 1/9는 2.

그런데 이게 웬 일? 아무리 계산을 다시 해 봐도 한마리가 남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요? 남은 한 마리- 랍비가 주신  그 한마리를 삼등분으로 잡아 나눌까요? 물론 도로 돌려드리는게 최선이겠지요. 그런데 그 뿐 아니라 또 한가지 희안한 일이 드러났습니다. 삼형제 모두가 원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몫보다 더 많이 받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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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설교 주제는 “예수 믿고 천국 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였는데요. 그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던 예언자들의 희망의 메세지는 늘  이게 나라  (세상) 이냐?”라는 심판의 말로 시작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건 그야말로 “사람사는 세상”이란 뜻 아니겠어요? 그렇게 “산술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탁 탁 탁 간단히 몇 마리 잡아 죽여 근 수대로 나눠 가지는 게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며 정의 아니라는 걸 안다면 모세의 십계명도 그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의 크리스챤들이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건 아니란 것도 알 수 있겠지요. 여기에 정치, 종교, 교육 … 모든게 함께 들어 있어요.

 

오늘 나눈 이야기 가운데 나온 랍비의 양 한마리에게 만약에 이름을 붙여주자 하면 어떤 이름이 어울리겠나요? “구속자 양” 이라할 수 있을까요? 왜냐면 그 한마리 때문에 여러 동료 양들이 죽음을 면했잖아요. 여러분은 죽음을 면한 양의 수를 몇으로 헤아리시렵니까? 사실은 그 어떤 양도 다 죽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던 거였잖아요? 그러니 그 한마리가 그렇게 이 온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 “사람사는 세상”으로 바꿔준다는 예화로- 그리스도의 유비로 사용 할 수 있을 것 같지요? 모두를 살려내고 자신도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 나라의 부요를 모두에게 세상 끝 날까지 선사하시는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우리 유한한 인간 속에서 찾으신다(Redeem) 말할 수 있을까요?
Redeem 이란 영어 단어의 동의어가 여럿 있는데 오늘 특별히 reclaim, exchange란 말에 꽂혔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품 할인권 쿠폰도 사용할 때 redeem, 혹은 cash in 한다고 하지 않나요?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자”라 고 영어로 말할 때Redeemer 라고 하는 의미를 오늘 여기서 찾아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받는 복이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데 있다는 것을 다시 알기 위해서죠. 사실 구속 (대속) 곧 “값을 치루다” 라는 것이 “그 만한 값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어 주다”라는 뜻일텐데요. 최근에 미국과 소련이 인질을 교환했는데 “인질”이란 말을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겠지요. 재미있는 생각이 났습니다. 이 악한 세상이라는 악당이 나를 인질로 잡아 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내 몸값을 받아 내려 한다면 하나님은 얼마까지 용납하실까요 (accept)?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대해 “내 몸 값이 곧 네 몸값”이라고 말씀하시리라고 믿습니다. 그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 (Grace)인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이태원 압사 사고로 죽은 자식을 둔 엄마는 그 자식을 향해 “내 몸값이 네 몸값”이라 하시지 않겠습니까? 또, 결혼하는 부부에게 둘이 한 몸되라고 축복할 때 이 말의 뜻은 서로가 서로에게 “내 몸값이 곧 네 몸값”이라 하는 관계에 들어가라는 말로 새기겠습니다.

(짧은 설교를 위해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오늘 예화를 되새겨 보실 때에 성령이 도와 주셔서 제가 먼저 했던 깨달음의 경험이 모든 분들에게 같이 나눠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성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오늘 마태의 본문은 요셉의 신사적인 처신도 보여 주며 모든 일의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하는데 오늘 예배 함께 드리는 우리 모두의 삶에 서로가 서로에게 구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속자 이웃들” (redeemers)로서 살아가는, 사람사는 세상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이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또 그렇게 높임을 받으시겠지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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