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넘어서

사순절 네번째 주일/3월 다섯번째 주일
사순절,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넘어서
누가복음 15:11 – 24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너무 유명한 말씀이기 때문에 굳이 설교하지 않아도 이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를 사귈 때 나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고 싶어합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친구를 사귀려면 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사람을 사귀라고 말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왜 당신은 가난하고 배운 것도 없고 율법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고 따졌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왜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몫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가 재산을 나누어 주자 작은 아들은 가지고 가서 방탕하게 낭비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 마침 흉년이 들어서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의 집 종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를 돌보게 되었는데 그래도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이 배부르게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내가 아버지 앞에서 죄를 지었으니 나를 아들로 생각하지 마시고 품꾼으로 써 주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둘째 아들은 두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첫째로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신데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고 둘째로는 아버지가 준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 재산은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빨리 죽으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가 준 돈을 방탕하게 쓰며 낭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둘째 아들을 보통 방탕한 아들, 탕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신명기 21장에 의하면 큰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2/3을 가질 수 있었고 나머지 아들들이 1/3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 재산의 2/3가 형 것이니까 내가 집에 있어도 얻을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1/3을 가지고 밖에 나가서 사업을 하든지 장사를 하든지 내 인생을 살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 집안/종/재산을 물려받으니까 집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하던 직업을 첫째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 입장에서는 굳이 형과 함께 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첫째 아들은 대체로 모험을 싫어하고 전통을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합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첫째 아들에게는 없는 모험심, 개척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역사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첫째가 아니라 둘째였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둘째나 셋째나 넷째로 태어나신 분들은 첫째가 아니라는 것에 섭섭해 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대체로 점잖고 모험을 싫어하고 보수적이지만 둘째나 셋째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인류의 발전은 첫째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사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가만히 보면 방탕한 사람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탕자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둘째 아들보다 아버지가 재산을 더 많이 낭비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몫을 달라는 둘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자식이 돌아오기를 집 앞에서 기다렸고, 자식이 오자 달려갔고,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자기 몫을 달라는 둘째의 요구를 들어 준 것도 이상하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를 달려가서 껴안고 잔치를 벌인 것도 이상합니다. 예수님 당시 아버지들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달려가면 체통이 없어 보입니다. 옛날 아버지들은 조선시대 양반들처럼 권위있게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체통이나 권위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재산 탕진하고 거지로 돌아온 자식이 뭐가 좋다하고 달려가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뒷부분을 보면 이 광경을 본 첫째 아들이 아버지를 구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 체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잔치 한번 베풀지 않았으면서 재산을 탕진한 둘째에게는 왜 살진 송아지를 잡았냐고 따졌습니다. 아버지는 첫째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첫아들과 같다면 세리들과 죄인들은 집을 뛰쳐나간 둘째 아들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껴안아주고 잔치를 베풀어 준 것처럼, 예수님은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못마땅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과 세리들과 죄인들을 못마땅해 하지 말고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년 전 쯤에 딸아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가 매일 아침마다 차로 운전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학교 갈 시간이 되었는데 빨리 나오지 않으니까 “지금 가야 한다. 빨리 나와라” 이렇게 말을 하다가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너 지금 몇 시인데 아직도 안 나오니, 지금 안 나오면 지각한다, 빨리 나와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차에 타서는 왜 아침부터 나에게 소리 지르냐고 따집니다. 엄마는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아니까 아이를 혼내도 괜찮습니다. 열 번 사랑한다고 말하고 한번 혼내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 안하다가 갑자기 혼내면 아이들이 싫어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돈 벌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집주인/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주인/아버지를 무서워했습니다. 아버지는 노예를 죽일 수도 있었고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재산을 줄 수도 있었고 안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 당시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아버지, 자식이 달라는 것을 다 주는 아버지, 자식을 위해 재산을 낭비하는 아버지, 둘째가 돌아왔다고 뛰어가는 아버지, 둘째를 껴안고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 위엄이나 체통은 전혀 없고 대신 자녀를 보며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자비로운 하늘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사람보다 지위와 위치에 따라서 권위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권위는 필요하지만 권위주의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실천하면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beyond a patriarchal father
Luke 15:11 – 24

Then Jesus said,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The younger of them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share of the property that will belong to me.’ So he divided his property between them. A few days later the younger son gathered all he had and traveled to a distant country, and there he squandered his property in dissolute living. When he had spent everything, a severe famine took place throughout that country, and he began to be in need. So he went and hired himself out to one of the citizens of that country, who sent him to his fields to feed the pigs. He would gladly have filled himself with the pods that the pigs were eating; and no one gave him anything. But when he came to himself he said,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hands have bread enough and to spare, but here I am dying of hunger! I will get up and go to my father, and I wi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treat me like one of your hired hands.”’ So he set off and went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far off, his father saw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and put his arms around him and kissed him. Then the son said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But the father said to his slaves, ‘Quickly, bring out a robe—the best one—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And get the fatt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celebrate;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began to celebrate. (Luke 15:11 – 24)

Jesus told this parable to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who blamed Jesus for sitting and eating together with so-called sinners and tax collectors. This parable is commonly called “The Prodigal Son.” But it might better be named after “The Prodigal Father,” if “prodigal” really does mean “recklessly extravagant.” The son wastes his inheritance on a good time in a distant land, but his father seems just as free and even wasteful in lavishing his wealth on a son who seems to come home not so much in sincere repentance as in calculated self-interest and desperation. What was important to the father was not that his son repented, but that he returned to his father’s house. When the father saw the son come home, he ran, put his arms around him, kissed him, put a robe on him, and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hrough this parable, Jesus showed us the heart of God who welcomes the so-called tax collectors and sinners. According to the parable Jesus said in the Gospel of Luke chapter 15, God in heaven is not a strict and authoritative patriarchal father, but the one who is awaiting us, hugging us, running toward us, and having a feast for us. Considering that the landlords and fathers of the ancient world had all authority and patriarchy, we can see how amazing the image of God in heaven Jesus showed us. Could we be such a good and compassionate father, as the “Prodigal Father” in this parable? All of us are called to live in the practice of the merciful God in our homes, churches, and societies. Amen.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