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아브라함의 평화조약

사순절 두번째 주일 / 3월 두번째 주일
사순절, 아브라함의 평화조약
창세기 15:12-18, 21:22-27
정해빈목사

 

요즘 우리는 지난 주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四旬節:Lent)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 기간이 돌아오면 세가지 주제를 묵상합니다. 첫째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고 둘째로는 우리 주변의 고통받는 이웃들을 기억하고 셋째로는 나에게 찾아오는 고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들 중에서 고난/고통/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은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들은 고통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거나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불교는 인생이 고통의 바다이고 인생에 고통이 있는 것은 인연에 얽매여 있거나 욕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속세의 인연을 끊고 욕심을 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인연이나 욕심 외에 다른 이유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나 동양의 유교나 도교는 인생의 고통이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니 운명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가르칩니다.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복이 될 수도 있고 또 복이 고통이 될 수도 있으니 고통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옛날 중국 국경지대에 어떤 노인이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말이 멀리 도망갔다가 다른 말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인의 아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덕분에 아들은 군대 소집에 면제가 되었습니다. 이 가르침도 좋은 가르침이기는 하지만 인생의 고난을 너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는 고난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적극적으로 씨름하는 종교입니다. 성경책을 읽어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개인적인 고난, 역사적인 고난, 자연적인 고난, 우주적인 고난, 이렇게 4가지의 고난이 모두 다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인들은 이 4가지의 고난과 씨름하면서 인생을 살았고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고난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찾아오고, 이 세상이 아직 완성되지 않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찾아오고, 이 세상의 악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우리들은 새하늘과 새땅,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고난과 씨름하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개인적인 고난이 찾아올 때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고난을 극복하고 세상의 악이 우리에게 고난을 줄 때는 그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맞서 싸웁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고난, 역사적인 고난, 자연적인 고난, 우주적인 고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고난받을 때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고난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를 줍니다. 이런 귀한 기독교/성경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잘 대처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한국에서는 야당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지난 5년간 한국은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을 잘 했고 세계에서 열번째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한국노래, 한국영화, 한국드라마, 한국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 중에는 새로운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트럼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통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한국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퇴보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요즘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국민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전세계가 힘을 합쳐서 코로나를 물리치고 기후위기에 대응을 해도 부족할 판에 전쟁을 하고 있으니 전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는 이번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죽음을 각오하고 앞장서서 러시아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니까 나토가입을 안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토가입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가 핀란드입니다. 핀란드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양쪽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핀란드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면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외교를 잘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과 양쪽 젊은 군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보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수메르 문명 지역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를 따라서 하란으로 이동하였고 아버지가 죽자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서 남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왜 본토와 고향과 친척을 떠났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만 기록을 했습니다. 당시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 문명이 있었고 물이 많아서 살기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은 외딴 곳이었고 사막이 근처에 있는 삭막한 땅이었습니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을 떠나서 살기 힘든 곳으로 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아브라함 가족이 수메르 문명에서 왕족이었는데 전쟁에서 패해서 어쩔 수 없이 가나안 땅으로 피난을 갔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면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식도 없고 땅도 없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동안에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믿은 신들이 많았습니다. 전쟁의 신도 농사의 신도 있었고 쾌락의 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나그네를 축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으로 만드셨습니다.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되어라. 다른 사람을 축복해 주는 사람이 되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쩔 수없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에 인생의 큰 고난을 만났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소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 15장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을 설명하고 있고 창세기 21장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맺은 언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되기로 하나님과 서약을 맺었습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가나안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식구가 많았고 아비멜렉에게도 식구가 많았습니다. 자칫하면 두 집안이 가나안에서 땅과 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평화조약을 맺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양과 소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두 집안이 서로 도움을 받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도 중요하지만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평화조약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더 중요한 깨우침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남의 땅을 빼앗지도 않았고 이 땅이 내 땅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존경하고 인정하면서 함께 공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분열과 갈등과 전쟁이 일어나는 이 시대에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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