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

사순절 두번째 주일 / 2월 네번째 주일
창세기 17:1-7, 마가복음 8:31-38
사순절,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
정해빈 목사

 

지난 2월 달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22세의 흑인 대학생이 5분 동안 낭독한 축시가 큰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는 이 대학생은 취임식 몇 주 전에 트럼프 지지자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의회 의사당 안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고서 이 시를 작성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때로는 지체되지만 영구히 패배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나라를 공유하기 보다는 망가뜨리려는 세력들을 보았다. 그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거의 무너질뻔 하였다. 우리가 고통스럽게 목격했던 이 나라는 부서지지 않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여명은 우리가 그것을 펼쳐놓을 때 피어날 것이다. 빛은 언제나 있지만 우리가 용감할 때 볼 수 있고 용감해야 우리는 빛이 된다.” 그의 연설은 미국 사회가 250년 동안 지켜왔던 민주주의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자유, 인권, 노예해방의 전통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전통이면서 서로에 대한 약속/계약이기도 합니다. 처음 나라를 세웠을 때의 전통/약속/계약을 지키고 더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는 시를 통해서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계약을 맺기도 하고 비즈니스 거래를 하기도 하고 동업을 하기도 하고 결혼서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약속을 쉽게 깨트리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여행사 가이드를 하는 한인 유학생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체여행을 오는 한국 여행객들 중에서 여행일정을 따르지 않고 즉흥적으로 일정을 바꾸어 달라며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행일정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현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일정을 바꾸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반대로 여행사가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서 가이드에게 일정에 없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약속은 상대방과의 계약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언약(covenant)을 맺으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말로 약속한다는 의미에서는 언약(言約)이라고 부르고 서로의 의무를 약속한다는 의미에서는 계약(契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혼자 일하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과 함께 일하시고 피조물을 인격적으로 대하시고 피조물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르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식물/동물과 언약을 맺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에게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세상을 지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서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관리하고 섬기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첫사람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불순종했고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리지 못했고 에덴동산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첫사람의 후손들은 땅에 퍼졌고 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두번째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두번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번째 언약도 무효가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언약은 무효가 되었고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약은 한쪽이 지키지 않으면 무효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신실하지 못했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인해 언약은 계속 파기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계속해서 파기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동역자를 찾으셨고 하나님께서 찾으신 세번째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첫번째 언약은 첫사람이 깨트렸고 두번째 언약은 노아의 후손들이 깨트렸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언약을 깨트리지 않았고 언약 앞에서 신실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실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고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대단한 업적이나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과 17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해야 할 사명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여러 민족의 아버지/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언약을 통해서 신실함의 대표가 되었고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고 인류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고 모든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지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세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나쁜 사람들을 없앤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사라와 같은 사람들의 순종과 신실함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나쁜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세상의 악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이 없어져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실함을 통해서 세상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들의 작은 실천을 통해서 세상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8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항의하였고 예수님은 그를 꾸짖으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반대하였고 다른 길을 제안하였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언약을 지키는 신실함이 아니라 세상의 이익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제안을 거절하셨고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신실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정의와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진실로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런 신실한 십자가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세상의 악을 폭로하셨고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생활의 언약/계약이 쉽게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언약을 잘 지키고 세상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다스렸더라면 자연이 파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서로 불신하고 의심하는 이 시대에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어 세상을 축복하고, 그리스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신실함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 가정에서 맺은 언약, 이웃과 자연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킴으로서 세상에게 복을 베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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