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이웃의 고난과 우리의 회개

사순절 세번째 주일/3월 네번째 주일
사순절, 이웃의 고난과 우리의 회개
누가복음 13:1 – 9
정해빈 목사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고난에 대해서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고 동시에 이 땅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문제 중의 하나가 고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고난과 시련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고난을 경험합니다. 개인적인 고난도 있고 사회적인 고난도 있고 자연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난도 있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지만 다른 사람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고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괴로워하고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왔는지 고민하고 이 고난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는지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을 크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생로병사, 육체의 연약함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흙에서 왔기 때문에 우리 몸은 쉽게 부서지고 깨집니다. 옛날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입안에 있는 뼈를 깎는 수술을 하셨는데, 그 분이 저에게 “목사님, 뼈를 깎는 고통이 얼마나 아픈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왜 종종 ‘뼈를 깎는 고통’이라는 말을 쓰는 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뼈를 깎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분들은 육체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할 것입니다. 두번째로 경제적인 가난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주가 필요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가난은 사람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예를 들어서 비싼 월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청년들은 1.5평 고시원/쪽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서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난을 겪는 분들은 가난이 주는 고통이 제일 크고 비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부모자식, 형제, 부부, 직장동료, 이웃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고 다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정/사회/직장에서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다투고 고소하면 당사자는 심적으로 큰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에는 육체적인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갈등하고 다투고 고소하고 원수지는 일보다 괴로운 고난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네번째로 나쁜 사람들 때문에 받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악을 행하는 사람 때문에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가 이민자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강도가 나를 공격하고, 난폭 운전자가 갑자기 내 차를 덮치면 나는 그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이 이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억울한 고난이 바로 이 고난일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천재지변/사고가 주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도 네번째 고난과 마찬가지로 억울한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재해와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은 나의 잘못과 아무 상관이 없지만 내가 그때 거기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크게 5가지의 고난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이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이 많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겪는 분은 육체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경제적인 고난을 겪는 분은 경제적인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인간관계의 고난을 겪는 분은 인간관계의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쁜 사람 때문에 고난받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주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이고, 자연재해/사고로 인해 고난받는 사람은 자연재해/사고가 주는 고통이 제일 크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고난만 받아도 힘든데 만일 이런 고통을 동시에 만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이 경험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몸과 마음이 괴로워합니다. 왜 하필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3장 말씀이 바로 그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큰 고난이 2가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는 일이 있었고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 피를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잔인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일으킨 고난은 네번째 고난, 악한 사람 때문에 선한 사람이 받는 고난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고, 실로암 탑이 무너진 것은 다섯번째 고난, 천재지변이나 사고 때문에 일어나는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들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고난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같은 책을 보면 하나님께 순종하면 축복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구약성경에 많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고난받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 똑같이 불완전합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에 고난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도 저 사람과 똑같은 고난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고난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빌라도라는 나쁜 통치자가 그들을 학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슬퍼하고 같이 아파하기 보다는 그들의 죄를 따지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청중들을 향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도 저 사람들처럼 벌 받기 전에 회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고난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벌을 받았고 나는 죄가 없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았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무관심했던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무시하지 않았는지, 내가 가해자 쪽에 서지 않았는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유대교 랍비인 헤롤드 쿠슈너는 “not why me? but why not me?”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이 왔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오지 않았냐고 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6절을 보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니까 찍어 버리겠다고 주인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는 자비로운 포도원지기 덕분에 1년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망하지 않고 인생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20년을 더 살 수도 있고 30년을 더 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는 고난받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받은 이들을 보며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한 이웃을 보면서 회개하고 그들의 몫까지 대신 살라는 뜻에서 우리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오래 살아야 합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고난당한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의 억울한 고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고난과 재난을 당해 고통당하는 이웃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nt, suffering of neighbours and our repentance
Luke 13:1 – 9

At that very time there were some present who told him about the Galileans whose blood Pilate had mingled with their sacrifices. He asked them, “Do you think that because these Galileans suffered in this way they were worse sinners than all other Galileans? No, I tell you; but unless you repent, you will all perish as they did. Or those eighteen who were killed when the tower of Siloam fell on them—do you think that they were worse offenders than all the others living in Jerusalem? No, I tell you; but unless you repent, you will all perish just as they did.” Then he told this parable: “A man had a fig tree planted in his vineyard; and he came looking for fruit on it and found none. So he said to the gardener, ‘See here! For three years I have come looking for fruit on this fig tree, and still I find none. Cut it down! Why should it be wasting the soil?’ He replied, ‘Sir, let it alone for one more year, until I dig around it and put manure on it. If it bears fruit next year, well and good; but if not, you can cut it down.’” (Luke 13:1 – 9)

Today’s Bible scripture tells us stories about those who were slaughtered and those who died in an accident by an unrighteous ruler. Jesus pointed out that they suffered not because of their sins but because of the evils of the world and our indifference. Once Rabbi Harold Kushner said, “when there is suffering, we should not ask ‘why me?’ but ‘why not me.’ Today’s story reminds us not to rejoice in things we have not suffered, but to stand with those who are afflicted. God called us to repent our indifference and to work hard so that no more unfortunate suffering and calamity would occur on this earth.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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