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경외 – 슈바이처 이야기

Albert Schweitzer(1875~1965년)

음악인, 철학자, 신학자, 의사였던 자비 실천가

“나는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뭇 생명들 가운데 또 하나의 생명”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반평생을 희생하며 인술을 펼친 인도주의적 의사로 기억되지만 그는 의사이며 동시에 신학자요, 철학자요, 음악인이었다. 필자도 대학원 입학시험 과목 중 하나인 독일어 시험 준비를 위해 그의 자서전 『나의 삶과 사상에서Aus meinem Leben und Denken』를 독일어로 읽으면서 그의 희생정신에 깊이 감명을 받아 진로를 바꿀까 하는 생각마저 해 본 적이 있다.

슈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알자스Alsace 지방 카이저스베르크Kaysersberg에서 루터교회 목사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슈바이처는 어린 시절 건강상의 이유로 출생지에서 가까이 있던 귄스바흐로 옮겨가 그곳에서 자랐다. 알자스 지방은, 우리에게 익숙한 알퐁스 도데의 단편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 지배하에 있다가 보불전쟁의 결과로 1871년부터 독일 영토가 되었다가 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된 곳이다. 어린 슈바이처도 그 지방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국어는 독일어였지만 어릴 때부터 프랑스어에도 익숙한 이중 언어 구사자였다.

슈바이처의 할아버지도 고등학교 교사이면서 오르간 반주자로 일하고 있었고, 그의 외할아버지도 오르간 연주와 제작에 열성적이었다. 이런 음악적인 환경 속에서 슈바이처는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가 물려준 피아노로 피아노를 배우고, 여덟 살 때는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아홉 살에는 벌써 교회 예배 시간에 오르간 반주를 할 정도였다. 나중에 바흐의 음악에 매료되어 있던 그의 음악 선생 위도르의 영향으로 슈바이처는 결국 바흐 음악의 연주와 이론에서 유럽 일인자가 되었다.

18세에 스트라스부르크의 카이저 빌헬름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음악 공부도 계속했다. 1894년 일 년 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899년 철학 박사 학위를, 이어서 1900년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01년 그가 갓 졸업한 성 토머스 신학대학의 임시 학장이 되었다가 1903년 정식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학위 후 슈바이처는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예수의 생애’에 대한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1906년 드디어 『예수전 연구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이 책은 1910년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라는 이름으로 영역되어 나왔다. 독일어판의 원제목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가 보여주듯이 여기서 슈바이처는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찾기에 몰두한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하나하나 검토하고, 그들이 제시한 역사적 예수란 결국 그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인 희망사항을 투영해서 그린 윤리 교사로서의 예수상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예수는 그 당시 세상의 종말이 곧 임하리라고 믿었던 후기 유대교 종말론에 철저했던 종말론적 종교 지도자였다. 이런 임박한 종말론적 대망 때문에 예수는 현재 성서 4복음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철저한 종말론through-going eschatology’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한다든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는 등의 산상수훈은 예수가 이런 임박한 종말을 가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특수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종말 직전에 임시로 채택한 일종의 ‘중간 윤리interim ethic’였던 셈이라 보았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결국 오지도 않을 세계의 종말을 철저하게 믿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수한’ 종교 지도자였지만, 그 당시 여러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 예수가 ‘균형을 잃은 정신 이상자’는 결코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도 예수를 따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유는 예수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믿는 바를 목숨을 걸고 실천한 위대한 신비적 사랑의 실천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슈바이처는 예수 연구 이후 바울 연구에도 몰두하고 바울에게서 이상형의 종교인을 발견했다. 그는 바울도 예수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후기 유대교 종말론을 신봉하는 종교 사상가이기는 하지만, 바울은 예수와 달리 하느님 나라가 우주적인 종말 사건을 통해 임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내면적으로 이루어질 무엇,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전 세계에 실현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가르쳤다고 했다. 슈바이처는 우리가 이제 할 일은 바울의 이와 같은 사상이 터놓은 길을 열심히 따르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이런 배경을 가진 슈바이처가 어찌하여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는가? 1896년 봄 부활절 아침 젊은 슈바이처는 창문을 통해 침대 머리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과 동시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무한한 평온과 행복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가 누리는 젊음과 건강, 지적 능력 등 여러 가지 특권을 자기 혼자만 당연한 것으로 누려도 되는가 자문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뭔가 빚을 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세상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앞으로 10년간은 자기가 원하는 학문과 예술에 바치지만, 30세가 되면 말이 아닌 ‘직접 손으로’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하는 일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슈바이처는 1904년 29세 때 우연히 프랑스 ‘파리 복음선교회’에서 발행하는 작은 책자에서 아프리카 콩고에 의료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의사가 되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1905년 30세가 되는 생일날 그의 친척, 친구, 동료들에게 자기의 결심을 공표했다. 그들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해 10월 의과대학 강의를 듣기 시작하고, 1911년 10월 의사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이듬해 6월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였던 역사학자 해리 브레슬라우의 딸이며 교사와 사회사업가가 되려다가 슈바이처와 함께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간호학을 공부한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했다.

1913년 2월 인턴 과정을 끝내면서 「예수에 대한 정신과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13년 3월 26일 부인과 함께 그 당시 콩고, 현재의 가봉 오고웨강 연안의 랑바레네로 출발했다. 임지에 도착하여 우선 닭장으로 쓰이던 건물을 임시 병동으로 사용하며 첫해에만 각종 환자 2천명을 치료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가게 된 더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 슈바이처가 그의 비정통적인 신학 사상을 가지고는 정직하게 목회하기가 곤란함을 깨닫고, 신학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류에 봉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펴기로 작정한 것은 단순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슈바이처가 어릴 때부터 남의 아픔을 보고 참지 못하는 불인不忍의 마음,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는 자비慈悲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발견되는 비참한 일들을 보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몇 가지 알려진 예를 들면, 어릴 때 친구와 함께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가서 언덕바지에 숨어 기다리는데 새들이 나뭇가지에 와서 앉았다. 막 새총을 겨누고 쏘려 하는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 교회에서 수난절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귀에는 그것이 마치 하늘의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새총을 던져버리고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러 새들을 쫓아버렸다.

또 어려서 매일 밤 잠 자기 전에 어머니가 침대 머리맡에 와서 기도를 해주었는데, 기도할 때마다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기도해줄 사람이 없는 다른 생명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기도하고 나가면 그는 혼자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고 지켜달라고 하는 기도를 덧붙였다.

1915년 9월, 그가 아프리카로 가서 의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2년 반이 지났을 때였다. 그가 있던 곳에서 200km 떨어진 곳 어느 선교사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향해 짐배를 타고 오고웨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세계 긍정’, ‘생명 긍정’이라는 자기의 독특한 윤리 사상과 문명의 이상을 함께 엮을 수 있는 구체적 표어를 찾으려 골똘하며,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계속 무엇이든지 긁적이고 있었다. 화두를 붙잡고 정진하는 선禪의 경지 같았다고 할까. 드디어 3일째 되던 날 해 질 무렵 배가 하마 떼 사이로 지나가는데, 갑자기 “전에 생각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았던 문구가 번개처럼 머리에 번쩍했다”, ‘생명 경외Ehrfurcht vor dem Leben․verenatio vitae․ Reverence for Life!’ 그는 그 순간 “철문이 열리고 숲 속으로 오솔길이 뻥 뚫리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견성見性’이나 ‘돈오頓悟’ 같은 깨침의 경험이 아니었겠는가.

슈바이처는 모든 생명은 신성하므로 모든 생명을 경외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나는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뭇 생명들 가운데 또 하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서양 사회가 붕괴되어가는 가장 큰 원인이 윤리를 인간들 사이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윤리적 기초가 되는 생명 경외, 생명 긍정 사상을 방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도 결국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 중심의 윤리 체계를 구성하고 있을 뿐, 다른 생명들을 도외시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슈바이처는 스스로 그의 생명 경외 사상을 철저하게 실천했다. 적도 아프리카의 더운 밤, 방에서 등불을 켜고 작업할 때도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었다. 날파리들이 등불에 날아와 타 죽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나뭇잎을 따거나 꽃을 꺾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가 수술할 때 병균을 죽여야만 하는 것도 안타깝게 여겼다.

물론 그도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희생시켜야 할 경우 일종의 생명의 위계를 생각하고 더 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덜 귀한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소를 먹이기 위해 풀을 잔뜩 베어 마차에 싣고 가는 농부가 소먹이로 풀을 베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집으로 돌아가다가 무심코 길가의 풀 한 포기를 뽑는 행동은 희생하지 않아도 될 것을 희생시키는 비윤리적 태도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슈바이처의 이런 철저한 생명 경외의 원칙이 사실 인도 사상, 특히 자이나교의 불살생不殺生(아힘사)의 가르침에 영향 받은 바가 크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는 인도 사상을 깊이 연구하고 『인도 사상과 그 전개』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인도 사상 뿐 아니라 중국 사상에 대한 몇 가지 원고도 남길 정도로 중국 사상 전반에 걸친 연구에도 몰두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시민권 소유자였던 슈바이처 부부는 독일 시민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군부에 의해 구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슈바이처와 부인은 1917년 9월 구금 상태로 프랑스로 보내졌다가 1918년 7월 알자스 고향으로 돌아가 비로소 구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알자스가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어 슈바이처도 프랑스 시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의사로 치료도 하고 교회에서 설교도 하면서 지내는 중 1919년 1월 14일 그의 44회 생일 선물로 그의 외동딸 레나Rhena가 태어났다.

부인 헬레네의 권유에 따라 1924년 4월, 7년간의 유럽 생활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형편없이 퇴락한 병원을 새로 보수하고, 새로 합류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도움으로 병원 일이 다시 본궤도에 오르도록 했다. 병원이 자체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1927년 슈바이처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 강연도 하고 괴테상도 받았다. 몇 차례 아프리카와 유럽을 오가면서 의료봉사와 1934년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 에딘버러 대학의 기포드 강연 등 문화 활동을 계속했다.

외동딸의 건강 때문에 부인과 딸은 고향 부근 슈바르츠발트의 퀴니그스펠트로 옮겼다. 슈바이처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1937년부터 1948년까지 아프리카에 머물렀다. 1949년 미국을 여행한 적도 있었다. 1952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고, 1954년 11월 수상식에서 ‘현 세계에서의 평화 문제’라는 제목으로 행한 그의 연설은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이후 죽을 때까지 스위스 취리히, 영국 캠브리지 등 수없이 많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 영국 여왕으로부터의 작위 수여, 프랑스 학술원 회원으로의 추대, 서독 정부로부터의 훈장 등의 영예를 받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런드 러셀 등과 함께 핵실험, 핵전쟁 반대를 위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5년 9월 4일 슈바이처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아프리카 랑바레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고웨강 언덕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그가 직접 깎아서 만든 십자가가 그를 지키고 있다.

슈바이처의 사상은 그가 사랑하던 5촌 조카(큰아버지의 딸인 4촌 여동생Anne-Marie Schweitzer의 아들)이며 프랑스 실존철학의 대가였던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년)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슈바이처의 외동딸 레나는 아프리카의 슈바이처 병원에 자원봉사자로 온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여 미국 애틀랜타에 근거지를 두고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아이티, 인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베트남, 예멘 등 세계 여러 곳에 다니며 의료봉사에 헌신하다가 캘리포니아에서 2009년 90세로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유훈과 모범이 딸에게 그대로 전해진 셈이다. 한국에서도 슈바이처 박사를 존경하여 울릉도 같은 무의촌이나 아프리카 등지로 가서 의료봉사에 몸 바친 ‘한국판 슈바이처’들이 많았다.

슈바이처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인류의 역사가 이만큼이라도 이어지는 것이 이런 훌륭한 스승이 밝혀준 횃불, 스스로 보여준 모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물소리 오강남의 생명 경외 – 슈바이쳐 이야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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