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3) / 신태성 목사

주현절 네번째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선한 싸움 (3)
고린도전서(1Corinthians)10:1-17
신태성 목사

오늘은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 위한 세번째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려고 합니다. 선한 싸움은 말 그대로 좋은 싸움을 뜻합니다. 선한 사건, 선한 변화, 선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세상에서도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죠? 한국 사람들이 이것을 얼마나 잘 아는지… 우리가 격려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화이팅!” (저번 시간에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것에는 은총을 주시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심지 않은 것에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한 싸움을 하지도 않으면서 선한 사건이 일어나고, 선한 변화가 일어나고, 선한 열매가 맺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선한 싸움을 할 수 있을까요? 선한 싸움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그 세번째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배움에 게을러지지 않기” 아마도 여러분들이 학생이라면 이미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배움”이라는 말에 부담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저처럼 공부를 오랫동안 한 분들이라면 “배울 만큼 배웠는데 뭘 또 배우느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세가 있는 분들이라면 머리회전도 예전같지 않고 귀도 잘 안들리고 눈도 침침한데… 이 나이에 무슨 새로운 것을 배우냐고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한 싸움을 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네, 배움에 게을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배움과 관련해서 우리는 세가지 질문들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배운다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두번째 질문은 우리는 왜 배움에 게을러지지 말아야 하는지? 세번째 질문은 어떻게 배울 것인가? 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배운다고 할 때, 그것은 학습이나 연구를 통해 지식과 기술들을 습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여기에 계신 분들은 모두 배운 분들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배우기를 멈춰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적, 영적인 의미에서 배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배움과는 매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배움이란 “세가지 원천들을 통해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발견하고, 이해하고, 따르는 것”을 시사합니다.

어떤 분들에게 성경 공부나 신앙 훈련을 하자고 하면, 왜 굳이 배울것도 많은데 그런데 시간과 돈을 쓰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배우는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이자 숙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자체가 타고난 성질의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변형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성장해가라”는 말씀이 무려 30여 차례나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gap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단순히 지식적인, 기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데 있어, 창조주가 기대하시는 수준에 있어 여전히 한참 미흡하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error 투성이들입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나름의 결점과 편견들 그리고 불필요한 올무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떨때 보면, 인간처럼 고귀하고, 멋진 존재가 없는것 같다가도, 인간처럼 한없이 가볍고, 어리석은 존재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장 11절-17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세가지 원천들을 통해 배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실패로 부터, 두번째는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터, 세번째는 그리스도로 부터.

우리가 배운다고 할 때, 누구로부터 배우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으로 부터도 중요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실패는 선한 싸움을 하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나는 살면서 실패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하시는 분 있으신가요?”     맞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실패를 합니다. 사업에 있어, 관계에 있어, 학업에 있어, 자녀 양육에 있어, 심지어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라는 쓴맛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하며 살아갈 순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마찮가지지요. 성경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실패를 통한 성공의 이야기들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본문에 나온,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포함해서 아담과 이브 (창3), 가인과 아벨 (창4), 노아와 그의 아들들 (창9), 아브라함과 사라 (창16), 롯과 그의 딸들 (창19), 야곱과 에서 (창 27), 요셉과 그의 형제들 (창37), 나답과 아비후(레10), 아론과 미리암(민12), 모세, 삼손과 데릴라, 다윗,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와 베드로까지, 모두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또 실패하셨습니까? 그것때문에 가슴이 아프십니까? 무엇인가를 도전하고 해보려고 했는데, 잘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셨습니까?, 사업에 있어, 관계에 있어, 가족에 있어, 영적인 삶에 있어, 사역에 있어, 심지어 인성에 있어 실패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괜찮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건 비신앙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그리스도인이 아니건 상관없이 우리 모두 다 실패를 합니다. 따라서 실패를 했느냐 안했느냐, 얼마만큼 실패를 했느냐는 (사람들에게 중요할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요? 누구나 실패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뭡니까? 실패를 통해서 배우느냐 그렇지 않으냐하는 것이겠죠.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누구였죠? 네 사울 아닙니까? 사울과 그 다음에 왕이 된 다윗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두 사람들 모두 실수 투성이들 아닙니까? 두 사람들 모두 실패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네 실패를 통해 배운 것 아닙니까? 사울은 실패할 때마다 분노하거나 핑계를 찾았지만, 다윗은 실패할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배움을 얻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시죠? “실패는 위대한 성공의 어머니”  그럼 실패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좋다는 말일까요? 아니요. 실패는 적을수록 좋지요. 이 말의 진위는… 실패를 통해 배우는 사람은 성공과 더욱 가까워질수 있다는 뜻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실패들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실패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것이 나의 실패이던, 타인의 실패이던, 믿음의 선조들의 실패이던 그것을 통해서 배울수만 있다면 된다는 말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시험(혹은 유혹)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터 배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어떤 시험을 두려워하는지를 알면 내가 어떻게 성장해야 할지도 알게 됩니다. 대부분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는 시험이 찾아와도 시험이 찾아왔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조금 성숙한 사람들, 깨어있는 사람들의 경우에 시험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감지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배움의 원천이 될 수 있다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모임이나 해야할 일이 있으면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요? 네 저같은 경우는 꼭 구글칼랜더나 셀폰 스케줄에 입력을 해놓고, 알람이나 notice가 울리도록 설정을 해놓습니다. 첫번째 배움의 원천이 무엇이었죠? 네 실패.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을 “나”라는 드럼통에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라면, 두번째 배움의 원천. 무엇이죠? 네, “시험 혹은 유혹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배우는 것은 내가 설정해 둔, 스케줄 알람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양한 시험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를 들면, 성에 대한 시험, 물질에 대한 시험, 성공에 대한 시험, 음주에 대한 시험, 유명해지고자 하는 시험, 우상에 대한 시험.

구체적으로 우리가 시험을 받는다고 할 때, 오늘 말씀의 도구가 된, 사도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레슨이 무엇이죠? 그들은 주로 구약의 말씀을 의존하지만, 특별히 10계명은 그 모든 것들의 근간 혹은 뿌리와도 같습니다.

이는 마치 캐나다 하면 떠오르는게 뭐죠? 네 단풍과도 같은 것입니다. 단풍이 캐나다의 전부는 아니지만, 단풍 없이 캐나다를 떠올릴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10계명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시험에 든다고 할 때 (유혹에 빠진다고 할 때), 그 내용들이 대부분 10계명의 내용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시간상) 제가 십계명을 다 읽어보지는 않고, 거기에 따른 유혹 혹은 시험에 대해 이야기 해 볼께요.

  • 잡신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 2) 우상을 섬기고자 하는 유혹 3)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유혹 4) 주님의 날을 갖지 않으려는 유혹 5) 부모를 무시하려는 유혹 6) 타인을 말이나 행위로 죽이고 싶은 유혹 7) 성적인 유혹 8) 물질과 남의 수고를 빼앗으려는 유혹 9) 거짓으로 누명을 씌우고 싶은 유혹 10) 시기해서 관계를 해치고 싶은 유혹

실패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러한 유혹과 시험에 예외인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 마치 나의 얘기, 우리의 얘기 같은거예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언급하는 바, 이 모든 시험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맞습니다. 허나 사람마다 어떤 시험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반면, 어떤 시험은 참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시험이 찾아올까봐, 혹은 찾아올때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곤 합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다시 시험에 빠져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워서는 아는데, 다시 시험에 빠져 행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까, 성령을 슬프게 하진 않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험에 대한 두려움 또한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인데요, 첫번째는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가 무엇을 진실로 사랑하는지를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시험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사이를 더 가까이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시험에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고,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정말 그렇던가요? 잠시나마 그럴순 있어도, 정말 그렇던가요? 특히 우리가 같은 시험에 반복해서 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단순히 본능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억력이 안좋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요. 우리 안에 있는 악한 본성들과 무지 때문이 아닙니까?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시험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이미 배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명이 C.S Lewis입니다. 조금 어렵긴해도 시간이 되시면 그분의 글들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시험에 저항하려고 하는 사람들만이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안다. . . . 우리는 결코 우리가 그것과 싸우기 위해 노력할때까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충동들의 파워를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결코 우리가 그것과 싸우기 위해 노력할때까지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결코 시험에 굴복하지 않는 분일 뿐만 아니라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맞는 말입니다. 시험에 순응하면 시험에 그냥 소유(possessed)되지만, 시험에 저항하려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중력으로 우리를 이끌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면  (시험이 다시 찾아올지언정) 그때 비로소 왜 내가 그 시험을 자꾸 받게 되는지, 그리고 받고 있는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께서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우리에게 배움을 주고, 그 배움은 선한 변화, 선한 사건, 선한 열매를 맺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8세기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요 사회적 복음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요한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 집회에서 성령을 만나고 회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그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많은 시험에 시달려야만 했지만, 내가 울부짖을 때마다, 이러한 시험들은 사라졌다. 시험들은 반복해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나의 눈을 그에게 돌릴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처소로 부터 오는 도움”을 보내셨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과거의 나의 상태와 현재의 상태를 고려해 볼 때,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과거 율법 아래서 나의 노력을 통해 싸운 것처럼 은혜 아래서 싸우기를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성령의 체험 이후) 나는 때때로 시험 당할지 언정, 그렇게 자주 지배당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정복자였다.”

웨슬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알파 연합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영적 정복자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시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을 두려워하고 그때 그리스도에게 배우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 시험의 극복자들이 아닌, 승리자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 배움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배운다고 할 때, 제일 좋은 방법 중에 하나가, 좋은 스승, 좋은 롤모델, 좋은 자료를 찾는 것입니다. 제가 박사 과정 하면서 얻은 소득이 있다면, 배움의 적절한 원천을 찾는 법을 배웠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배움은 혼자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스승, 좋은 롤모델, 좋은 자료가 밑받침되어야만 합니다. 거짓 스승, 어리석은 예, 하찮은 자료들을 가지고 배우려고 하면, 시간만 낭비하고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즉 선한 싸움에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는 배우기 위한 가장 좋은 원천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아니 온  우주에서 최고의 스승, 최고의 롤모델, 최고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누구일까요? 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을 무엇에 비유했나요? 네, “나”라는 드럼통에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 시험 혹은 유혹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배우는 것은요. 네, 내가 설정해 둔, 스케줄 알람과도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는 것은 어떤 것과 같을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나 자신의 배터리를 충전시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실 배움에 있어 그리스도로 부터 배우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실패로 부터 배운다고 할 때, 그럼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해야 하는 겁니까? 시험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터 배운다고 할 때, 이는 자칫하면 불안과 트라우마, 자책과 근심에 인생이 지배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이 있다면, 네 좋은 source, 가장 좋은 원천인 그리스도로 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아도, 어둠의 그림자를 통과하지 않아도,…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면 그것은 뭐예요? 네 그리스도로 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부터 배울 것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4장 8-9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그리스도만을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전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기서 질문!!!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가장 참된 이, 가장 경건한 이, 가장 정결하고, 사랑받을만하고, 칭찬 받을만하고, 경외할만하고, 탁월한 이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래서 따르고 있고 본받고 있는자가 누구입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

흥미로운 사실은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더이상 실패를 통해서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어둠의 그림자를 통과하지 않아도 우리는 성장과 성숙의 원천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요? 네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그를 따름으로써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참된 행복과 평강의 길로 인도해 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 영성의 아버지라 불리는 18세기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적절한 창조물이 가질수 있는 가장 높은 선이다. 그를 즐거워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보다 가장 만족스러운 거처가 되신다.  심지어 그는 우리의 부모들, 남편들, 배우자들, 자녀들, 그리고 지구 상에 있는 어떤 친구들보다 더 나은 분이다. 그들은 그저 행복의 그림자들이지만, 하나님은 행복의 본질이 되신다. 그들은 사방에 흩어진 행복의 빚줄기이지만, 하나님은 그 빛을 방출하는 태양이다. 그들은 흐르는 시냇물이지만 하나님은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이다. 그들은 빗방울이지만, 하나님은 바다이다. 그것도 영원한 형태로 말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제가 왜 교회를 옮기게 되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게도, 이전 교회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기회들을 하나님께서 저와 저의 가족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저에게 은퇴까지 있어주면 안되겠냐고 공식적으로 요청도 했었습니다. 믿지 못하시겠거든 여기에 있는 제 아내가 증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받아들일수 없는 것을 저에게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주기도문을 폐기할 것과, 또 한가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n the name of Jesus Christ를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은 사회적 의식과 흐름에 맞지않고, “예수의 이름으로”는 종교적 화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저도 잘 압니다. 목회자가 완벽하지 않은 이상,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 교회 지도자들의 요청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요. 그러나 두가지 모두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뿌리가 아닙니까? 그 두가지를 부정하면, what is point? 무엇이 남게 되는 것입니까? 그 두가지를 부정하게 되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치적, 사회적 작품이 되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예시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나 어떤 도덕적 이상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필요, 사람들의 합의에 부응하는 단체로 변질되게 됩니다.

저는 보수주의, 복음주의 신학, 자유주의 신학, 개혁주의 신학 모두를 공부하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것을 통해 깨달은 것 두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각 신학마다 나름의 목적과 기능과 가치가 있다. 다만 어떤 신앙 고백을 하던, 어떤 신학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있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일뿐만 아니라 가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그리스도보다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어떤 것을 먼저 내세우는 교회는, 그저 심리요법이나 종교 철학의 무리요, 정치적인 집단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구원의 감격과 능력이 없는 가라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솔직히 오늘날 많은 연합 교회들의 실상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여러분! 길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이 믿고 신뢰할 진리를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 참된 생명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알길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가장 선하시고, 탁월하시고, 풍성하신 그분에게 배우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다면… (여러분의 손을 가슴에 언고 토탁이면서 이렇게 말씀해보십시오)

참! 잘했다. 참! 좋은 선택을 했다. 나는 너가 너무 자랑스럽다.”

Conclusion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불완전한 학생으로 받아들일수만 있다면 분명 그분이 우리를 이끄시고, 온전하고 복된 삶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알파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그러한 역사와 은총이 더해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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