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부정한 이들이 거룩해지고

성령강림절  여섯번째 주일 / 6월 네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5:22-34, 고린도후서 8:9-14
성령강림절, 부정한 이들이 거룩해지고
정해빈목사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유대교 사회가 거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결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레위기는 먹는 것과 입는 것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부정한지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당시 유대교 사회가 거룩과 부정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엄격하게 거룩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결규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엄격해지면서 피해를 보는 약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3가지, 질병, 피흘림, 시체접촉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공동체의 거룩을 위해서 격리되거나 추방되었야만 했습니다. 병자, 피 흘리는 여성들, 시체를 접촉했거나 점점 죽어가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규칙이 너무 엄격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인도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는 종교적인 규칙이나 아버지의 권한이 너무 막강해서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자녀에게 벌을 주거나 자녀를 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너무 엄격하면 사람들이 숨을 자유롭게 숨을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육체적인 환자와 정신적인 환자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에 걸리거나 피를 흘리거나 죽어가는 사람은 육체의 고통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는 정신적인 고통까지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엄격하고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거룩을 찬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피 흘리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소위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족/마을에서 무조건 격리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괴롭히는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그들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어졌던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 주셨고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로 나누어졌던 공동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부정한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격리시키면 하나였던 공동체는 깨끗한 사람들과 부정한 사람들을 나누어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사람에게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제외시킨다면, 그런 식으로 한 명씩 한 명씩 당신은 질병에 걸렸으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당신은 피를 흘리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하고 당신은 죽어가니까 공동체에서 나가라고 말한다면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질병을 치료함으로써 건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서로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5장이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12년간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과 죽어가는 12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피를 흘리는 여인과 죽어가는 소녀는 모두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은 의사를 만났으나 고침받지 못했고 재산도 허비하였고 가정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이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부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꾸짖지 않으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회당장 야외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피를 흘리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도 부정한 일이었고 예수님이 죽어가는 소녀의 손을 잡은 것도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악한 권세를 쫓아내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2년간 혈루병을 앓는 여인과 12세 된 죽어가는 소녀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12지파는 늙은 사람도 고통받고 있었고 어린 사람도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병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을 격리시키는 소극적인 방법만으로는 죽어가는 공동체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시대의 지식인/종교인/부유한 계층을 가리키는 회당장의 딸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사회와 종교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부유한 회당장의 12살 된 딸이 왜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살피셨습니다. 회당장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딸이 먹지 못해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린 딸이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 아니면 가부장적인 억압이나 정신적/종교적 억압 때문에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살피시고 소녀와 성인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음/질병이 전파되는 것처럼 생명/치료의 힘도 똑같이 전파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코로나도 전파되지만 백신도 전파됩니다. 코로나가 전파되면 죽지면 백신이 전파되면 살 수 있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병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전파됩니다. 사탄은 죽음을 전파시키지만 주님은 생명을 전파시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격리와 배척, 질병과 죽음이 물러갑니다. 예수님에게 생명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들을 거룩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피 흘리는 여인은 건강을 회복하였고 죽었던 소녀는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배척하고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로하고 보살피고 일으켜야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후서 8장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한 사도바울의 적극적인 자세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가난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말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의 은사도 받았고 방언의 은사도 받았고 부유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부유함을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유함을 소극적으로 간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평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평형/균형을 설교하였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부유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끼리 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형/균형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획일적으로 똑같을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나누고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모른체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예루살렘교회는 갈수록 가난해지고 고린도교회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주고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어서 평형/균형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을 환영하신 예수님처럼, 적극적으로 나눔을 설교했던 바울처럼, 생명과 나눔을 전파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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