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의 신비 / 유상진 목사

창조절 여덟 번째 주일 / 10월 다섯 번째 주일
오늘 하루의 신비
하박국(Habakkuk)1:1-4,2:1-4, 데살로니가후서(2 Thessalonians)1:1-4, 11-12 누가복음(Luke) 19:1-10
유상진 목사

어제 오전에 우리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참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고향인 한국 서울 이태원동 에서 어제 오전 9시 30분 경에 대규모 압사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현재까지 154명이 사망했고 21명의 중상자를 포함해서 76 명이 부상했습니다. 코비드-19,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열린 할로윈축제 현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더구나 어저께는 한국의 방역 당국에서 No마스크 선언을 하고 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토요일이었습니다. 3년 만에 재개된 할로윈축제에 많은 젊은 이들이 할로윈 분장을 하고 이태원동 일대에 모였는데 그 수가 약 1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태원동의 클럽과 술집과 식당이 밀집해 있는 유흥가 일대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한국시간 어제 밤 10시 30 분경에 해밀톤호텔 옆 비탈진 골목길에서 사람들이 넘어지고, 깔리고, 그 위에 또 인파가 덮치면서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사상자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고, 사망자 중에는 16살의 소녀도 있다고 합니다. 이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면서 저는 참 착잡했습니다. 어제저녁 아내와의 산책길에서 내내 한국에서의 이 참사를 서로 안타까워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과 악, 천당과 지옥, 예수와 불신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이원론적인 사고로 재편하는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이 사고를 얼마나 우려먹고, 볶아먹고, 발라먹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여기 캐나다 한인교회들도 자녀들이 할로윈데이 저녁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Trick or treat”를 외치는 것이 못마땅해서 언제부턴가 “할렐루야데이”라는 것을 만들고, 그날 저녁에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사탕을 나누어 주는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아주 간단한 논리가 있습니다. 할로윈데이가 귀신문화라는 겁니다. 할로윈데이에 대한 반동으로 할렐루야데이를 만든 겁니다. 여기 한인교회의 상황이 이런대, 얼마나 많은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이번 참사를 두고 강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서양의 귀신문화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강변할까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건 설교도, 말씀도, 뭣도 아닌 그냥 수군거림입니다.
저는 8년 전에 세월호 참사 때,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가다가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이 이번 참사에서도 수군거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예상대로 그 수군거림은 이미 뉴스를 통해서 돌고 있습니다. 애초에 거기에 간 것이 잘못이라는 둥, 손을 내밀고 흔드는 것이 좀비 같다는 둥, 심지어는 참여자 중에 마약을 한 것 같은 사람이 있다는 둥 무슨 추측성 멘트가 뉴스로 나돌고 있습니다. 여러분, 창창한 20대의 젊은이들이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쳤습니다. 저는 사고를 당한 젊은이들을 비롯한 10만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서양의 귀신문화에 사로잡히거나 젊음을 낭비하는 유흥문화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 고향 한국은 희망이 없는 겁니다. 거기에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은 뭘까요? 그들을 거기로 부른 것은 생각해 보면, 답답함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현실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암담한 미래일 수도 있고, 이른바 흑수저,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 사회에서의 도피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을 어떤 것으로도 폄훼한다 해도, 이 젊은이들이 여기에 10만 명이나 모일 수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어 놓은 것은 어른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도 스무살 또래의 아이들 셋을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 이 참사에 대한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할 뿐이지요. “하나님, 우리의 청년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또 하나 덧붙여서 “하나님, 이번 참사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사람이 제발 기독교가 아니길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복음서 본문의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여지없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전개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의 시가지를 제자들과 함께 지나고 계셨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인기가 꽤 높았습니다. 이런저런 예수님의 이적들이 이미 소문이 났고, 사람들은 이 예수라는 유랑 랍비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인파가 몰렸겠지요. 그런데 그 여리고의 세관장으로 있던 삭개오도 그 인파 속에 있었던 겁니다. 마침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흔한 가로수였던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 일행이 지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 누가복음 19장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다짜고짜로 삭개오의 이름부터 부르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가 누군지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가 그 인근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어서 예수님이 아셨을 수도 있고, 삭개오를 알고 있는 일행 중의 한 명이 예수님에게 그의 이름을 귀띔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삭개오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이 이야기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일행은 세관장이면서 부자인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서 씻고, 먹고, 대화를 나누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 됩니다. 하룻밤 묵고 여독이 풀리면, 다음 날 아침 예루살렘으로의 진격을 다시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예수님 일행이 지나던 시가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삭개오의 집까지 따라와서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한 겁니다. 수군거리는 이들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게 기대하며 기다렸던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행차 길목까지 나온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상식 밖의 행동을 예수님이 한 겁니다. 수군거리는 행위는 당사자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한 어조로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이상하지요? 이 수군거림은 당사자에게 더 큰 소리로 들립니다. 그런 수군거림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죄인인 삭개오도, 그리고 그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신 예수님도 다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의 후반부가 되는 누가복음 19장 7절에서 10절은 이 수군거림을 들은 후, 삭개오와 예수님의 대화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대한 삭개오와 예수님의 즉각적인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동안에 많은 설교를 듣고, 성경 공부도 하셔서 여러분, 잘 아실 겁니다. 그 당시의 세리는 죄인과 동의어였습니다. 실제로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갔고, 이 어이없는 상황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뭐 예수님이야 어떻든 간에 삭개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안 그래도 예수님은 유대교 고위층에게는 눈엣가시였는데, 이번 일이 그렇게 좋게 작용할 리가 없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는 했으나, 이런 자신의 초대로 예수님께서 난처한 입장에 처한 겁니다. 더구나 지금 당장은 군중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요.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는지 삭개오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호기롭게 말합니다. 8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그랬더니, 조금도 지체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9절 말씀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보면,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말씀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도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아니라,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삭개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너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너는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맞는 겁니다. 그러니깐 이 대목의 삭개오와 예수님의 선언은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로 삭개오처럼 선량한 사람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납하고, 남에게 손해를 끼친 것을 네 배로 갚겠다고 약속하면, 구원받는 겁니까? 지금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 서는 무슨 황당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겁니다. 불법적인 부동산 특혜와 주가조작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 때문에 손해를 본 사람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하겠다고 선언하면 성서에서 말하는 그 궁극의 구원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냐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논리가 더 정확하지 않나요? 구원은 세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에게 임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단호하게 선언하십 니다.
이 즈음에서 부끄러운 고백 하나 해야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 마당에서 뼈가 굵었습니다. 사춘기를 교회 마당에서 보냈습니다. 그 사춘기 시절의 첫사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열 다섯, 열 여섯 살에 복음서를 읽으면서 저는 예수님에게 폭 빠졌습니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이 예수라는 사나이의 지혜, 자기의 적대자를 물리치는 여유와 살아있는 정신… 그런 것들 이 사춘기 시절의 저에게는 눈물 나게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좀 굵어지면서 그 사랑은 더 지독해졌습니다. 급기야, 열여섯살 이후에 2교대 공장을 다니면서는 몇 년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과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다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성령으로 잉태되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 높이 매달려 돌아가신, 물론 그의 신성으로 이미 그가 삼일 뒤에 다시 살아날 것과 구름을 타고 승천하여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서 안락을 누릴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좌정해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저는 그런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신이라면 그 정도는 좀 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신에 내가 사랑하는 예수는 요셉의 처 마리아에게서 식민지의 사내 아이로 태어났고, 서른이 될 때까지 조용히 노동에 종사했고, 어느 순간 의식이 깨어서 당시의 식민지 백성들에게 해방을 이야기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이 너희 것이라고 선포하고, 마침내 유대의 종교 권력과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정복자들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의 아들, 예수. 제가 사랑하는 예수는 이 예수였습니다. 그것이 그 십대 때, 논리적으로 더 정당했고, 보편적으로 더 타당했고, 합리적으로 더 온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가 세계와 현상, 인간과 신, 현재와 미래 같 은 거대한 담론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재단하고, 자신의 논리 속에 가두어 놓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 단호한 예수님의 선언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재단하고 구원을 규정하던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깹니다. 왜냐? 하나님의 구원은 말 그대로 금수저들이 늘 앞서 나가는 사회적인 틀이나, 역시 그럴 것이라는 인간적인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돈이 많은 사람 순서대로 줄 세울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 순서대로 우리를 줄 세울 수 있습니다. 얼마 짜리 차를 타는지, 얼마짜리 집에 사는지 순서대로 우리를 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대오가 다 완성되고, 마지막 날이 되어서 천국 백성을 호명하실 적에 “뒤로 돌아!” 그렇게 구령하시고 거꾸로 줄 세우실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여러분,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구원, 여러분은 받고 싶으세요? 저는 그런 구원은 안 받을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 세상 의 가치와 관성과 비슷하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습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어떤 인간적인 범주 안에 예속시키는 것은 완벽한 불신앙입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만 사람이 철이 든다는 것이 그런 겁니다. 자기가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것,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 가는 것, 저는 요즘도 이 사실들을 날마다 날마다 절감하면서 삽니다. 아직 철들려면 멀었다는 거지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구약성서의 말씀에도 자기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한 한 젊은이가 나옵니다. 마치 어저께 이태원동의 압사 사고 현장 에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서툴지만 다급하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시민들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박국 1장 2절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 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기원전 625년 이후와 587년 이전의 어느 시기 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기원전 587년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되던 때잖아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10년 전에도 유대는 이미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유대 왕조가 망하는 걸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개혁을 주도했던 요시아왕이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죽은 뒤로 유다는 걷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성전은 완전히 무너졌고, 성전의 값진 집기들은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처절한 시절이었습니다. 3절 이하의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 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분입니다.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을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박국의 눈앞에서 벌어 지고 있는 일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는 정반대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 의해서 조롱받고 능멸 받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의 구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박국의 탄원을 읽으면 그의 울분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배 중에 캐나다연합교회의 새신 조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 첫 고백이 이겁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인 것 같습니까?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세요? 어저께 당장 우리 고향에서는 154명의 꽃다운 아이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방식이고, 하나님의 세계입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때, 거기 하박국 선지자나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나 이 구원의 부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아무래도 하나님의 세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는 인간의 방식으로, 세상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의 세계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현실은 언제나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목마름과도 같습니다.
그 목마름을 오늘 구약성서의 후반부에 속하는 하박국 2장 1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초소 위에 올라가서 서겠다. 망대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지 기다려 보겠다. 내가 호소한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실지를 기다려 보겠다.” 그 기다림 끝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박국 2장 2절 이하의 말씀이 그 기나긴 기다림 끝에 들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 지지 않을 것이다.”” 정한 때, 그때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그때 악은 완전히 제거되고 의가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의 불의와 약탈과 폭력과 협박은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그때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서 여러분, 제가 상식적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그때가 언젭니까? 오늘날을 사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실, 그 마지막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2000년 이상 기다 려 왔습니다. 여러분 그때가 언제 오겠습니까? 우리 대에 오긴 오겠습니까?
그런 상식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수군거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쐐기를 박듯이 한 말씀 덧붙이십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의 마지막절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여러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이 문장을 잘 보십시오. 세 개의 단어가 나열된 문장입니다. 그 세 단어는 “의인”, “믿음”, “산다”입니다. “의인”을 직역하면 의로운 사람이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예수의 사람, 예수의 제자가 의인입니다. 그리고 “산다”는 지금 현재 생명을 가진 존재의 행위이지요. 산다는 것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자 이것을 토대로 제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하박국의 신탁을 제 나름 좀 편하게 읽겠습니다. “예수의 제자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요? 아주 간단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좀 편하게 읽고 나면, 우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의 방식과는 호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돈이 있어야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굉장히 건전하다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이 세상에서 하나 님 잘 믿고, 복 받아서 부유하게 잘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요, 천만에요.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그런 것이라면 우리 는 얼마든지 야비한 방식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그 의인을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비교됩니다. 마음이 한 껏 부푼 교만한 자와 의인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화두인 구원의 관점에서 보자면,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는 이 세상의 방식대로 지금까지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온 자신의 방식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 반면에 의인은 자신의 능력도, 자신의 행위도, 자신의 재물도 아닌, 오직 하나님 이 정한 때, 그 때, 그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삭개오도 한 때는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였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방식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니. 동족을 배신하고, 로마의 앞잡이로 세금징수를 하면서 동족의 고혈을 짜냈겠지요. 그런데 어디 삭개오 뿐이겠습니까? 원론은 그래도 실제 세상살이에서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여기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 천민 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동안의 구원 아니고 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여기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일정 정도 그렇게 살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은 많이 가야 30년 갑니다. 최대한 많이 가도 50년 갑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가 사는 30년 50년 안에라도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구원은 그 구조상 영원성이 존재합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구원은 그때, 하나님이 정한 그 때에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반듯이 이루어집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다만 그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어둠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때같은 150명이 넘는 우리의 자식들이 훌쩍 떠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절망합니다. 어떨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자신의 기대에 조 금만 못 미쳐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집니다. 어떨 때 우리는 종이 한 장 차이도 안되는 우월감에 우쭐댈 때 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의 시간을 버티어 내면서 온전한 하나님의 구원에 온몸으로 기댈 재간이 우리에게 있기는 합니까? 오늘 우리가 예배 중에 찬양한 것처럼 우리는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 만경창파 망 망한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강한 의인의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서신서 본문의 말 씀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일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제2차 선교 여행 때 빌립보에서 피신하여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를 찾아갔지요. 거기에서 바울은 가죽을 이겨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겨난 교회가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유대인들의 방해 와 선동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떠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갓난아기 같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남겨 둔 채 그곳을 떠나 야만 했던 겁니다. 바울이 이 신생 교회를 얼마나 걱정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의 염려는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서신서의 인사말 몇 구절만 읽어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얼마나 든든하게 성장했는지 느껴집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과 4절을 읽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 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각자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간직한 그 인내와 믿음을 두고서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칭찬입니까? 저는 알파한인연합교회가 이런 칭찬을 받는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크게 자라서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더욱 풍성해지고, 마음속에 간직한 인내와 믿음이 다른 교회의 자랑이 되는 교회. 그런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는 행복할 겁니다. 그런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도 행복할 겁니다. 이즈음 되면 더 말할 나위 없는 최상의 교회, 최상 의 성도 아닙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의 후반부에 속하는 11절과 12절의 바울의 간구에는 완벽한 교회로 보여지는 데살로니가교회에 어떤 선천적인 부족함이 있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제가 그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며 또 그 의 능력으로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이상하지요? 다른 교회에 자랑할만한 교회, 데살로니가교회잖아요? 성도의 믿음이 자라나고,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이 풍성한 교회, 데살로니가교회잖아요? 온갖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와 믿음을 간직한 교회, 데살로니가교회잖아요? 그런데 바울의 간구를 가만히 들어 보면 그 모든 것의 주체자는 데살로니가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잘 보세요. 데살로니가교회 의 성도들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행위를 완성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마침내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구약성서의 본문이 말하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의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의인 자신의 믿음인가요? 아니요, 그의 믿음을 하박국은 오늘 본문 전•후반 말씀의 중간에 있는 12절의 한 구절을 통해서 이렇게 에둘러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석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시려고 그를 채찍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를 벌하시는 분은 누구인가요? 예, 하나님입니다. 이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믿음이 이 문장의 행 간에는 빼곡히 들어차 있습니다. 저는 그의 믿음을 사춘기 시절에 만난 한 사람으로 다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궁도 귀족의 고택도 부자의 아늑한 침실도 아닌 정복국의 세금 징수를 위한 인두세 신고를 하기 위해 길을 떠난 가난한 목수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누일 곳이 없어서 한겨울 외 양간 말 먹이통에 누여졌습니다. 자라면서는 참혹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그 당시의 아들들은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가 죄인이라고 단죄했던 사람들에게는 과감하게 죄의 용서를 선언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장가도 못 가고 젊은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가장 두렵고 결정적인 고통의 순간을 고스란히 몸으로 다 겪어 냅니다. 이보다 더 억울하고 불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남는 것이 악 말고는 뭐가 있습니까? 그동안 품었던 사랑, 믿음, 희망 뭐 이런 게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하나님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잔잔한 양 같이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고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믿고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의 믿음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믿음, 이 예수님의 믿음 때문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가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의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믿음으로 살 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유일한 길은 이 믿음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과 일치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서의 삭개오가 이 기막힌 일치를 경험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이 말은 그동안 자신이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재물에 이제 더 이상 예속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삭개오는 주변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실토한 것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에 그만큼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경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삶의 지평에 눈을 뜨는 겁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세상은 삭개오에게 세리장으로서의 재능과 힘을 보여야 성공한다고 강요했습니다. 너의 욕망이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떠밀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삭개오는 그동안 그런 세상의 방식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겁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완성하신 예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삭개오의 이 찰나의 빛을 발견한 예수님께서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렇게 선언하신 겁니다. 아직도 수군거리고 있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요.
여러분, 우리는요? 우리가 이 자본주의 세상을 삽니다. 우리의 세계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저 서울 이태원동의 내리막길 골목 같은 세상입니다. 곳곳이 전쟁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히 예속당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의 믿음에 잇대어서 그분의 생명의 빛 앞에 올곧게 서기만 한다면, 그렇게 그때, 정한 때 반듯이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산다면 가능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 동안 기다린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고 하십시다. 피치 못하게 3년을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 이 생겼습니다. 서로를 기다린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다린다고 해 놓고, 그리워하지도 않고, 자유분방하게 딴 사람하고 연애하고, 상대방의 생각은 눈꼽 만큼도 안 하고, 각자 즐길 것을 다 즐긴 다음에 3년 뒤에 만났다고 합시다. 그것을 우리는 3년 동안 기다린 것이라고 하지 않지요. 기다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의 온유를 닮고 싶어 하고, 그의 작아 짐을 따라 하고, 그의 소망을 신앙하고, 그의 사랑이 아련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의 자취가 그리워서 그 그리움의 벽에 기대어 서는 것… 여러분 이게 기다림이지요. 그래야 기다린 거지요. 이것이 곧 다시 오셔서 우리의 생명을 완성하실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구원은 기약 없는 그때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신비가 됩니다.
여러분, 구원은 오늘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일을 후회하거나 그리워하면서 인생을 보냅니다. 어떤 사람은 몽상 적인 미래를 좇다가 삶을 소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거에 집착할 필요가 없고,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과거와 미래는 오늘에 다 모여있습니다. 좀 어려운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시간은 오늘에 다 집약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리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지난 4주간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알파한인연합교회의 신앙의 노장들과 드린 예배는 저에게 영광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뭐 되지도 않는 긴 설교를 들으신다고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이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오늘입니다. 여느 때와 똑같은 오늘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순간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말합니까? 사랑의 가장 강렬한 표식인 저 십자가를 우리는 봅니다. 온화하기만 한 저 창밖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봅니다. 놓고 보기에도 아까운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의 얼굴을 우리는 봅니다. 그리고 이 예배당의 공간을 채우는 어떤 울림을 우리가 듣습니다. 성가대의 정성어린 찬양을 우리가 듣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듣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실 하나님께 함께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함께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닮은 형제자매들과 함께 대화합니다. 여러분, 지금 오늘 이 순간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뭡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계수하던 집과 재물과 명예의 크기는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기원에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오늘 하루의 신비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저 하박국처럼, 삭개오처럼,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오늘 경험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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