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보라!

 

류영모(1890-1981)

이 사람을 보라    글: 오강남

한국이 낳은 특출한 종교 사상가 류영모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격의 나인 얼나를 참나로 깨달아야 합니다. 삼독(탐·진·치)의 제나를 쫓아버리고 얼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의 삶

함석헌의 스승으로 알려진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1890~1981)는 한국이 낳은 특출한 종교사상가이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에 의하면 인도가 석가를, 중국이 공자를, 그리스가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가 단테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각각 그 나라의 걸출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다면, 한겨레가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분은 다석 류영모라고 했다.

 

서울대 농대 학장을 역임하고 성천재단을 설립하여 한국에서 인문학 진작에 크게 공헌한 류달영도 지금까지 사상의 수입국이던 한국이 20세기 다석의 출현으로 사상의 수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예견했다. 다석의 제자로 다석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써낸 박영호는 “류영모는 온고지신溫故知新한 인류의 스승으로 손색이 없다”고 했다. 다석이 우리말이나 한문 글자를 가지고 그 속에 숨어있는 깊은 종교적·정신적 뜻을 찾아내는 것을 보면 가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창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삶과 가르침을 깊이 들여다보면 구조적으로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인류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면에서 통합 내지 통섭한 면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류영모는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수각다리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열세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으나 천수를 누린 사람은 류영모 뿐이었다. 류영모는 5살 때 아버지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천자문 한 권을 다 외웠다. 6살 때부터 서당에서 ‘통감通監’을 익혔고,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 간 신학문에 접한 후, 다시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간 ‘맹자孟子’를 배웠다. 맹자는 예수, 공자와 함께 그에게 정신적 영양의 원천이었다고 한다.

1905년 15세에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다. 한편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후 일본을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1905년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7년에는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성경, 기독교사, 한문, 영어, 물리학, 천문학, 한국사 등을 배웠다. 1909년 경기도 양평학교에서 한 학기동안 교사로 일하고, 1910년부터는 3·1운동의 33인 중 하나가 된 남강 이승훈이 세운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의 초빙을 받아 과학과 수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때 오산학교에 미리 와 있던 춘원 이광수를 만나 동료 교사로 함께 지냈다.

 

류영모는 오산학교에서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과 머리 숙여 기도하고, 수업 중에는 학과목보다 그리스도교 정신을 가르치는 데 더 열성적인 정통 그리스도인이었다. 류영모의 영향으로 설립자 이승훈도 학교 건물을 예배 장소로 쓰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오산학교의 그리스도교 정신에 힘입어 주기철, 함석헌, 한경직 같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류영모 자신은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자기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던 그리스도교 정통신앙을 버렸다. 나중 이 일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그때 그리스도교를 가르친 것은 20세 철도 들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기처럼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한 ‘멀쩡한 일’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표층 그리스도교에서 심층 그리스도교로 자라난 셈이다.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지 7년만의 일이다.

류영모가 이렇게 표층 그리스도교 교리 신앙을 버린 이유는, 류영모의 제자로서 류영모 사상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박영호에 의하면 크게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톨스토이를 알게 된 것, 둘째, 노자와 불경을 읽게 된 것, 셋째, 두 살 연하의 동생이 요절한 것이다. 1910년 톨스토이의 객사客死로 톨스토이 붐이 일어났을 때 톨스토이의 심층 신앙을 알게 되고, 노자와 불경에서 이웃 종교의 가르침의 깊이를 보고,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두 살 연하의 동생이 19세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을 보면서 잘 믿으면 축복받는다는 기복신앙의 허구를 꿰뚫어 본 것이다. 모두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류영모는 1912년 오산학교에서 나와 일본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다니다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해버렸다. 예수처럼 참나, 얼나를 깨닫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일을 하며 사는 데 대학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마치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 가다가 동굴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라는 진리를 깨친 후 유학을 포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1915년 중매를 통해 알게 된 김효정과 얼굴 한 번 보는 일 없이 결혼하였다. 결혼 후 2년만에 맏아들 의상宜相을 낳고, 2년 터울로 자상自相과 각상覺相을 얻었다. 1917년, 가까이 살던 육당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靑春’에 ‘농우’, ‘오늘’ 등의 글을 기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때에는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을 맡아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경성피혁 상점 금고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발각되어, 류영모 대신 아버지가 105일간 옥살이를 했다.

1921년 류영모는 오산학교 교장으로 초청되었다. 도쿄 유학 중 김정식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는 고당 조만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그가 일제의 탄압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서른 살이 갓 지난 류영모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다. 1910년 과학 교사로 봉직했던 류영모는 이제 교장으로 취임하여 수신修身과목을 맡아 성경, ‘도덕경’ 등 동서의 경전은 물론 톨스토이, 우치무라, 칼라일 등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장 인준을 받지 못해 결국 1년 남짓 머물다가 교장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 졸업반 학생이었던 11년 연하의 제자 함석헌을 만나 평생 가장 가까운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다. 오산을 떠나면서 배웅 나온 함석헌에게 류영모는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咸 자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던가 봐”라고 했다.

서울로 돌아온 류영모는 아버지의 피혁상을 돕다가 아버지가 차려준 솜공장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1927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던 월남 이상재가 돌아가자 류영모는 그 당시 YMCA 총무로 있던 현동환의 권유로 1928년부터 연경반을 지도하기 시작,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요한복음’ 등 그리스도교 경전은 물론 ‘도덕경’ 등 이웃종교의 경전도 강의했다.

1927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교신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의 성서모임에 참석하던 한국 유학생 여섯 명과 함께 고국에서 무교회 신앙을 전파할 목적으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내고 성서연구회도 만들었다. 김교신은 함석헌의 소개로 류영모를 만나 동인으로 참여하여 달라고 권유했으나 류영모로서는 아직도 표층 그리스도교 차원에 머물고 있던 김교신이나 그의 동료들의 신앙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 없었다. 자기도 “열다섯 살에 입교하여 스물세 살까지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이었지만 이제 톨스토이 같은 ‘비정통’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37년 겨울 어느 날 ‘성서조선’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간청에 못 이겨 ‘요한복음’ 3장16절을 풀이했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류달영의 보고에 의하면, 류영모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말을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씨앗을 넣어주셨다는 뜻이라고 하고, 사람은 제 마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을 키워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석가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 것이나, 공자가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인성仁性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런 것이 예수가 말하는 영성과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도마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직접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임재를 깨달아 알라고 했다.) 그의 신앙이 일반 표층 신앙과 얼마나 달랐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른바 정통 신앙인이었던 김교신은 오히려 류영모에게 ‘성서조선’에 기고를 부탁, 1942년 폐간될 때까지 열한 번 글을 실었다. 이 일로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다석은 57일 만에, 류달영은 10개월 만에, 나머지는 1년이 지나 풀려나왔다.

1933년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고 2년 후 아버지가 남긴 가산을 정리하여 종로구 적선동에서 세검정 자하문 밖, 그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지금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으로 이사, 그 일대에 임야를 사서 과일과 채소를 재배했다. 땀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불한당不汗黨의 삶에서 20세 때 톨스토이를 알고부터 이상으로 그리던 농촌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1941년 크게 깨친 바가 있어 2월 17일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행하기로 하고 다음 날에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해혼解婚을 선언했다. “남녀가 혼인을 맺었으면 혼인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혼이 아니라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누이처럼 산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처럼 시골 생활을 선택한 것이나 해혼을 실행한 것은 ‘자연 속’에서 ‘홀로’ 은둔하는 기쁨을 누리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처럼 ‘홀로 됨’은 심층 종교를 지향하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에 보면 예수가 “홀로이고 택함을 입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나라를 찾을 것임이라”하고, 계속해서 ‘홀로 됨’ 혹은 ‘홀로 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 됨, 단독자, 홀로인 자와의 홀로 됨alone with the Alone 등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것이다. ‘홀로’라는 뜻의 그리스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수도사라는 ‘monk’나 수도원이라는 ‘monastery’라는 낱말이 파생되었다. 홀로 됨이 종교적 삶에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이런 단독자 됨, 홀로 섬, 고독은 종교사를 통해 볼 때 선각자가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셈이다. 예수도 사람들에게 자기 멍에는 가볍고, 자기를 따르면 쉼을 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우셨다”고 했다. 노자님도 자신의 말은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쉽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이렇게 드문가”하고 탄식했다. 공자님도 “아,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하늘밖에 없구나” 한탄했다. 위대한 성인들의 실존적 고독을 말하는 대목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영적으로 앞서 간 사람들이 홀로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떠나 홀로만 살게 된다고 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경』 4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말이 나온다. 빛이 부드러워져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성인들, 곧 깨친 사람들은 언제까지 고고하게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함으로써 일반 사람들과 섞여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빛이 티끌과 하나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한다는 ‘임마누엘’ 혹은 ‘육화肉化, incarnation’의 논리와 같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十牛圖」에도 소년이 홀로 집을 떠나 소를 찾지만, 찾은 다음에는 다시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 마지막 그림이 아니던가. 류영모도 시골 생활을 했지만 정기적으로 연경반을 인도하기도 하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도 하며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류영모는 1년 후인 1942년 1월 4일 ‘솟남’의 체험을 했다. 이 경험을 그는 “마침내 아버지의 품에 들어갔다”고 표현했다. 자기 마음속에 깃든 ‘얼나’, ‘참나’를 깨닫고 오로지 그것을 하느님으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깊은 곳에 줄기차게 올라가려는 신격인 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격의 나인 얼나를 참나로 깨달아야 합니다. 삼독(탐·진·치)의 제나를 쫓아버리고 얼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박영호는 이를 두고, “류영모는 쉰한 살에서 쉰두 살 사이에 석가, 예수가 깨달은 최고의 경지인 구경각究竟覺을 이루었다. 이는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을 이룬 것이다”고 했다. 류영모는 이런 체험을 한 이후 잣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안방 위목에다 놓고 방석 겸 침상으로 삼았다. 40년을 이렇게 살다가 숨진 다음에도 그 널판에 눕혀졌다.

류영모는 1940년경부터 다석多夕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낮보다는 밤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므로 밤이야말로 ‘영원의 소리를 빨리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하느님과 하나 된다고 가르치는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1943년 음력 설날 류영모는 일식日蝕을 보려고 서울 북악산에 올라갔다. 안개가 온 장안을 덮고 있고 그 위로 아침 해가 불끈 솟는 것을 보았다. 솟아오른 태양으로 황금빛이 된 하늘, 안개로 황금바다를 이룬 땅, 그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유영하다가 허공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자신–가히 천·지·인 삼재三才가 하나 되는 경험이었다. 류영모 사상에는 삼재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한글의 세 개의 기본 모음인 ‘·’, ‘ㅡ’, ‘ㅣ’를 두고, 그리스도교 십자가는 곧은 사람(ㅣ)이 땅(ㅡ)을 뚫고 솟아올라 둥글고 원만한 하늘(·)로 통함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풀었다.

류영모는 1961년 11월 외손녀와 함께 옥상에 지어놓은 별 관측용 유리방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중 외손녀가 떨어지려 하자 외손녀를 껴안은 채 3미터 높이의 현관으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이 지나서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의식이 들락날락하는 상태에서도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와 석가는 참 비슷해요. 매우 가까워요. 죽으면 평안할 거야. 무엇을 믿거나 죽으면 모두 평안할 거야”하는 말을 하고, 의식이 겨우 회복된 후 함석헌이 방문했을 때 󰡔요한복음󰡕 17장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하는 말씀과 13장 31절인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느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하는 말씀, “이 두 가지가 같은 말씀이야” 하는 등 성경 말씀을 놓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세계 신비주의 사상의 핵심 요소인 신과 인간의 ‘하나 됨’을 무의식 상태에서마저 다시 확인한 셈이다.

1977년 6월 21일 아침 해가 뜰 즈음 두루마기까지 입고 “나 어디 좀 간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가서 이틀 간 연락이 없었다. 다음 날 밤 10시경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의식을 잃은 채 북악산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집에 온 지 3일이 지나 의식이 돌아왔다. 그 후로도 두 번이나 집을 나갔는데, 가족이 뒤를 따랐다. 박영호는 톨스토이가 객사한 것처럼 류영모도 밖에서 죽을 결심을 하고 집을 나간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류영모는 죽기 얼마 전부터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1978년 함석헌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하는데, 추도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1980년 아내 김효정이 세상을 떠났을 때, 함석헌이 장례를 주재했는데, 류영모는 아내의 죽음을 알지 못한 듯 했다. 아내가 죽고 6개월 후인 1981년 2월 3일, 류영모는 육신의 옷을 벗고 ‘빈탕한데’에 들어갔다. 40년간 하루 한 끼씩 먹고 산 삶을 마감한 것이다. 산 기간은 90년 10개월 21일, 날수로 3만 3천 2백일이었다.

그의 기본 가르침

지금껏 류영모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특별한 가르침 몇 가지를 예로 들면서 그의 가르침이 세계 종교사에서 심층 종교가 갖는 보편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로 한다.

첫째, 하느님은 ‘없이 계신 이’라는 가르침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을 두고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śunyatā, 혹은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와 마찬가지로 ‘있음’과 ‘없음’의 어느 한 쪽만의 범주로 제약할 수 없는 궁극 실재라 보았다. 따라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결국 있음과 없음을 함께 어우르는 말로 ‘없이 계심’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보다 더욱 실감나는 우리말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생각은 힌두교 베단타 전통의 샹카라나 그리스도교 전통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비롯하여 세계 종교사에서 거의 모든 심층의 스승들이 체험적으로 알고 주장하던 바라 할 수 있다. 이른바 싸구나 브라흐만, 니르구나 바라흐만이라는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이다.

둘째, ‘삶은 놀이’라는 가르침이다. 류영모는 삶을 놀이, 혹은 잔치로 보았다. “이 세상의 일…… 잠을 자고 일어나고 깨어 활동하는 것을 죄다 놀이로 볼 수 있다.”, “이 지구 위의 잔치에 다녀가는 것은 너, 나 다름없이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 버려야 한다…… 다 벗어 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데로 날아가야 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빈탕한데 맞혀 놀이空與配享’으로 요약한다. 하느님이신 공과 더불어 짝을 지어 놀이를 즐긴다는 뜻이다.

‘도마복음’ 제21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께 “당신의 제자들은 무엇과 같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예수는 “그들은 자기 땅이 아닌 땅에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들과 같습니다. 땅 주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 땅을 되돌려 달라’ 하니, 그 어린아이들은 땅 주인 있는 데서 자기들의 옷을 벗고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 줍니다”고 했다.

심층 종교인들은 지금의 나, 사사로운 나, 이기적인 나로 살아가는 삶이 궁극적 삶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전통적인 표현으로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영어로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이다.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의 마지막 구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를 연상케 한다.

 

셋째, 류영모는 ‘가온 찍기’라는 말을 사용했다. 글자로 ‘ㄱ.ㄴ’이라 쓴다. 여기서 ‘ㄱ’은 하늘, ‘ㄴ’은 땅, 그 가운데 찍힌 점 ‘·’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한 점, 순수한 주체로서의 나를 가리킨다. 이 순순한 본연의 얼나는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에서도 벗어나고 여기 저기 라는 공간의 제약에서도 자유스러운 존재 자체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머무는 때 묻지 않은 참나를 가리킨다. 류영모는 “과거는 과장하지 말라. 지나간 일은 허물이다. 나도 조상보다 낫다. 순舜은 누구요 나는 누구냐? …… 죽은 이들은 가만 묻어 두어라. 족보를 들추고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력한 증거다”라고 했다. ‘과過’라는 글자가 ‘과거’라는 뜻과 ‘허물’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그에게는 ‘오늘’만 있을 뿐인데, ‘오늘’은 ‘오+늘’, ‘오~영원!’이다.

넷째, ‘죽어서 다시 살다’라는 가르침이다. 류영모는 1955년 YMCA 연경반에서 1년 후인 1956년 4월 26일이면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의 사망 일자를 선언한 것은 정말로 그날 죽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라 보기보다 현재의 몸나와 제나가 죽어야 영원한 얼나로 솟난다고 하는 진리를 확인하는 연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죽음 공부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공부라고 하면서,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없이 하자는 것이 종교다. 죽음의 연습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들이 무덤에서 죽음을 두고 명상하던 “죽음을 생각하라memento mori” 수행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거의 모든 심층 종교에서는 우리의 ‘이기적 자아ego, 몸나, 제나’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나 유교에서 말하는 무사無私, 이슬람의 수피 전통에서 말하는 파나Fana, 자기 죽음이라는 것도 이런 이기적 자아를 없애라는 가르침이다. 예수도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 16장 25절)라고 했다. 작은 목숨―‘소문자 life’, ‘소문자 self’를 구하겠다고 안간힘을 하고 있는 이상 큰 목숨―‘대문자 Life’, ‘대문자 Self’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작은 목숨, 작은 자아를 내어놓을 때 비로소 큰 목숨, 큰 자아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찾게 된다. 작은 자아,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 진아眞我로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체득하라는 것이다. 내 안의 의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쫓아냄, 『장자』에서 말하는 ‘오상아吾喪我(내가 나를 여읨)’하는 체험도 마찬가지다. 류영모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몸나, 제나에서 죽고 얼나로 ‘솟남’에 대한 것이다.

다섯째,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다석 류영모는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해서 종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歸一. 대종교가나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는 것이다. 신선이고 붓다고 도道를 얻어 안다는 것은 다 이 ‘하나’이다.”고 했다.

예수는 어린 아이와 같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도마복음’에 보면 예수는 자기가 ‘나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아 남녀로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의 갓난아기처럼 ‘하나’를 지켜야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했다. 『도덕경』 28장 마지막에도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나누는 일을 하지 않는다大制不割”라고 했다. 분석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해방되어 근원으로서의 하나로 돌아감으로써 양면을 동시에 보는 통전적·초이분법적 의식 구조를 유지한다는 이야기이다.

여섯째, ‘예수에 대한 믿음’과 대조되는 ‘예수의 믿음’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는 믿은 이, 압·아들, 얼김,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높·낮, 잘·못, 삼·죽-가온대로-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없이 계심 믿은 이, 예수는 믿은 이.”

이처럼 류영모는 예수를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임을 믿은 이, 높고 낮음, 선과 악, 삶과 죽음을 이항대립으로 보는 대신 이를 통합하여 하나로 지양止揚 내지 승화昇華하는 길이 있음을 믿은 철두철미 ‘믿은 이’로 이해한다. 여기서 ‘믿은 이’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어떤 교리 체계나 사상을 무조건 받아들여 답습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사물의 진실을 깨치고 그 확신으로 산 분이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고치면 류영모는 예수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는 ‘예수에 대한 믿음faith in Jesus’이 아니라 예수가 가지고 있던 그런 믿음,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을 강조한 셈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는 우리의 대표”, “예수의 혈육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혈육”이므로 예수를 본받음, 그리하여 우리도 십자가에 달림이 중요한 것이라 보았다.

예수가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성탄이란 내가 얼의 나로 거듭나는 나의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가슴 속에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탄생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불해야 한다.” 류영모는 ‘참선 기도’를 통해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태어남’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류영모는 말로 무엇을 비는 탄원 기도를 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을 일으키는 ‘참선 기도’를 했다. 함석헌이 투옥되었을 때만 예외적으로 ‘소리 내서 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류영모는 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승천과 재림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예수가 하늘로 올랐으면 우리도 예수처럼 하늘로 솟아올라야 마땅하거늘 땅에 주저앉아 그의 다시 오심만을 기다리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하늘로 올라가신 뒤 신자들은 각자 욕망의 주로 다시 오시기를 바란다.”, “그리운 님 따라 오름이 옳고 올님이거니 그림만으론 글타.”

일곱 째, 생각과 ‘바탈퇴우’의 가르침이다. 류영모에게 있어서 ‘생각’은 ‘각을 낳는 행위’, ‘깨침을 얻는 행위’, 이기적인 제나에서 참나와 하나 되는 솟남의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내 속에 불이 붙어 옛날의 내가 타고 새로운 내가 탄생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나온다. 생각의 불이 붙어 내가 나온다.” 생각은 하느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불타는 것이다. “사람은 말씀이 타는 화로다.” “생각하는 것은 기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올라가는 거야. 생각이 기도야.” “머리를 위로 우러러 들게 하는 거룩한 생각은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불꽃”이다. “좋은 생각의 불이 타고 있으면 생명에 해로운 것은 나올 수 없다.” ‘바탈퇴움’ “나무의 불을 사르듯이 자기의 정신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바탈은 타지 못하면 정신을 잃고 실성失性한 사람이 된다.”

우리가 타고난 작은 바탈을 태우고 새로운 바탈로 솟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나는 세상에 불을 지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불이 붙어 타오르기까지 잘 지킬 것입니다” 하는 말을 연상시킨다. 물로 받는 세례로는 불충분하고 성령(바람)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함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여덟째는 ‘유불도 기독 회통會通’이라는 가르침이다. 다석 류영모는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같다 (……) 유교, 불교, 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 이 고동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올려 보낸다”고 했다.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하는 종교 전통별 차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대로 표층 종교냐 심층 종교냐를 따지고, 심층일 경우 그것이 어느 전통이든 모두 우리를 참 하나와 하나 되게 도와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석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일에 힘쓰는 박재순 교수에 의하면, 다석 류영모의 회통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앞에서 지적한 ‘빈탕한데 맞혀 놀이空與配享’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모시고 늘 제사 드리는 자세로 살며 즐기자’고 하는 이 말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일은 기독교적이고, 제사지내듯 정성을 다하는 자세는 유교적이고, 빈탕은 불교적이고, 한데에서 놀자는 것은 도교적”이라는 분석이다. 50여 년 전 배타적인 기독교 일색이던 한국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가 이런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맺는 말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인다. 이미 글이 길어졌기에 아쉽지만 그의 가르침 일부만을 소개할 수밖에 없다. 현재 ‘다석일지’, ‘다석강의’ 등 다석이 쓰거나 말한 것을 모은 책, 그리고 다석이나 다석의 가르침에 대해 쓴 책이 20여 권 된다. 특히 박영호 선생님의 책, 박재순 교수와 이정배 교수의 책들이 도움이 된다. 더욱 알고자 하는 분들은 이를 참조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튼 다석 류영모는 세계 심층 종교들이 가르치는 가르침 중 중요한 것을 모두 독자적으로 받아들여 창의적이고도 독특한 방법으로 표현했다. 류영모는 참으로 우리에게 표층적 종교에서 심층 종교의 가르침으로 발돋움하라고 일러주시는 우리의 참된 스승이시다.*

물소리 오강남의 류영모 이야기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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