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주현절 일곱번째 주일/2월 세번째 주일
주현절,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누가복음 6:17 – 26
정해빈 목사

 

우리는 요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묵상하는 주현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읽어야 하는 성서일과를 보면 요즘 누가복음 말씀이 계속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서 사방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시고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모세처럼 산에서 설교하셨기 때문에 산상설교라고 부르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평지에서 설교하셨기 때문에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산에서 설교하시면 산을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지에서 설교하면 누구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온 유대와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 해안 지방에서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유대인도 오고 헬라인도 오고, 남자도 오고 여자도 오고, 건강한 사람도 오고 병자도 왔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차별없이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산 밑으로 내려오셔서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필요한 사람들, 몸과 마음의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환영이 필요한 사람들, 용서와 자유와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산 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물론 교회가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빛을 비추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빛을 비춘다는 의미로 보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빛을 비추는 것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섬기고 구원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교회는 낮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높아지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갈 수 있지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갈 수가 없게 됩니다. 낮은 곳에 있는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교회,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이 편안하게 올 수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4가지 축복과 4가지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나 때문에 배척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에는 팔복만 나오는데 누가복음에서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팔복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누가복음 말씀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말씀이 마태복음 말씀보다 너무 구체적이고 내용이 직설적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당시에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취임설교에서도 제일 첫 음성으로 가난한 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장과 6장 말씀은 예수님의 시선이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그 사람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품에 안으시고 먹이시고 입히셨고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갖지 않는 부유한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와 나사로 비유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찬치를 벌였는데 거지 나사로는 대문 앞에서 헐벗은 몸으로 구걸을 했고 개들이 그의 몸을 핥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것이 지옥에 떨어질 정도로 큰 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는 복을 받고 부자는 화를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부자와 나사로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었을 경우 이자를 받으면 안 되고 겉옷을 담보로 잡았을 경우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때 네 귀퉁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아야 하고 칠년 째가 되면 땅에서 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해야 하고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1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잠언 14장은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편애하시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난하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시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를 때 땅이 파인 웅덩이가 있으면 물이 웅덩이에 제일 먼저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장 먼저 채워 주십니다.

최근 뉴스를 보다가 미국 인구의 1%가 전체 재산의 50%를 갖고 있고 인구의 19%가 42%의 재산을 갖고 있고, 인구의 80%가 7%의 재산을 갖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억 5천만 명이 버는 소득보다 상위 400명이 버는 소득이 더 많다고 합니다. 빈부격차가 너무 크니까 부자들 스스로 부유세를 더 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면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고 부자도 불행합니다. 부자들이 집집마다 경호원을 배치하고 밖에 나갈 때도 경호원을 데리고 나가고 그러면 부자들도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유한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부자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자선을 베풀고 세금을 많이 내는 부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부자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부자와 물질의 탐욕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랜싱연합교회 1층에 내려가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Food Bank와 중고장터를 주중에 운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들과 함께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가난과 기도,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탐욕을 멀리하고 스스로 절제하고 나누는 가난을 가리켜서 깨끗한 가난, 성빈/청빈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기도가 필요하고 나와 세상 사람들 사이에는 자발적인 가난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 전통 중의 하나가 자발적인 가난의 전통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해서 서로 미워하면 서로 불행하지만 자발적인 가난은 감동을 주고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 줍니다. 예수님, 세례요한, 중세 시대의 성자 프란치스코 모두 이웃사랑을 위해 가난한 삶을 살았고, 한국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광주 무등산 주변에서 활동했던 이세종, 맨발의 성자 이현필, 한평생 병자들을 돌본 미국간호사 서서평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장사해서 돈을 벌고 부유해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돈을 벌고 부유해지는 것이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부유함을 넘어서 구제와 나눔과 성빈/청빈에까지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위해서는 기도하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절제하고 나누는 거룩한 가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Luke 6:17 – 26

He came down with them and stood on a level place, with 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 and a great multitude of people from all Judea, Jerusalem, and the coast of Tyre and Sidon. They had come to hear him and to be healed of their diseases, and those who were troubled with unclean spirits were cured. And all in the crowd were trying to touch him, for power came out from him and healed all of them. Then he looked up at his disciples and said: “Blessed are you who are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Blessed are you who are hungry now, for you will be filled. Blessed are you who weep now, for you will laugh. Blessed are you when people hate you, and when they exclude you, revile you, and defame you[d] on account of the Son of Man. Rejoice in that day and leap for joy, for surely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that is what their ancestors did to the prophets. But woe to you who are rich, for you have received your consolation. “Woe to you who are full now, for you will be hungry. Woe to you who are laughing now, for you will mourn and weep. Woe to you when all speak well of you, for that is what their ancestors did to the false prophets.” (Luke 6:17-26)

Jesus said. “Blessed are the poor now, for the kingdom of God is yours.” Just as water is first filled in a puddle of earth, God looks for the poor who can not live a whole life and fills them with love and blessing first. A theologian says that poverty and prayer should be the evidence of following Jesus today. If prayer is needed between God and me, voluntary poverty is needed between me and the world. We are called to pray for God’s relationship with me and to practice the holy life of poverty for our relationship with our neighbors who are hungry.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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