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생명을 일으키는 예배당

주현절 네번째 주일 / 1월 다섯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21-28, 고린도전서 8:6-13 
주현절, 생명을 일으키는 예배당
정해빈 목사

 

벤쿠버 다운타운 동쪽에 위치한 제일연합교회(First United Church)는 벤쿠버에서 세워진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입니다. 이 교회가 위치한 지역은 소위 위험한 우범지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1886년 벤쿠버 대화재가 났을 때부터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캐나다연합교회 지역선교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주민들을 대상으로 영어교실, 직업훈련, 중고장터, 푸드뱅크, 보건교실, 미술음악캠프, 법률자문, 중독치유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실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범지대에 사는 여성들을 위한 “안전 거주지” 캠페인을 벌이는 등 사회복지와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이 교회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 이 건물은 주일예배를 위한 장소로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교회 건물이 사용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지역주민들이 일주일 내내 사용할 수 있고 집 없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교회건물을 재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2차 대전이후 베이비붐이 일어나 인구가 증가하였을 때 많은 교회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주일예배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교인 숫자는 줄어들었고 더 이상 큰 예배당 건물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예배당만 큰 교회가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복합적인 건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토론토에도 동쪽 다운타운 리젠트 파크에 교단이 세운 저소득층을 위한 복합건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랜싱연합교회도 기존 건물을 허물고 다목적예배당, 어린이집, 중고장터, 소예배실, 다목적실이 있는 건물을 새로 건축하였습니다. 주일날에만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지역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예배당에서는 거룩하게 예배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공간/예배당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1장을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율법학자들이 놀랄 정도로 권위있게 가르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아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악령에 걸린 사람이 회당에 앉아 있었다는 오늘 말씀은 회당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본래 회당은 율법학자/랍비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율법학자/랍비들이 율법을 바르게 가르쳤더라면 회당에서는 자유와 기쁨과 치유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사람들을 억압/훈계하였기 때문에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율법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율법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율법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가 있고 수 없이 많은 설교와 성경공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와 설교와 성경공부가 오늘날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과 자유를 주는지 아니면 억압을 주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치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경제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종교가 사람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백성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박탈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박탈을 당하고 있다면 최소한 종교라도 백성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정결 규정을 강요함으로써 또 하나의 짐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습니다. 종교는 본래 사람에게 착한 심성을 가르쳐 주고 사람에게 은혜와 기쁨과 치료와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갈릴리 백성들은 정치적인 악령, 경제적인 악령, 종교적인 악령 때문에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는 것들을 쫓아내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질식하게 만드는 정치/경제/종교/체제/제도/불의/편견은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시고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유와 해방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악령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은 회당에서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이 단순히 예배만 드리거나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영적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당이 일주일에 한번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만남과 치유와 사랑과 기쁨과 회복이 일어나는 거룩한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교회당/예배당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8장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에는 우상숭배를 하고난 후에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축제가 있었습니다. 지식이 높은 교인들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우상에게 바친 고기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러분에게 있는 지식이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은 지식이 강한 사람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서 같이 고기를 먹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식이 약한 사람은 나중에 자신의 행동 때문에 신앙에 혼란이 생길 것이고 이 일로 인해 시험에 빠질 것입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순간, 자신이 우상에게 사로잡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식이 약한 사람이 지식이 강한 사람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연약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와 회당과 예배당이 사람을 억압하거나 지식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일으켜주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지식이 사람을 악령들게 만들었고 고린도 교회 지식인들의 지식이 신앙이 약한 사람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억압하고 혼란에 빠트리는 잘못된 지식이었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사람을 억압하고 세뇌시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목사가 범죄를 저지르고 성도들을 억압/세뇌시키고 대형교회가 비리를 저지르고 극단적인 선교단체가 코로나를 확산시키는 한국 뉴스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억압/세뇌시키는 지식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셔서 해방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악령에 걸린 사람을 자유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교회 예배당이 해방의 말씀이 선포되고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일으키는 교회 예배당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식으로 교만한 교회가 아니라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교회,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일으키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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