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출애굽기 33:17-23,  데살로니가전서 1:1-10
창조절,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정해빈 목사

 

옛날 고대 종교들은 눈을 즐겁게 하는 종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집트/가나안에 있는 종교들은 큰 동상/성전을 만들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제사장/무당들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옛날 종교들이 큰 건물을 짓고 화려한 제사장/무당들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래야 권위를 세울 수 있고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종교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쾌락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래서 거짓된 종교일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다른 고대 종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의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윗/솔로몬과 헤롯이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지은 것도 다른 종교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큰 성전과 화려한 제사장/무당들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으니까 초라해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솔로몬과 헤롯은 다른 종교들과 비슷하게 보이려고 예루살렘 성전을 크게 지었고 많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성전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를 위해서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양을 본떠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종교들은 다 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금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독교는 눈의 종교가 아니라 말씀을 귀로 듣는 귀의 종교이고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주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눈의 종교가 아니라 귀와 마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종교보다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다른 종교가 매력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묵상했던 것처럼, 히브리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없을 때 십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에게 나를 위해서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지 말고 오직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주님의 성품만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본받음으로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 번째로 읽은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금송아지 사건이 지난 후에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잘 알고 또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서 네가 요청한 이 모든 것을 다 들어 주마” 약속하셨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최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왕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렸고 홍해 바다를 나누었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주셨고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지금 보여달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기적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일이고 지금 힘드니까 지금 당장 큰 능력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도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성품보다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모세처럼 히브리 백성들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영광/기적/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하나님, 저는 주의 말씀을 귀로 듣고 주님의 성품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으니 저에게 주실 복이 있으면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복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고 내 힘만으로는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영광/축복을 계속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말씀하셨습니다. 얼굴은 볼 수 없고 등만 볼 수 있다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기대하지 말고 등 뒤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성품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며 신앙생활 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얼굴을 따라가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께 실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영광/기적/얼굴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비가 필요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마음을 믿으며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이 와도 자비로운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에 유럽에 건너가서 제일먼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 다음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환난을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서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영접했는지, 어떻게 해서 여러분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6, 9) 여기 보시면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오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는 어느 도시를 가든지 눈에 보이는 우상들과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로마제국이 자랑하는 눈을 즐겁게 하는 우상들을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은혜/긍휼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2000년이 지나고 보니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는 건물/동상/우상들은 다 사라졌지만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긍휼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의 얼굴/영광/기적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며,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만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은 기적이 떨어지면 신앙을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가 풍성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진실하시고 나를 치료하시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귀로 말씀을 묵상하고 마음으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신앙이 가장 복된 신앙입니다. 비록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홀로가 아니요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믿음이 나를 지켜줄 줄로 믿습니다.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거친 세상을 담대하게 헤쳐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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