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네번째 주일
욥기 42:1-6, 마가복음 10:46-52
창조절,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욥기 42장은 욥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마지막 장이기 때문에 욥기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욥의 고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본래 흠이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고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향해서 욥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사탄이 욥이 의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고 만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면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욥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았습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과 가족과 자녀를 잃었고 부인은 떠났고 병까지 얻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면 아무리 경건하고 믿음 좋은 욥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사탄은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이유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만약 축복이 사라지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사탄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생각과는 달리 욥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욥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원망은 했을지언정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어서 속히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의 억울함을 들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한 사탄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만약 우리가 욥처럼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두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할 수도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탄식하고 하소연하였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욥기를 보면 3명의 친구와 1명의 신학자가 등장해서 욥과 논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3명의 친구들은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욥은 세 친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받을 정도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엘리후라는 젊은 신학자가 등장해서 세 친구의 주장도 틀렸고 욥의 주장도 틀렸다고 말을 합니다. 욥이 고난받는 것은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욥을 연단시키기 위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를 연단/훈련시키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고 젊은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3명의 친구보다 젊은 신학자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 젊은 신학자의 말에도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연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신다는 말이 그럴 듯하지만 그런 말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지금 내가 욥처럼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와서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너를 연단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셨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어주고 나를 가만히 안아주고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이 훨씬 더 힘이 됩니다.

욥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과 싸우다보니 너무 많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내가 세상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이제까지는 주님을 귀로 들었는데 이제 두 눈으로 주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이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무언가를 깨닫고 감사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욥이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을 보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욥은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버리지 않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자신을 잊지 않고 나타나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욥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나의 고난과 원망과 탄식을 다 듣고 계셨구나, 욥은 이 사실에 대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두번째로 욥은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말을 말을 인정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이 죄 때문이라는 세 친구의 말이나 연단을 위해서 고난이 필요하다는 젊은 신학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손을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욥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는 욥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욥이 감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주님께서 자신을 잊지 않고 계셨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고 나와 항상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슈퍼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을 다 막아주시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마치 무당이 부적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모든 나쁜 것을 막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적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내가 운전을 함부로 하면 사고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슈퍼맨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당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주십니다. 슈퍼맨처럼 힘과 능력은 많지만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보다는 힘과 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와 항상 동행하는 아버지가 자녀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욥은 하나님은 전능하지만 자신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진실하시고 자신의 고통을 헤아리시고 자신과 동행하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당장 큰 기적을 일으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아시고 내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고난받는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의 원망을 다 들어주시고 나에게 질문하시고 대화하시는 주님을 통해서 욥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고난받을 때는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고난받을 때 나를 버리지 않고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욥은 자신과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0장은 앞이 보이지 않는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소경이 된 것은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를 향해서 조용히 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을 정죄했던 욥의 친구들과 바디매오를 꾸짖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들이 바로 영적인 소경들이었습니다. 욥과 바디매오가 고통당한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불완전한 피조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두 눈으로 보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은 욥처럼, 예수님을 만나 눈이 뜨게 된 바디매오처럼, 두 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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