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 11월 네번째 주일
마태복음 25:31 – 46
창조절,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정해빈 목사

 

우리 교회가 속한 캐나다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1925년 캐나다감리교회, 캐나다장로교회 70%, 캐나다회중교회가 합쳐서 시작된 캐나다 최대 개신교단입니다. 당시 캐나다 개신교는 여러 교파들이 난립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개 교단이 합쳐서 캐나다 사회를 영적/도덕적으로 바르게 이끌고 이민자들에게 선교하기 위해서 캐나다연합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캐나다 사회에 좋은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가 다문화정책, 전국민의료보험, 사회정의, 성소수자 인권, 환경과 복지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캐나다 정부도 이러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올해가 교단 창립 95주년이 되고 2025년이 되면 캐나다연합교회 출범 100주년이 됩니다. 최근에는 캐나다 개신교 최초로 흑인 목사가 캐나다연합교회를 대표하는 총무로 선출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단은 “인종차별 없는 교회, to become an anti-racist church”를 교단의 목표로 정했습니다. 이 목표에 따라서 총회와 위원회와 지역회와 교회에서 인종과 성별을 배려하고 다양성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없는 교회를 교단의 목표로 정했다는 이야기는 뒤집어서 말하면 아직도 교회 내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직도 크게 3가지 차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인종차별이고 두번째는 성차별이고 세번째는 원주민차별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백인들이 자신들이 가장 우월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습관적으로 경솔하게 여성을 비하하고 희롱합니다.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정착했던 원주민을 미개인 취급합니다. 이 3가지 차별에 모두 해당되는 사람이 원주민 여성들인데 지금도 많은 원주민 여성들이 살해당하거나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인종차별, 인종 선입관에 대한 예는 우리 주변에 아주 많이 있습니다. 교회 건물 스테인드글라스에 그려진 예수님 얼굴을 보면 모두 똑같이 백인 얼굴입니다. 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보면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백인 얼굴을 한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활동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얼굴이 동양인이나 흑인의 얼굴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영국 BBC 방송은 고고학자들이 상상하는 예수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TV에 등장하는 백악관(White House)의 주요 인사들은 몇몇 백인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백인 우월주의를 드러낼 수 있을까 놀랍기만 합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 아버지와 인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아시아/여성의 장벽을 뚫고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는 “내가 바이든 행정부의 첫번째 여성일지는 모르나 마지막은 아닐 것이며 오늘 밤 이것을 보고 있는 모든 어린 소녀들이 미국이 ‘가능성의 나라’란 것을 알게 될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 흑인 정치 평론가/변호사 벤 존스는 대통령 선거 소감을 묻는 CNN 방송사 대담에서 “당신이 무슬림이라면 미국 대통령이 당신이 미국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이 이민자라면 미국 대통령이 당신의 아이를 빼돌리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추방할까봐 겁내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부터는 백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주눅들지 않고 숨 쉴 수 있어서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종차별/성차별/원주민차별의 문제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은 종말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불러서 양에 속한 사람들은 오른쪽에,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마태는 말합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의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에게 그렇게 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말하니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언제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양과 염소에 속한 사람들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은 착한 사람들이고 염소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양에 속한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친구처럼 대하였고 염소에 속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는 잘 하였지만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같은 무리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같이 어울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얼마나 친구가 많은가, 얼마나 사교적인가 이런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지극히 작은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지극히 작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성화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키 크고 잘 생긴 백인 얼굴을 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님의 얼굴을 만나려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노예해방운동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쓰레기 청소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전염병이 확산되니까 여러분이 하는 일은 의사들이 수술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 생필품을 배달하는 사람들, 병원과 요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처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우리들 모두를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서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보니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양과 염소로 나누시고 칭찬할 사람은 칭찬하고 책망할 사람은 책망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니 오늘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땅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칭찬받을 사람은 칭찬받을 것이고 책망받을 사람은 책망받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을 친구로 대하는 사람, 지극히 작은 사람을 돌보고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에는 아직도 인종차별과 성차별과 원주민차별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더 가난해지고 더 삶이 힘들고 불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시선이 항상 낮은 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되고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