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 윤혜림

대림절 두 번째 주일 / 12월 첫 번째 주일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이사야서(Isaiah) 11:1-10 로마서(Romans) 15:4-13
윤혜림

제가 신학을 열 아홉 살때부터 죽 공부하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분들에게 신앙에 관한 질문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는 머리를 하러 미용실에 가서 기다리는 동안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설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용사 선생님께서, 손님 지금 뭐하고 계시나요, 하시기에, 아, 예, 저 지금 설교준비 합니다, 했더니 눈을 똥그랗게 뜨시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참 많이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학을 계속 공부하다 보면, 신앙이 확실히 더 깊어지나요?” 그에 대한 제 대답은 이랬습니다. “깊어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제 신앙은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생각할 때 주로 수직적인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긴 시간, 저는 신앙을 말뚝에 비유해 생각하곤 했습니다. 신앙이 더 튼튼하고 깊게 자리잡을 수록 좋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삶에 어떤 변화가 있고 다른 이가 뭐라 해도 영향을 받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신앙에는 수직적인 면모도 있지만, 수평적인 면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직적인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로 대표됩니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고, 주님을 기뻐 찬양하고, 환난 중에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수직적인 신앙의 면모입니다. 그리고 이 수직적인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면모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수직적인 신앙만 가지고는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삶,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수직적인 관계를 넘어,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를 알아가고 이해하고 시선을 넓히는 수평적인 신앙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수평적인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셨는 지를 더 정확히 알아가게 됩니다.

대림절 두번째 주일인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할 삶의 자세는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11장 1절에서 5절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선지자는 메시아가 이새의 줄기, 곧 다윗 가문에서 탄생 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선지자는 왕이었던 다윗이 아니라, 농부였던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메시아의 뿌리로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메시아가 왕의 신분이 아닌 보잘 것 없는 신분으로 세상에 오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너진 다윗 가문에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오셨으며, 멸시 받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웠습니다. 우리의 메시아는 높은 신분, 존경받는 자, 부유한 자가 아닌, 낮은 신분, 차별 받는 자, 가난한 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우리는, 예수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었는지를 묵상하며, 그리스도교의 뿌리는 부유하고 고고한 것이 아닌 가난하고 보잘 것 없음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또한 3절에서 선지자는, 메시아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그 대신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대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바르게 논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배우지 못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온 백성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세리장 삭개오를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을 제자로 삼으셨고,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을 구해 주셨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 귀신 들린 사람, 각색의 병든 자들을 찾아 가셨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 오늘날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실까요?”

인생의 끝자락으로 내몰려 자신이 원치 않는 일들도 하고 있는 자들, 타고난 인종, 성별, 정체성, 장애, 가정 형편 등의 이유로 차별 받는 자들, 세상의 멸시와 비난을 받고 있는 자들, 우리가 홀대하고 무시하고 있는 자들,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을까요?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오셨으며, 어떤 일들을 누구와 함께 하시다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셨는지를 정확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디에 시선을 돌리고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가 보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11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에, 즉, 메시아의 통치가 실현된 그날에,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

메시아의 통치가 실현된 나라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이 세상의 가장 큰 죄악, 즉, ‘분리됨’이 세상에서 마감될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서로를 적대하고 해하던 세력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평화와 공존의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암소와 곰이 서로의 벗이 되는 세상.. 젖먹이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안전한 세상..  이런 세상이 상상이나 가십니까?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면 그게 계속 사자 인건가요?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면 소통은 어떻게 할까요? 이 평화의 세상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약육강식의 관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는 ‘분리’라는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어떻게 ‘분리’의 죄를 극복하고 메시아의 통치가 실현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제공합니다:“서로 받아드립시오.”

로마서 15장 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 중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일. 바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약한 자들, 멸시 받던 자들, 차별 받던 자들 뿐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인종과 문화에 속했던 자들, 즉 낯선 이들 또한 받아들이셨습니다.

로마서 15장 8절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할례는 이방인과 구별되어 선택 받은 선민의 상징으로 실시되어온, 유대인의 약속과 특권의 표시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유대 사람이셨음을 지칭하는 동시에,메시아임을 확증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어 바울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이방사람들도 그 긍휼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인 예수가 이방사람들에게 손을 뻗쳐, 그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이어 바울은 이사야서 11장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 사람들 또한 구원의 역사안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비유대인인 우리 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가장 깊은 곳에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 낯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뿌리 깊게 박혀 있습니다. 낯선 이들, 나와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한 부분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갈등관계에 있었습니다. 문화는 말 할 것도 없고, 따르는 법도도 달랐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견해도, 인종도, 그리스도인으로써 신앙의 모습 또한 달랐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예수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죄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바로 혐오 문화입니다. 이 혐오야 말로, 나와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리’라는 죄악에서 파생된 죄입니다.

우리는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정치전략으로 한 국가의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유색인 혐오,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혐오의 감정으로 동의를 이끌어내는.. 그리고 그것이 통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굴러가는 세상이지요.

그리고 혐오는 정치, 사회에서만 보여지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분리’의 죄로 인해 무의식 중에 우리 일상 곳곳에서 많은 이들을 혐오하고 정죄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토론토에 왔을 때 가장 놀란 것은 노숙인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살고, 깨끗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도시에, 복지체제가 잘 되어있기로 유명한 이 나라에, 어쩜 이렇게 노숙인들이 많을까. 그들의 삶이 너무나 딱하고 안타까우면서도, 저는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일하지 않을까? 거리를 지나다 보면 구인광고도 많이 있던데, 직장을 구하면 되는 것 않나? 정부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복지체제를 마련해 주었을 텐데, 왜 저들은 계속해서 저런 삶을 살고 있을까?

그러나 곧, 저의 시선이 얼마나 좁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광고회사를 다니며 일년에 12만달러를 벌던 한 사람이 갑자기 직장을 잃으면서 길거리에 내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능력 좋으면, 다시 직장을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했는데요. 틀에 갇힌 생각이었습니다.

직장을 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서류를 준비하고, 시간을 내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인터뷰를 거쳐서 직장을 구하죠. 몇 날 며칠 컴퓨터 앞에 앉아 서류를 준비하고, 인터뷰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멀끔한 정장을 구입하고 때를 빼고 광을 내고 인터뷰에 갑니다. 그렇게 해도 직장을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컴퓨터가 없다면 어떻게 서류를 작성할까요? 따뜻하게 자고 일어나 말끔하게 씻을 집이 당장 없다면, 어떻게 인터뷰를 준비할까요? 입고 있던 옷 달랑 하나, 이미 더러워지고 헤졌는데, 이런 모습으로 구인하는 곳에 가면, 받아주기나 할까요?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쓰는 컴퓨터, 깨끗한 물을 쓸 수 있는 자유, 학교와 일자리에 가기 전에 머리를 빗고 옷 매무새를 정돈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두 나의 특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배우자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길거리에 나앉은 경우도 있었구요. 어릴 적 학대를 경험하며 약물중독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애초에 교육 받을 기회가 없었어서 직장을 구할 상황 조차 안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정은 정말 다양했고, 제 시선은 정말 좁았습니다.

여전히 토론토에는 약9200명의 노숙인들이 매일 밤 머물 곳을 찾아 헤맨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주거지는 이미 98% 이상이 찼고, 주거 보조금을 기다리는 이들은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내 삶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판단할 때,  그래서 큰 구조를 보지 못할 때, 우리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듣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의 편견은 사실을 가리고, 타인을 비인간화하고, 우리를 낯선 이들로 부터 더더욱 분리시킵니다.

세상은 참 넓고, 사람들의 삶의 형태 뒤의 이유는 참으로 다양한데, 내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사정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기 전에 편견으로 타인과 나의 삶을 분리시키고 판단하게 되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우리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멈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그 낯선 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가치관과 나의 시선으로 그들을 판단하되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낯선 이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낯선 이들의 삶에 공감해 보면서, 내가 저 사람의 삶을 산다면 그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를 고민해보고,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게 하려면 이 세상은 어떠해야 할까를 고민해보고 구조를 바꾸어 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성도 여러분, 혐오로 물든 이 문화, 분리의 죄가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사는 세상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합니다.  그 세상에서 늑대는 자신의 가장 큰 욕망을 내려놓을 것이며, 어린양은 늑대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서로를 먹이로 혹은 적으로 생각하며 편견을 가지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늑대이자 어린양 입니다. 우리 중 누구 하나도 늑대 이기만 하거나 어린양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이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강자이고, 어떠한 부분에서는 약자입니다. 저는 유색인, 외국인,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이 캐나다 사회에서 약자이지만, 교육수준과 성정체성, 장애여부에 있어서는 누군가에게 억압이 될 수 있는 강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늑대로써 우리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부분은 무엇이고, 어린양으로써 극복해야 할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부분에서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떤 두려움을 극복하며, 어떤 편견을 내려놓으시겠습니까?

예수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삶을 사셨는지를 아는 사람, 그리고 그를 따라 편견을 내려놓고 삶의 방식을 바꾸어 낯선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을 말합니다. 각자가 수직적인 신앙만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 갇혀 서로로부터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인 신앙 또한 가지고 낯선 이들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세상. 그럼으로써 사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다시 쓰여지고, 그리스도의 본질이 실현되는 그 세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그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삶의 방식을 바꾸고 두려움을 극복해가며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는 알파한인연합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 안에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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