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대림절 두번째 주일 / 12월 첫번째 주일
말라기서 3:1-4, 누가복음서 1:72-79
대림절,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정해빈목사

 

종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종교는 오랫동안 인류의 삶을 의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치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경제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면 종교는 삶의 의미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각각의 종교가 인류에게 공헌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불교, 이슬람교, 유대/기독교 모두 각각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유대/기독교는 어떤 가르침을 통해서 인류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을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기독교가 인류에게 가져다 준 좋은 가르침 중의 하나가 기다림의 신앙, 고난을 극복하는 희망의 신앙입니다. 불교가 내 안의 욕심/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고 이슬람교가 신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다면 유대/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신앙, 고난 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기다리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하는데, 종말론은 세상 마지막 날, 지구가 망하는 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 창조가 완성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대/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고 미래를 향해서 전진하는 직선적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희망을 노래하고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입니다. 절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을 가리키고 희망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붙잡고 기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많은 인내와 노력을 요구합니다. 희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쳐서 포기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힘과 에너지를 모으면서 더 열심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을 때 포기할 것이냐 아니면 그럴수록 힘과 에너지를 모아서 더 열심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는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굳건하게 믿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굳건하게 믿고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만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땅이 매이면 하늘도 매일 것이고 땅이 풀리면 하늘도 풀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늘도 응답합니다. 땅이 먼저 움직여야 하늘도 움직입니다. 미래의 희망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땀과 노력을 흘리면서 최선을 다해서 문을 두드릴 때 희망의 문은 마침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릇에 물이 조금씩 떨어지다가 때가 되면 그릇 위로 물이 넘치듯이 기다림의 과정을 차곡차곡 준비하며 힘과 에너지를 모으는 사람만이 때가 되었을 때 기다리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은 기다리는 신앙, 미래를 희망하며 땀 흘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런 신앙을 배운 사람은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유대/기독교는 포기하지 않는 신앙,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1885년 독일 유대인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이 사람은 2차대전 때는 나치 정권을 피해서 유럽을 떠돌아다니면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고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동독에서 늦은 나이인 57세에 처음으로 교수가 되었지만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아서 10년 만에 교수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종차별과 정치적인 박해를 겪으면서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20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서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에른스트 불로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두려움을 물리치고 미래를 상상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맞서 싸운다. 이 때문에 희망은 본래의 인간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을 통해 현실의 억압이 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피하기는커녕 무엇이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뚜렷하게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은 현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것을 합친 것이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을 정확하게 볼 뿐만 아니라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믿음/지혜/용기/상상력/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희망하는 사람만이 지금의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말라기서를 보면 말라기 선지자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는 대략 BC 450년경 히브리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활동했는데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가 심했습니다. 그래서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특사/전령/메신저를 세상에 보낼 것인데 그 특사가 하나님의 길을 닦을 것이고 세상의 불순물을 제거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부패하고 타락한 레위 자손과 제사장들을 깨끗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특사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데 그 특사가 세상의 죄악을 바로잡고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데 말라기가 살았던 시대는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 앗시리아/바벨론/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라기 이후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약 400년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백성들을 깨우쳐 줄 선지자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래를 포기하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말라기서를 읽어보면 미래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식민지 백성으로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면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올 것이니 절대로 역사를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말라기서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유대교 신앙이 희망의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누가복음서 1장은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가 요한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부른 노래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인데, 아가야 너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예언자가 되어라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임을 스가랴는 노래하였습니다. 스가랴는 1장 78절에서 메시야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우리도 스가랴처럼 메시야가 오셔서 오늘날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삶의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밝은 해를 비추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쯤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독일처럼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희망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희망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인종차별과 정치적인 박해를 받으면서도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블로흐, 말라기, 스가랴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물려준 기다림의 신앙, 희망의 신앙, 약속의 신앙을 기억하면서 대림절을 묵상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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