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야기 2 / 유상진 목사

성령강림절 아홉번째 주일/ 7월 다섯번째 주일
두 개의 이야기 2
창세기(Genesis) 29:15-28, 로마서 8:26-39, 마태복음 13:31-33, 44-52
유상진 목사

한 2주 전인가요? 예배가 끝나고 로비에서 다과를 나누면서 교제하잖아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몇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마중 편에 앉으신 이정숙성도님의 말씀을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당신은 성서의 이야기 중에 제일 재미난 이야기가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라고 그러시더라고요. 이정숙성도님의 말씀을 기억나는 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야곱은 삼촌의 두 딸 중에 예쁘게 생긴 동생 라헬에게 장가들려고 7년을 일했는데, 못생긴 언니가 시집을 못 갈까 봐, 그 아버지가 밤에 몰래 신부를 바꿔치기했다.”는 겁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정숙성도님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깔깔 웃으시던 얼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성서일과 구약성서의 본문은 이정숙성도님께서 제일 재밌어하시는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저는 이정숙성도님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레아가 못생긴 여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29장 17절에, “레아는 눈매가 부드럽고,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뭐 라헬이 예쁜 거야 알겠지만 레아의 눈매가 부드럽다는 말이 못생겼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제가 알아버렸습니다. 사실 저의 집사람이 제 외모에 대해서 유일하게 칭찬하는 게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레아와 똑같습니다. 눈매가 부드러워졌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눈매가 아주 무서웠는데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져서 좋다는 겁니다. 누가 어떤 여자아이를 보고, “아이고 얘는 발이 조그맣고 아기자기한 게 발이 천생 여자네.” 그러면, 그것은 못생겼다는 말입니다. 뭔가 칭찬할만한 외모가 없는 거지요. 레아의 눈매가 부드러웠다는 건 못생겼다는 말입니다. 제가 알아 버렸습니다. 야곱은 못생긴 레아보다 예쁜 라헬을 더 좋아했던 거였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무임으로 7년 동안 삼촌의 일을 할 것이니, 7년이 지나면 라헬과 결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2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일을 하였지만,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칠 년이라는 세월을 마치 며칠같이 느꼈다.” 야곱은 그만 사랑에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오늘 이정숙성도님께서 제일 신나 하시는 신부 바꿔치기는 며칠 같은 칠 년을 보낸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두 딸의 아버지는 정말 못생긴 큰딸 레아가 혹시 시집이라도 못 가면 어쩌나 하고 작은딸 라헬과 바꿔치기를 한 겁니다. 23절에, “밤이 되었을 때에, 라반은 큰딸 레아를 데려다가 신방으로 들여보냈는데,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레아와 동침하였다.” 계속해서 25절에, “아침이 되어서 야곱이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보자면, 그동안 남을 잘도 속여 먹었던 야곱이 보기 좋게 속은 겁니다. 참 꼬십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이야기를 놓고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게 가능한 일인가?’였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 그런가 궁금해서 저에게 눈매가 부드럽다고 칭찬해 주셨던 아까 그 여성분에게도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이 여성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도 소박한 꿈을 간직한 여성입니다. 그게 어떤 꿈이냐? 키 큰 남자한테 한번 매달려 보는 게 이 여성분의 꿈입니다. 그 정도로 음란마귀가 쓰인 분입니다. 저랑 생각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며 물어보았습니다. “수희야, 어떤 남자가 데릴사위처럼 딸 둘 있는 집에서 7년 동안 그 집안의 사업을 도우면서 살았는데 어여쁜 작은딸하고 정분이 나서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 거라. 결혼식을 치르고 피로연에서 여기저기 권하는 술을 흥건히 마셨겠지? 이제 첫날밤에 신부를 맞이하는데, 갑자기 숙소에 전기가 나가서 완전히 깜깜해진 거라. 그런데 이 신랑의 처형이 깜깜한 통에 자기 방을 못 찾고 그 신방에 가서 누웠는데, 둘이 그냥 뭣도 모르고 그렇게 첫날밤을 요래요래 보내게 된 거라. 이게 말이 되나?”하고 물었습니다. 그 여성분의 첫마디가 이거였습니다. “술이 웬수네, 술이 웬수야!” 아, 역시 음란마귀가 쓰인 분의 접근법이 달랐습니다. 술 좋아하는 저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요. 그런데 바로 뒤이어 나오는 말이 저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어쩌구저쩌구… 결론은 말이 안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결혼을 약속하고 7년을 무임으로 일하면서 연모했던 여자입니다. 더구나 그 여자의 언니와는 몸매도 용모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달랐을 겁니다. 아무리 칠흑처럼 깜깜하고, 술도 한잔 걸쳤다 해도, 첫날밤에 자신의 신부도 몰라보고 잠자리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실 이런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중요한 성서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이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성서일과의 말씀이 동화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가 왜? 동화가 아닌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PPT 영상을 보면서 설명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영광의 그날이 올 때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합니다. 그리고 이 본문의 평행절인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에는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똑같은 청탁을 합니다. 두 개의 이야기가 다 같은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직접 청탁하고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의 이름이 쏙 빠지고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등장해서 예수님께 청탁합니다. 여러분, 이 두 이야기 중에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긴가요? 사실 여기서는 누가 예수님께 청탁했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인간의 행위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거지요. 성서를 지엽적으로 읽으면 미궁 속에 빠지는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저 저작된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주후 64년과 70년 사이에 저작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요, 주후 8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저작된 것으로 봅니다. 최소 10년에서 최대 30년 정도의 시간 차가 있는 거지요. 우리는 이 두 개의 복음서에 나오는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아, 이 20년 사이에 사도들의 권위가 강화되었다.’는 것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2000년의 기독교 유산도 함께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서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라서 제가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이 속한 모세오경은 전승 기간이 더 길었겠지요? 당연히 긴 만큼 변형이나 중복, 편집 같은 상이점들이 더 많이 보입니다. 제가 입버릇처럼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신학교를 뒷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신학의 “신”자도 모릅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목사님들의 발뒤꿈치도 못 따라가지만, 그래도 제 나름의 성서를 읽는 방식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가려읽기”, “빼서읽기”, 혹은 “붙여읽기”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걸 저랑 한번 해 보는 겁니다. 자 여러분, 오늘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29장 23절에서 25절 상반절까지 읽겠습니다. “23절, 밤이 되었을 때에, 라반은 큰 딸 레아를 데려다가 신방으로 들여보냈는데,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레아와 동침하였다. 24절, 라반은 여종 실바를 자기 딸 레아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25절, 아침이 되어서 야곱이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자 여러분, 여기서 “가려 읽기”를 하겠습니다. 24절을 이렇게 가렸습니다. 읽어 보겠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에, 라반은 큰 딸 레아를 데려다가 신방으로 들여보냈는데, 야곱은 그것도 모르고, 레아와 동침하였다. 아침이 되어서 야곱이 눈을 떠 보니, 레아가 아닌가!” 여러분, 원래 본문이 자연스럽습니까? 아니면, “가려읽기”한 본문이 더 자연스럽습니까? “가려읽기”한 본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니까 24절의 경우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가 이 구절을 삽입했다는 거겠죠? 이번에는 이 24절을 “붙여읽기” 해 봅시다. “라반은 여종 실바를 자기 딸 레아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요걸 저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 붙여 읽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28절 하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레아와 이레 동안 지내고 나니, 라반은 자기 딸 라헬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 여러분, 우리가 29절을 읽지는 않았지만 어떤 말씀이 올지 예상할 수는 있습니다. 예상되세요? 예, 같은 패턴으로 24절을 “붙여읽기”하면 됩니다. “라반은 여종 실바를 자기 딸 레아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실제의 29절이 이렇습니다. “라반은 여종 빌하를 자기 딸 라헬에게 몸종으로 주었다.” 예, 예상대로입니다. 그러니깐, 누군가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의 말씀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편집한 겁니다. 사실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에서 몸종들을 굳이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레아와 라헬, 그리고 빌하와 실바까지 이 네 여성이 함께 등장해야만 하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겁니다.

 

혹 어떤 분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성서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뭐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서는 단순한 역사가의 진실 찾기 저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입니다. 수평적인 인간의 이야기 속으로 수직으로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간섭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서입니다. 여러분, 오늘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한 번 보십시오. 저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상업도시 밧단 아람, 거기서 주류들이 종사하는 무역업에서 밀려나 어렵사리 목축업에 종사하며 두 딸을 키우는, 특히 못생긴 큰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어떤 아버지 라반을 보십시오. 눈매가 천생 여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그 흔한 연애도 한 번 못 해 보고, 노처녀가 된 레아를 보십시오.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남자들이나 하는 목동 일도 해야만 했던 작은딸 라헬을 보십시오. 도망자 신세로 그 집안에 들어가 사랑하는 한 처녀를 얻기 위해서 무려 14년 동안 무임으로 일하는 야곱을 보십시오. 그리고 이 두 딸의 몸종으로 야곱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던 두 여성까지 그야말로 한판 세상입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이 땅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한 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두가 오늘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 속으로 모여서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12지파의 기원을 정당화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 말씀이 그렇습니다. 야곱과 네 명의 아내들이 열두 아들을 낳는 이야기의 기원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만나게 됩니다. 마치 각자의 날줄이 씨줄을 만나서 새로운 옷감을 짜내는 것처럼요. 그것을 로마서 9장 10절 이하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10-12) 이렇게 하신 겁니다. 성서의 말씀은 이렇게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화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베틀의 씨줄과 날줄이 만나서 고운 세모시가 지어지고, 펼쳐져서 거기에 온통 휩싸입니다. 한낱 인간의 진정성도 다 덮이고 맙니다.

 

저는 오늘까지 알파한인연합교회 5주간의 설교를 맡았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설교입니다. 저는 때마침 오늘의 성서일과 본문으로 말씀을 마칠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여기 계신 형님들, 누님들, 그리고 어르신들은 까마득한 저의 이민 선배이시기도 하고, 또 인생의 선배님들이십니다. 우리의 연수로 보아서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맨몸으로 태어나 살아온 연수만큼 돌아보면 여울지는 추억도 많을 겁니다. 지금 잠깐만이라도 여러분의 지난 한날만 회상해 보십시오. 당장에 이 캐나다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던 그 순간, 그 풍경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첫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던 그 순간, 그 시절 한 번 회상해 보십시오. 지금 당장 내 삶에 가장 아팠던 생채기 한 번 끄집어내어서 만져 보십시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오래된 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한숨처럼 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a) 제가 지난 5주간 동안 은색면류관을 쓰신 여러 어르신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은 여러분께서는 이 고백을 가장 절절하게 하실 수 있는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오래된 고백은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회상입니다. 마치 베틀의 날줄이 씨줄을 만나는 것처럼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나서 이루어 낸 옷감, 그것이 무명 저고리든지, 명주 치마든지, 세모시 옥색 치마든지 상관없습니다. 현재 내가 입고 있는 은혜의 옷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자신의 가진 소유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비교하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뭐 예수 믿어도 별거 없네.”, “하나님 믿어도 똑같이 늙고, 똑같이 병드는데 뭐”, “나는 하나님 없이도 지난 한 생을 아주 만족스럽게 잘 살았는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정말 정력적으로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다 맞는 말 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잘 살면 80년 90년 세월을 삽니다. 그 짧은 육신의 삶이 전부 다라고 여기면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고, 경험하는 생명은 이미 그것을 넘어선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 본문의 말씀은 이 생명의 영속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 이하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8-39절)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깊음도, 높음도, 어떤 권세도, 지금의 어떤 것도, 미래의 그 어떤 것도, 하늘의 천사라도, 우리의 알량한 삶도, 마침내 우리의 죽음까지도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한 예수님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거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발견한 겁니다. 그것은 인카네이션,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의 역사 안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사건입니다. 수평적인 인간의 역사,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반듯이 맞아야만 하는 죽음의 역사를 수직으로 가르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겁니다. 마치 씨줄과 날줄이 만나져서 한 점을 만들 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줄로 굳게 잡아맨 지금의 나는 절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질 수 없다. 오히려 그분은 당신의 아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신다. 여러분, 그 선물이 뭘까요? 지난 주일의 설교를 빌어서 말한다면, 허무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나에게 주실 선물은 뭘까요? 예,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생명이 이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슬며시 질문이 생깁니다. “왜?”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있습니다. 좀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Who am I?”,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제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는 거지요.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지요. 이런 무지막지한 사랑을 왜, 나에게 주실까요?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없어요. 내 구석진 곳의 생각과 아둔한 행동을 생각하면 저는 그런 사랑 줄 생각이 없습니다. 눈곱만큼도요. 그러나 오늘 서신서 28절에는 이 사랑을 발견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요.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좀 편한 말로 하자면, 하나님 마음대로, 그냥 하나님 기분 내키시는 대로 부른 사람이라는 말 아니겠어요.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스스로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29절 이하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29-31a절)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습니다. 마치 베틀로 옷감을 짤 때, 씨줄이 북에 감겨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날줄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모양새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오해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뭐 오해라는 것이 그런 거지요. 틀리게 아는 것도 오해지만, 조금 알고 있는데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오해지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노스욕에 있는 여러 한인교회들을 돌아보다가 지금 여기 알파한인연합교회를 택해서 출석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알파한인연합교회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의 많은 신 중에 하나님을 택했고, 내가 이 세상의 많은 경전 중에 성서를 택했고, 내가 이 세상의 여러 종교 중에 기독교를 택했고, 내가 여러 나라 중에 캐나다를 택해서 이민을 왔고, 내가 여러 한인교회 중에 알파교회를 택해서 지금 여기 앉아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오늘 이 자리, 여기 예배의 자리에 앉게 하신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의 시작에 맞추어서 다 함께 고백했잖아요. “그의 종, 아브라함의 자손아,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시105:6-7) 참 감사한 것은 나는 조석 변이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열두 번도 마음이 더 바뀌는데, 고마우신 하나님을 찾았다가도 조그만 손해 보는 일이 있으면 불평이 가득한 입술로 바뀌는데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 이 세상 어디든 없는 곳 없이 다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 나는 오늘도 여전히 내 손에 들려 있는 것 때문에 주눅 들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기죽어서 시기할지 몰라도,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무조건으로 이 세상의 이전부터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 여러분, 이게 은혜 아니고 뭡니까? 이 사실을 발견한 사도바울이 또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33-35절) 여러분, 이렇게 나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서 마치 불꽃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도 바울의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불꽃 같은 두 이야기의 만남을 여러분의 실존적인 삶에서 발견하셨습니까? 그 교차점에 올곧게 서 계십니까? 앞서 저는 성서가 간혹 현실적이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두 개의 이야기가 만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수평적인 인간의 이야기에 수직으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야곱이 장가드는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선택 이야기가 정확히 교차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요, 로마서의 2000년 전 한 그리스도인의 현실 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정확히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십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서 본문의 말씀은 이 절대적인 것을 발견한 사람들의 체험, 혹은 이 절대적인 것 앞에 선 사람들의 일련의 반응, 태도, 혹은 마음가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3주간 동안 마태복음 13장의 말씀들을 묵상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별명이 “천국장”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십니까?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중에 5개의 비유를 싣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31절과 32절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고요, 33절에는 누룩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건너뛰어서 44절에는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가 나오고요, 45절과 46절에는 상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47절부터 50절까지는 바다에 던진 그물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려면 좀 더 웅장하고, 거룩하고, 좀 특별해 보이는 뭔가로 해야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참 감사하게도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속에 다 숨겨져 있습니다.

 

먼저 31절 이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 씨보다 더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그러니깐 이런 겁니다. 손바닥 위에 놓여진 티끌 같은 씨앗을 보면서 “얘들아, 이것 좀 봐라, 이게 천국이다!” 이러셨다는 겁니다. 손바닥 위에 놓여진 티끌 같은 씨앗 속에서 이미 천국을 먼저 보고 있는 거지요. 이미 하늘 나라의 풍성함을 먼저 보고 계신 거지요. 제가 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한 단어만 고치려고 합니다. 3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사랑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 사람의 삶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되고,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33절의 비유 말씀도 제가 좀 고쳐 읽겠습니다. “하늘나라는 마치 딸바보 친정아버지의 사랑과 같다. 멀리 시집간 그 딸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삶의 이야기 속에 살짝 섞어 넣으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44절도 고쳐 읽겠습니다. “하늘 나라는, 한 청년이 찾은 순결한 처녀의 사랑과도 같다. 그 청년이 그것을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사랑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사랑을 한번도 느끼지 못하는 숙녀가 사랑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이 나타나면 이 숙녀는 가장 아름다운 부끄러움을 빛낸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져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물과 같다. 세상의 모든 물고기는 이 어부의 선택 앞에 놓여 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읽고 보면, 오늘 예수님의 일련의 비유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택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 그리고 마음가짐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가장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마침내 씨줄과 날줄이 만나 한 점을 찍듯이 그 사랑의 줄에 굳게 매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복음서의 말씀의 핵심 주제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나라는 아직은 봉인되어있습니다. 아직은 비밀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비유로만 설명하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이 비밀이라는 말은 드러나지 않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모든 삶은 비밀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저와 동갑네기 오페라가수였던 강세현성도님과 이렇게 함께 예배드릴지 불과 한 달 전에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옆에 계신 분들과 이렇게 예배드릴지 언제 아셨어요? 저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일지 몰랐습니다. 조금만 더 멀리 가서 우리가 다 한국 사람들인데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것을 언제 아셨어요? “나”라는 존재의 태생과 근원을 내가 정했나요?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전쟁의 포화가 자욱한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사람은 저 가난한 아프리카 수단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이 각자 그 나라를 선택한 게 아니라 그렇게 선택 되어 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드러나지 않은 비밀투성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가장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비밀이 곧 하나님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비밀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점점 더 드러나고 있음을 체감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이미 매일 매일 각자의 삶을 살면서 그 절대적인 비밀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천둥처럼 깨닫고, 감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겨자씨 한 알에서 천국을 발견하듯이, 여염집 아낙네의 부엌에서 천국을 발견하듯이, 숱한 사람들의 삶과 일상 안에서 천국을 발견하듯이 내 옆의 선선한 아내의 눈매에서 가장 정결한 생의 원칙을 보는 것이고, 딱지 몇 개와 고무줄 총, 그리고 구슬과 자석 조각이 전부인 우리 아이들의 호주머니 속에서 우주와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렇게 대수롭지도 않고, 어줍지도 않은 자신의 생을 온통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삶 속에 엄폐되어 있었던 겁니다. 몰라서 그렇지, 하늘나라는 이미 여기 나의 삶의 속에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이미 하나님의 이야기는 나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완성되어져 가고 있었던 겁니다. 단지 그것을 느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 당장에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보십시오. 우리 각자는 태어났던 그 시절의 상황이 달랐고, 당연히 자라던 그 시대의 정신이 달랐고, 가정의 형편도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이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한 가지의 공동 행위를 하고 있는 거지요. 여러분, 이 예배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다른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온 사람들이잖아요. 우리 모두는 연배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다른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라는 한 존재로 살아 왔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여기 이 자리에서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예배의 주보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보십시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같은 찬양을 부르고,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그가 택하신 야곱의 자손아! 그가 바로 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가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같은 예배의 부름을 낭독하고, “아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같은 선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우연인가요? 우리가 지금 어쩌다 마주쳐서 이러고 있는 건가요? 이것은 곧 우리 각자가 다 다른 삶의 이야기로부터 전능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야기로 부름 받은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정한 예배의 자리에서 한없는 위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떨 땐 한량없는 기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영혼의 해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기가 천국이 아니고, 뭡니까? 우리의 이 짧은 생애, 나이가 많고, 작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육신이 병들고, 건강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하고, 가난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이 하늘나라를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삶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매일 매일의 똑같은 세상의 이야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안다면, 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절대적인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은 것에 예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 지금까지 내가 이 세상 이야기에서 관심해 왔던 모든 것, 그것이 돈이든지, 명예든지, 권력이든지 상대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상에서 강요받았던 논리는 차라리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오늘 사도 바울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굳게 잡아맨 주의 사랑의 줄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이 주의 사랑의 줄에 매여있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끊어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것이 환란이라도, 그것이 박해나 가난이어도, 혹 그것이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라도요. 여러분, 저는 이 사랑에 매여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요? 저는 내일 새벽 6시가 되면 일어나서 제 분량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또 들어가야 합니다. 키 큰 남자한테 매달리는 게 소원인 어떤 여자처럼 저는 이 사랑에 매달려서 갈려고요. 여러분은 내일 아침부터 어쩌시겠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사랑에 매여 각자 맡은 삶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 가십시다. 그렇게 굳은 살이 못나도, 다시 망치와 정을 잡읍시다. 다시 컴퓨터 자판을 잡읍시다. 다시 운전대를 잡읍시다. 다시 빗자루를 잡읍시다. 다시 펜을 잡읍시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오직 이 사랑에 매달려 걸어가시는 여러분의 이른 새벽의 출근길, 차갑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북미의 새벽바람은 차라리 정금같은 하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정신없이 흐르는 이마의 구슬땀을 닦느라고 올려다본 야속한 태양은 차라리 이 도시에서 오늘도 나를 지키시는 선선한 하나님의 눈동자가 될 것입니다. 바쁜 일상에 쫓겨서 허기진 배를 달래며 먹는 마른 빵 한 조각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 생에 허락하신 가장 거룩한 성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늦은 밤, 천근만근 피곤한 몸으로 퇴근했어도 이런 비루한 나 하나 믿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는 아아, 차라리 거침없는 하나님의 숨결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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