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와 십자가 / 유상진 목사

사순절 첫번째주일/ 2월 세번째주일
창세기 9:8-17, 베드로전서 3:18-22, 마가복음 1:9-15
유상진 목사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 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시가서 “시편 25편 1~10절”
서신서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복음서 “마가복음 1장 9~15절”

간혹 뉴스로 전해오는 세계 곳곳의 갑작스러운 수해 소식은 듣기에도 끔찍합니다. 수리시설이 미비했던 오랜
옛날 사람들에게 대홍수는 얼마나 큰 두려움과 충격을 주었을지 뭐 말할 것도 없겠지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런 대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노아 일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9장까지 장황하게 이어지는 대홍수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무지개 계약입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이 대홍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1656년 2월 17일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창세기 7장 11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아마도 성서의 연대기와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나이를 계산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어떤 이미지만으로 전체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당착입니다. 뭐 성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모두 다 전지적 시점으로 쓰여 있습니다. 뭐 당연히 모세 오경이니깐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썼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노아 홍수 이야기는 모세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글씨 체계가 없었던 시절에는
구전으로 전해져 왔을 것이고, 모세가 전해 내려오는 그 이야기를 썼다면 실제 그 사건을 목격한 최초의
목격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격자는 거의 초인입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심리상태까지 다
파악하고 있는 제 삼의 전지자인 거지요. 성서에 의하면, 노아 홍수 이후에 살아남은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백번 양보해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전한 하나님의 심리상태까지 다
파악한 익명의 전지자가 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전지자는 지동설의 시대에 산 사람입니까? 아니면
천동설의 시대에 산 사람입니까? 뭐 당연히 천동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겠지요. 이 최초의 목격자는 당연히
지구가 구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중력이라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그가 접했던 지중해나 홍해 너머에
넘실대는 대양과 아메리카, 아시아 같은 또 다른 대륙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겁니다. 아니 그런 발견들 말고
교통수단이 없던 그때 그 전지자의 세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을까요? 그가 아는 세계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우리 온타리오주 보다는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논쟁 중입니다.
“전지구적인 홍수이냐? 아니냐?”입니다. 말하자면, “전체 침수냐? 부분 침수냐?”가 그 논쟁의 핵심입니다.
성서의 문자를 이미지화 하고,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논쟁하는 겁니다. 제 생각에는 참 궁색스러운
논쟁입니다.

저는 한국의 부산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자란 교회의 마당, 미남 로터리라고 불리던 흙먼지
날리는 큰 공터, 그 공터의 제일 끝에 있는 개나리 동산, 동산의 왼편에는 만덕고개라고 불리는 가파른 차도가
있었습니다. 그쪽으로는 사람이 다닐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그 산을 넘어
아까 그 만덕고개의 찻길 너머의 윗동네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찻길을 건너는 것이 아니라, 도로 밑에
있는 하수구 수로를 동굴탐험이라는 이름으로 후레쉬까지 켜고 통과해서 윗동네로 가는 거지요. 그 유년 시절
저의 세계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시절에 부산에 유례없는 눈이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5센티 정도가
쌓였습니다. 저는 그때의 뉴스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뉴스 앵커의 말이 부산 지역에 이런 눈이 내린 것이 53년
만의 일이라는 거예요. 그날 아버지가 전한 눈 소식을 듣고, 저는 막내 형님과 날이 밝지 않은 새벽부터 일어나
밖을 나갔습니다. 만덕고개는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고, 아이들의 눈썰매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공터도 어둑한 새벽부터 눈덩이를 굴리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 풍경을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날 저는 하루 종일 온몸이 젖도록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일기장 첫머리 이렇게 적은 겁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그때 제 세계는 거기가 다였으니깐요.
당연히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거지요. 부산의 일부 지역에 폭설이 내렸는데 저는 온 세상이 눈에 덮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것은 단순히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입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겁니다. 그것은 그때 그 시절, 그 상황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노아 방주의 잔해를 찾겠다고 튀르키예 주변의 지역을 탐사하고 다니는 분들이 계시는데 참 딱하기도 합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겁니다. 제가 유년 시절, 폭설이 내린 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라는 일기를 썼잖아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것을 놓고 “전 지구적인 폭설이냐? 아니면 부분 폭설이냐?”를 논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시절 제가 아는 세계는 다 하얀 눈이 덮였습니다. 이것이 거짓입니까? 진실입니까? 이것은
거짓과 진실을 넘어선 다른 세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이미지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전체 침수냐? 부분 침수냐?”가 아니라, 세상이 물에 다 잠겨서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을지 모를 오래
전의 한 자연인이 그의 경험을 그저 속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스러움으로 이해하였는지 그 속내를 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의 하나님 이야기를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것을 좀 종교성을 가미해서 말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지요.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지난 수요일이지요. 2월 14일은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이 성회수요일부터
올해의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사순절은 3월 31일, 부활주일 전까지 이어집니다. 왜 우리가 육순, 칠순
그런 말을 쓰잖아요? 사순절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이 40일을 직설한 것입니다. 주일까지 합하면 46일이
되는데, 주일은 계산에서 제외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사순절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를
기리고, 동참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여느 때와 다른 기도와 묵상, 금식과 섬김의 훈련을 해 왔습니다. 그런
전통의 사순절 첫 주일이 오늘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구약성서의 본문인 무지개 이야기에 주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사순절의 첫
주일에 무지개 이야기가 뭐 호환이 안 된다고 할까요?, 좀 생경스러웠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이 “무지개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사실 무지개와 십자가는 둘이 함께 세워 놓기에도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설교제목을 이렇게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무지개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창세기
9장 12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 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나는, 너희와 숨 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12~13a, 14b~15)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물로 세상을
멸하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조로 이 무지개를 그때 급조해서 만드신 것일까?
그래서 태양의 반대편에 뜬 색동다리 모양의 무지개를 노아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일까? 하는 생각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지개가 노아 이전의 사람들 눈에는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었을까요? 이 무지개가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들어 놓으신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창세기 2장 1절 이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2:1~3) 적어도 이 천지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겁니다. 오늘 노아가 보고 있는 무지개는 이미 노아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언제라도 몇 번이라도 목격해 왔던 그 무지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노아와 노아의 일가족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방주에 태운 짐승들을 제외한 모든
생명이 희생된 대홍수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은 뒤에 바라본 무지개가 새롭게 인식되었다는 겁니다. 그 무지개는
더 이상 그 이전에 바라보던 비 갠 뒤의 단순한 무지개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 무지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미래로 보였던 겁니다. 무지개를 바라보는 노아의 인식이 달라진 겁니다. 여러분,
노아와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구원의 방주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 방주 안으로 모든 종의
생물들이 쌍으로 다 들어갔는데 성서에는 그 안에서 어떤 종의 죽음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방주
안에 있는 동안에 어떤 한 사람도, 어떤 작고 여린 한 마리의 짐승도 병들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주를 떠나라고 하신 겁니다. 그 방주를 떠나라 하신 분은 물론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그 방주 안에 있던 모든 생물들이 방주 밖으로 나왔을 때 이들이 경험한 세상은
어떠했겠습니까? 무지개 빛, 환상의 도시가 펼쳐졌을까요? 아니요, 1년하고도 10일을 더 수몰되었던 도시, 그
흙탕물에 잠겼던 도시가 물이 다 빠진 후에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아마도 폐허,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노아를 그 폐허 위에다 세워 놓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지개를 바라보았다는 겁니다. 그 폐허 위에서요. 방주에서 겨우겨우 나온 노아가 이제 그 폐허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떤 방편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허의 먼지바람을 막기 위해서 몸을 가릴 것을 먼저
구한 것도 아니었고, 이 폐허 위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집을 먼저 지은 것도 아니었고, 지금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먹을 것을 먼저 찾은 것도 아니었고, 노아가 그 폐허 위에서 가장 먼저 한 것은 무지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이 폐허 위에서 노아가 그랬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일과 구약성서의 본문은 이

무지개를 통해서 노아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창9:9~10, 12~13) 1년을 넘게 물 위를
떠다니면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긴 노아의 눈에 무지개는 차라리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였던 겁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창9:11)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운 이 언약 자체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בְּרִית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covenant, 일종의 문자적인
계약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 성서들도 대동소이합니다. 뭐 이견이 없이 다 언약, 계약, 약속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계약이 일반적인 계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계약에는 반드시 조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한 조건입니다.
조건 없이 성립되는 계약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무지개를 증표로 내세운 하나님의 계약에는 그 계약 조건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서에 나오는 여러 계약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을 한 번 보십시오. 모세와 하나님과의
계약을 보십시오.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계약을 보십시오. 그 계약에는 변함없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노아와의
언약에서만큼 하나님은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계약으로 부르기에도 어색할 정도로
일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이 계약의 체결자이고, 노아는 그저 이 계약을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노아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계약! 이것이 바로 오늘 구약성서 본문에 나오는 무지개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대홍수 사건은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 대홍수를
계획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심리상태가 어떻습니까? 창세기 6장 5절 이하에,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주님께서는 탄식하셨다.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창6:5~8)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신 이 세계 전체에 대한 염증이
맹렬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창조 행위를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좋습니다. 뭐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치고, 이 정도 되면 대홍수가 앞으로 절대 없을 것이라는 계약은 최소한 인간이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계약 조건을 걸어야만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조건도 없다면 이미 벌어진 대홍수로 희생된 숱한
생명들은 뭐가 되는 겁니까? 괜히 죽은 겁니까? 거기에는 갓난 아이도 있었을 겁니다. 대홍수의 재난을 내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실수하신 것이라고 판단하신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지신
걸까요? 아니요, 오늘 노아가 바라본 무지개, 곧 하나님의 일방 계약은 하나님의 실수도 아니고, 하나님의
변덕은 더더욱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었습니다. 노아가 그 폐허 위에서 그린 제사의 향기를
맡으신 하나님의 심경이 창세기 8장 21절에 나옵니다. ‘다시는 사람이 악하다고 하여서, 땅을 저주하지는
않겠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하기 마련이다. 다시는 이번에 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없애지는 않겠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하신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노아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일방적인 무지개 계약을 맺으신
겁니다. 무지개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요전에 저희 큰아들에게 편지 하나를 썼었습니다. 코업을 다 마치고 이제 마지막 학기에 있는 애가 며칠 잠을
설쳤다는 거예요. 상급학교의 진급을 위한 시험을 봤는데, 만족스럽지 못하게 봤나 봐요. 그래서 속이 상해서
밤잠을 설쳤다는 얘기를 하는 거지요. 제가 편지에 섰습니다. “···전략··· 지난 주간에 네가 집에 와서 한참을
얘기했던 그 시험, 그것 때문에 며칠째 잠을 설치면서 화가 났다는 너의 말을 듣고, 미안하지만 나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뭐 그런 거지, 그런 쓰린 일도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지. ···중략··· 모르겠다. 나의
주변 지인들이 너처럼 유망한 아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지도 못하는 나를, 아직도 아파트의 월세를 전전하는
나를 한심해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낯선 사실 앞에 설 때가 많았다. 그것은 정직하게 거리를 두고
보아도, 정작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배고파하고, 더 목말라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온통 거기에
정신을 쏟고 나면, 정작 중요한 사실을 못 보는 것 같다. 그것은 곧 내가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존재이다. 그것을 발견한다면, 더 배고파할 일도, 더 목말라할 일도, 더 속상해할 일도 없다.
사랑하는 나의 큰아들 유민혁아, 이제 세상과 막 맞서면서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거둘 텐데, 그때마다 너무
조바심치면서 살지 말아라, 안되는 것 속상해하지도 말아라. 네가 그리 대단하지 않아도, 네 엄마와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한계와 제한이 뚜렷한 너의 엄마나 나도 이럴진대, 하늘의 하나님은 오죽하실까! 그
존재의 발견은 네 마음의 폭과 깊이에 달려 있다. 간신히 네 한 몸이 아니라, 그럭저럭 너의 처자식과 형제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와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라. 네 엄마와 나는 네가 꼭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너의 엄마와 나에게서 세계이기 때문이다. ···후략···” 제가 요 최근에 저의 큰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을 읽은 이유는 이것을 묻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나를 살게 하고 있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나에게 생명을
허락하고 계신 어떤 존재,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느끼십니까? 노아의 찬란한 무지개 경험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사십일 밤낮으로 비가 쏟아졌습니다. 마치 하늘의 홍수 문이
열린 것 같고, 땅의 모든 샘이 다 터진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무려 삼백일흔다섯 날 동안 목숨을
건 표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지상의 모든 생명이 쓰러진 그 폐허 위에 서서 자신의 눈으로 찬란한
무지개를 보는 겁니다. 여러분, 노아의 눈에 그 무지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자신을 살게 하는 또 다른 전적인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 그것을 발견한 겁니다. 노아는 그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 행복한
겁니다. 제가 저의 큰아들에게 편지한 대목과 똑같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 자체를 행복해한다면, 그것처럼
확실한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요?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살게 하는 그 존재의 확실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풍요롭게 살아도, 아무리 넘치게 살아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아니 오히려 더
불행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노아의 대홍수 이야기를 전승해 오고 자신들의 신앙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 신앙으로 40년 광야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포로 시대를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사람이 개똥밭에 굴러도
어떻게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한편으로는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팔십년,
구십년, 백년을 살다가 죽는데 그 사는 동안 고생고생하다가 죽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 서신서의 말씀이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약속은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주어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존을 보장받는 데에 머무는 게 아닙니다. 이 약속은 종국에 밝히 드러날 하나님의
궁극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 약속이 노아의 무지개
약속과 같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단 하루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거나, 헌금을 많이 내야 한다거나, 잘 생겨야 한다거나, 돈이 많아야 한다거나, 그 누구보다 착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계약은 그 노아 시대에 악행을 저질러서 홍수로 몰살된 사람까지
소환하고 있습니다. 19절 이하에, “그리스도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에까지 내려가서 구원을 선포하셨다는 것은 노아를 통한 무지개 계약이
전지구적인 계약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한 십자가의 계약은 전우주적인 계약이라는 거 아니겠어요? 마치 태양이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고 비추는 것처럼, 마치 산의 기슭과 골짝과 그 사이로 흐르는 냇물까지, 그렇게 온
우주까지 샅샅이 비추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자신의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세례예식을 오래전의 노아의 홍수에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이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3:21)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오늘 이 십자가의 약속이 그때 거기 베드로 사도가 목회하는 교회에서만의
약속이겠습니까? 이 십자가의 약속은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들을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노아가 자신의 삶에서 무지개를 인식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이 십자가를 인식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이미 약속을 받아 놓은 사람들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받아 놓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십자가 약속을 인식하는
것만으로 이미 구원입니다. 마치 이제 곧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요. 신부는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예비 신부는 ‘이미’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신랑의 격에 맞게 자신을 스스로 고귀한 존재로 가꾸어 갑니다. 그녀는 “아직”과 “이미” 사이의 들녘을 넘나들면서
노래하며 춤춥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그녀는 그녀의 신랑 되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천국을 사는 거지요.
그러니 아무리 어두운 시대를 살아도 새롭게 변화할 생명에 대한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 이 예비
신부가 누구입니까? 여러분 이거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여러분들의 일생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시던 모습
아닌가요? 사랑하는 여러분, 때마침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이 십자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에 의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삶에 개입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장도에 나섭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 이하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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