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좀 주소 / 김혜란 목사

주현절 일곱번째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물 좀 주소
요한복음(John) 4:5-42
김혜란 목사

설교 전 기도: 지혜의 성령님이시여, 부족한 설교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주관하여 주소서. 지금 이 공동체 자리에 오셔서, 저희 모두의 마음과 생각을 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듣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새해 잘 맞이하셨길 바랍니다. 설날도 보내고 교회 절기로는 주현절을 보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선 것은 예배에 참석하시고자, 또, 말씀을 듣고자 모이신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바쁘지만, 모이는데 힘쓰시는 여러분들, 합하여 선을 이루고자 하는 그 마음이 제 마음에 전해집니다. 이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데 크게 3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 말씀 뒤에 있는 배경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두번째는 본문 안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말씀을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읽어내고 해석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 세가지 방법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기 보다, 연관되어 있고 다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렉서너리를 벗어나서 요한 복음 4장 말씀을 가지고, 말씀드린 세가지 방법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3 복음서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함께 본다,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따서, 공관복음서라고 부르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와 요한복음은 내용도, 글 쓴 스타일도, 또 주제도 많이 다릅니다. 이 네 복음서를 한번이라도 읽어보신 분들은 제가 드리는 이 말씀이 충분히 이해되시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아직 읽어보시지 않은 분이 있다면, 한번 이번 기회에 읽어보시라고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이유들이 여러가지 있지만, 그 중에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있는 배경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복음서를 전한 요한 공동체가 당시 유대교에서 쫓겨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로 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반유대교적인 언급이 가장 많은 복음서가 또한 요한 복음입니다.  이런 성서 뒤에 있는 배경을 모르고 요한복음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면, 유대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적이다 하는 식의 위험한 편견에 빠질 수 있고, 사실, 기독교인들이 너무 오랫동안 그런 오류를 저질러 왔습니다.  독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사건도 크게는 성서를 반유대인, 차별적 입장에서 읽어 해석해 온 역사에서 기인하고 있는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신 상태에서 두번째 방법인 본문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 20절, 21절, 22절 본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같이 읽어 볼까요?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온다, 이런 본문이 있지요? 얼핏 보면, 이 구절은 유대교를 선호하는 견해에 예수님께서 동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시면 실제로 그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대목이지요. 그 때가 오면 참된 공동체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공동체라는 것의 의미는 유대교라는 테두리,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젼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 공동체는 인종이 다른,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들도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입니다. 이 말씀안에 담겨 있는 또 하나는 이 복음서를 쓴 요한 공동체가 사마리아인, 소위 유대인들이 가장 천시하고 적으로 생각했던 이방민족 중 대표적인 사마리아인들을 당신들의 공동체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박해받고 있는 소수 그룹으로서 요한공동체가 역시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는 사람들을 품는 모습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일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과 자신들이 비슷한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서로를 적대시했던 두 그룹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로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려면, 유대인들이 중심으로 생각했던 예루살렘도 부정되고, 사마리아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그 곳 역시 부정되어야 하기에, 결국,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참 예배라는 대안 공동체를 선포하고 있는 본문안의 내용입니다.

이제 3번째 성서 읽기 방법으로 요한복음 내용을 생각해 보겠습니다.독자의 입장이 되셨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떤 것이 이 본문의 주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내용이 가장 마음에 와 닿나요? 독자들이 책을 읽으며 상상을 하듯이, 한번, 예수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 두 사람들의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상상력과 생각을 존중하면서 겸허하게 저의 생각을 전해 보겠습니다.

우선, 독자로서 저는 예수님도 엄청 용감하고, 사마리아 여인도 엄청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서로 모르는데, 그리고, 서로 저주하고 싫어하는 사이인데, 거기다가, 유대인 남성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이방인 여성과의 대화를 예수님이 감히 시도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 남녀칠세 부동석 전통처럼 당시 유대인들도 비슷한 전통, 남성과 여성이 꼭 지켜야할 도리와 규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예수님은 이런 경계를 뛰어넘어 이방인 여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대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설사 유대인 남성이 말을 걸었다 하더라도 무시하고 외면했어야 할 터인데,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건넵니다. “어찌하여 내게 말을 건네시지요? 그런 거 하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시작한 대화는 쉽게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또 한 가지 독자로서 제가 들었던 생각은 용감하고 대담하고 심지어 당돌하기까지 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지방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예수님과 제자들, 먼 여행 중, 피로와 굶주림에 고생하고 있는 그 상황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온 이 시간, 예수님이 힘들어 우물가옆에 주저 앉은 이 시간은 개역 성경에 의하면 육시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입니다. 워낙 절박하지 않으면, 절대 물 길러 오지 않는 때입니다. 아시겠지만, 근동 지방은 사막과 모래로 가득한 아주 덥고 건조한 동네입니다. 그래서, 가장 태양이 작열하는 그 때, 육시, 즉 정오시간에 돌아다니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지기 쉬운, 그래서  그런 시간에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혼자 나타났다는 건, 이 여인도 예수님 만큼이나 힘들고, 목이 마르고, 절박한 상황에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5절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이 여인도 물길러 오는, 목숨을 건 이런 일, 그만 했음, 그러나 할 수 밖에 없는 삶의 간절함이 보여집니다.

절박한 상황과 동시에 독자로서 제 가슴에 와닿은 생각은, 일상적인 대화, “물 좀 주소”하는 우리 일상의 삶, 이런 삶이 사실은 성스러운  삶이며, 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지혜를 찾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사실 성과 속의 구분이 없는 보통사람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도 귀족 출신이나 선택받은 혈통을 가지지 않았고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더나아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갈릴리 동네에서 그렇게 평범한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 연합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은 우리에게 많은 용기와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여기에 있다는 자체가 어찌보면, 용감하고 대담한 일입니다. 익숙한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온 것이 사실 대담한 결단없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태어났지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카나다인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심지어 놀림을 당했지만, 용기있게 이 사회에서 귀한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역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대로 많은 이민 1세대가 겪고 있는 것처럼 영어가 안되지만, 발음이 구져서 못 알아듣는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의사소통을 위해 밥을 벌어 먹기 위해 말을 시도하는  것 역시 용기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대로 여기서 2세로 태어난 많은 분들처럼 한국인 얼굴을 가졌지만, 카나다인으로서 한국말에 서툴러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한인연합교회에 오고 공동체원으로 참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용기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 용기를 잃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메시지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절박함입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절박하신지요? 배가 고프고 다리가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천대받는 곳인 이방지역에 쉬었다 가야하는 예수님처럼 절박하신가요? 물길러 오다가 아니면 기른 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뜨거운 태양열을 맞고 쓰러져 죽을 걸 알면서도 물을 길러 올 수 밖에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절박하신지요?

맞습니다. 여러분들 삶이 절박하십니다.  새로운 목회자를 모셔야 하는 절박함이 이 교회에 있습니다. 재정문제가 어렵고, 교회 인원도 줄고 있는 그 상황 역시 절박합니다. 우리 이민의 삶, 유학생의 삶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그 절박함을 통해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죽을만큼 간절한 그 삶의 갈ㅁ망이 결국, 인종, 남녀, 종교, 문화, 언어를 초월해서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고 오늘 말씀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를 완벽하게 모르지만, 여기 모여 있는 분들 다른 점이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다른 점만큼은 아니겠지만, 한국인인 우리 안에도 다른 점들이 많이 있지요. 어떤분은 이민 온지 오래되어 요즘 바뀐 한국이 낯선 분들도 있고, 다른 분들은 이제 막 카나다로 이민와서 새로운 삶의 터전이 낯설어 어려운 점이 있지요. 이런 두 그룹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인종이고, 같은 문화에서 왔지만 참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점들이 다릅니다. 같은 배 속에서 나온 아이들이어도 부모로서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성격 기호 다른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다른 점때문에, 같아야 하는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은 현실때문에 불편하기도 하고, 오해도 하고 그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간절한 삶의 소망이 있다는 면에서 우리 역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 보면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25년은 카나다연합교회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또한 같은 해 한인목회가 60주년을 맞는다고 합니다. 알파한인연합교회를 중심으로 이 기념되는 해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은 “물 좀 주소” 하는 일상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사실, 성스럽고 거룩한 삶은 일상의 별거아닌  일에서 이루어진다는 걸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믿게 하시는 하나님은 어렵고, 모호하고, 거창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 가진 게 많은 특권층, 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이 똥기저귀를 가는 그 일상의 삶에서, 스시를 말고, 몸이 불편한 이들의 침대를 갈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또 가게를 열기 위해 가정을 떠나 운전을 하고 주말 살림을 해야하는 그 일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영어학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는 쳇바퀴같은 일상의 모습에서 집에서 청소, 설겆이, 빨래를 하는 그 일상 속에서, 채소를 심고 땅을 파는 그 흙묻은 더러운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전해지는 거라고 오늘 우리게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사마리아여인처럼, 대담해집시다. 힘들지만 용감하게 우리가 바라고 하고 싶은 일을 해내고자 노력합시다.  절박한 우리의 상황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다. 삶에 좌절이 될 때 마다 너무 목이 말라, 다리가 아파 걸을 수 없었던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일사병 걸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물을 길러 올 만큼 절박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기억합시다. 적으로 지냈던 두 사람이 그 절박함을 나누면서 생명의 원천인 그 물을 나누어 마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서로 불편하고,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우리 신앙공동체 어려운 점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 삶의 절박함을 나누면서, 가장 아름다운 한인연합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봅시다. 그렇게 될 때 이런 일상의 삶이 거룩한 삶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삶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삶, 신앙, 그리고 이 교회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 믿으며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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