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나누는 교회 / 이영정 목사

성령강림절 여섯번째 주일 / 7월 두번째 주일
생명을 나누는 교회
누가복음 10:25-37
이영정 목사

 

우리의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선교하는 교회 앞에 전개된 사회는 사명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루며 한가족으로 모여

땅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 있는 씨앗이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이곳 캐나다 사회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안에서  믿음 공동체를 이룬 교회로서 살아있는 교회가 되는데 피할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교회로서의 사회적 책임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윤리의 실천을 외치는 도덕적 책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죽어가고 있는 영혼과 생명을 부탁하는 숭고한 사명을 교회에 맡기는데 요구하신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하나님 뜻을 따르는 한 몸이 된, 그래서 생명이 살아있는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명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이 길이 그처럼 어렵고 괴로운 형극의 길 인줄 모르고 우리는 “예”하고 나섰습니다. 처음 부름을 받을 때 그것은 복음이었습니다만 보냄을 받을 때 그 사명은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은 오래 사는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인간은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구약과 신약에도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을 바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구약에서의 율법은 이스라엘 왕국의 기본 법인데  도덕적 책임을 선포한 사회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과 구원의 반복인데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정의를 저버린 백성에게 나타나고 구원은 회개하는 백성에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는데 이 내용은 제2 이사야의 가난하고 힘없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 내용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사회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외치는 복음 중심적 케리그마 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회 선언을 설명할 때 지극히 제한된 한 사람, 즉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어 생명이 살아있는 믿음공동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의 영원한 생명을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것이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가 하고 반문하십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쓰여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맞는 말이다, 그대로 행하라” 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을 말로만 표현할 때는 하나의 관념적인 지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길 때는 그 사명은 십자가가 됩니다.

그래서 그 율법학자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이웃은 예수님이 제일 처음 선포한 사회 선언을 통해서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된 자와 함께 하는 소명의 대상으로 내 자신의 한 부분을 떼어주는 희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관심사는 자신의 이익에만 있고  누가 어떻게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회 선언을 통해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우리 교회가 누구의 이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나누는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대답을 제시합니다.

여러분 중에 우분투 (Ubuntu) 라는 말을 들으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 합니다. 우분투는 즐루 (Zulu) 언어로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다”는 아프리카의 세계관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성공회의 대주교 대즈먼드 투투 (Desmond Mpilo Tutu)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분투는 인간의 본질은 말하는데 특별히 인간은 다른 사람과 격리되어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홀로서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품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화는 우리의 이웃은 누구이고 누가 힘없는 자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의 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웃과 관계를 가지는 순간에 상호 감동을 받고 변화합니다. 오늘날 인간은 지극히 개인주의 적으로 살고 있으며 자기 힘으로 하나님 없이 이세상에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쌓아 올린 물질 문명과 과학기술은 바벨탑이 하늘에 닿을 것 같이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도 바야흐로 우주 시대의 문이 열려서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고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동물의 세포 한 조각으로 똑 같은 복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무한 가능의 자유를 구가 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과학의 새로운 분야인 양자역학은 수없이 많은 새로운 차원의 현상을 규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하면 “나는 잘 모른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대답이고 누구도 정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해하기 힘든 학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새로운 지식과 기술이 넘쳐나고 있으나  인류 역사의 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넘어가서 불안과 공포가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인류에게 떠맡긴 비극입니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을 저버리고 신을 부정하는 인간이 세운 바벨탑과 같은, 하나님의 주신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공지능과 로보트 산업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과학자, 정치가, 경제학자 등의 힘의 철학 신봉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 없이 자유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 중심의 무신론적 사상과 세속주의의 탁류가 거대한 세계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실존주의 사상이 오늘날의 유행처럼 이세상에 만연해서 인간 정신은 방종과 허탈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공포에  떨며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는 허무주의는 세속주의와 함께 현대사의 주류를 이루고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 범람하는 세속적인 사조를 막아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 치유와 번영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이룩하는 것이 생명을 나누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개인이 영생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우리 자신이 새로워지는 혁명을 경험해야 하며 이런 개인이 모여 주창한 사회 선언을 통해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형식적인 윤리 생활의 연습과 공덕을 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혁명은 나 자신 “개인”으로부터 주안에서 “우리”를 이룰 때  생명을 나누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생애를 통해 알 수 있는 예수님의 영성은 “나에게 이익을 주는 것과는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방향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모습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일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우리는 누구도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남을 먼저 위하는 조그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영성을 이야기 해주고 있고 우분투 신학이 말하는 “당신이 없이 나홀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고 우리 한국적인 표현으로 사랑과 정의로 하나 된 “우리”가 주체가 되는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누구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인가, 하나님 자녀로 “우리”라는 이름의 한 가족으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존재할 수 있게 지음 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창조의 가장 중요한 선물입니다. 이렇게 믿음 공동체를 이룰 때 땅끝까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세상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의를 선포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아래 모인 “우리”가 주체가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항상 새로워 지는 모습에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항상 좋은 열매를 맺는데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다면 바로 이때가 우리 교회에  필요한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그 대답은 사랑이 담긴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의 깊은 신뢰를 나누고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서 땅끝까지 생명을 나누는 교회가 되려는 우리의 기도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는 교회의 길을 함께 가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예”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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