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1) / 신태성 목사

신년 주현절 주일 / 1월 첫번째 주일
선한 싸움 (1)
고린도후서 (2 Corinthians) 5: 11-21
신태성 목사

세상에는 다양한 싸움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가벼운 논쟁, 부부싸움, 국가간의 전쟁, 온라인 게임, 키보드배틀, 아님 눈싸움까지…  살면서 다양한 유형의 싸움들을 맞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 속에서 우리는 실패를 하기도 하고,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물론 부부싸움에 있어서는 언제나 여성이 승자인것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 ^ )

싸우지 않고 이길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싸움은 안 할수록 좋지요. 그러나 우리가 꼭 싸워야 될, 싸워서 이겨야될 싸움도 있다. 그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몇주 동안 선한 싸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려고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사는 것도 힘들고 경쟁할 것도 많은데 굳이 싸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냐고 물으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몇가지 이유들을 언급하자면, 선한 싸움은 말 그대로 좋은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은 안할수록 좋지만 선한싸움은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유익을 주고, 좋은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또한 선한 싸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예정하신 계획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이 싸움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무려 40여곳 이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울 것과 성령이 이를 위해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선한 싸움을 살아가기 위한 첫번째 방법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기”

오늘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5:12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이유 그리고 헌신의 의도들 중에 하나를 본문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왜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자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확실히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 안에 행하시고 계신 일들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입니까? (같이 따라해 볼까요?)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소명 말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고린도교회에 대해 배우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고린도 지역은 그 당시의 세속적인 철학과 문화의 허브(센터)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인 곳이라 그러한 흐름은 고스란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데 있어 큰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 속에서 자신들을 비하하거나 반대로 세상의 기준에 따라 교회에 와서도 자랑하고 분탕을 일으키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할 선한 싸움은 하지도 못하는 교회와 개인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세상의 기준이나 시각 속에서 이들을 판단하지 않으며 그리해서도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누구 때문에요? 네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가 믿는이들을 통해 행하신 일들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된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소명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거나, 비하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 선한 싸움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궁금해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대답은 의외로 쉽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싸움에 참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싸움에 참여하더라도 이미 진 사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이미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선수들이 시합전에 기싸움을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죠.  탑선수들 일수록 기량보다는 멘탈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기량은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나는 최고다. 나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기량과 노력은 결코 상대보다 뒤지지 않는다.”라는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반면,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 즉 “나는 별볼일 없다. 나는 또 외면당할거다. 나는 상대보다 못하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보일 태도는 자명합니다: 싸움 자체를 멀리하던지 싸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것이 선한 싸움이라면 더더욱 //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싸움은 새로운 도전입니다. 장기적인 요구이며, 고독하고 외로운, 불확실성을 감내해야 하는 믿음의 싸움인데,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싸움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 사회를 특징 짓는 용어 중에 “오픈 스페이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어떤 정보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자의던 타의던, 진실이던 거짓이던 상관없이, 끊임없이 어떤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좋은 집, 훌륭한 커리어, 성공하고, 이쁘고, 멋있고, 극단적인 것들에 자신을 비교하도록 독촉을 받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존재나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분노와 열등감, 불안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세가지 생각들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듭니다: hopeless, helpless, useless.     “나는 희망이 없고,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이 희망이 없고, 무력하고, 쓸모없게 느끼게 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보면 그렇게 느껴질때가 종종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막막하고, 내 자신이 불필요하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느낌이 사실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니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잘못이라거나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자기 자신을 취급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줍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꼭 사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느낌만큼 강렬한 것도 없지만, 느낌만큼 거짓말장이도 없습니다. 이성 없는 감정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러한 느낌이나 감정은 더더욱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러한 느낌이나 판단이 결코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것인가?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행하시고 계신 일들 때문에.

나는 희망도 없고, 무력하고, 쓸모없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이유가 그저 내 자신에게, 혹은 나의 상황에게 있다면 아마도 그런 느낌과 판단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더이상 나 자신을 통해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타인이나 세상을 통해 자신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의 약속을 통해 자신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줄 믿으시면 아멘하시길 바랍니다.

#1. 본문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에대해 살펴봅시다.

“나는 희망이 없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위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의 증표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분명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때, 어떤 열정 때문에, 호르몬의 영향 때문에, 아님 필요 때문에 죽을만큼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상이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 특히 자기 자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순전하면서도 온전한 사랑을 지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랑과 증오, 애정과 폭력의 차이가 사실상 그렇게 크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사랑이라는게 고상한 단어와 표현은 가능해도 자기애를 벗어난, 순전한 희생과 온전성을 가지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순전하고 온전한 사랑이 여전히 우리 안에 유효하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또한 그러한 사랑을 이어나가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허락하셨습니다.

사람 한테도 희망이 없고, 세상 안에도 희망이 없고, 나 자신 안에도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희망이 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전히 우리 안에, 여러분에게 유효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한 여전히 희망도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Amazing grace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 이기도 한, 18세기 유명한 복음주의 목회자인 존 뉴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의는 그(그리스도) 안에 있고,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행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 안에 있는 넘치는 은혜와 사랑 그 자체에 기초한다. 바로 죽음까지도 감당하셨던 순종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어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몫의 유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유산이라는것은 죽은 부모에게서 받는것임을 생각해보면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로 취급한거나 다름없습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내 몫의 유산을 얻으려면 당신이 죽어야만 합니다’라고 말한것입니다. 이런 무례하고 모욕적인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별 말없이 유산을 내어줍니다.

이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받자마자 바로 집을 떠납니다. 지루한 시골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충분히 유흥을 즐기고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곳이라 믿었던 도시로 갑니다.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 따위는 생각나지 않을 곳이지요. 그러나 신나게 즐기고 향락했던 아들은 수중에 유산이 떨어져감에 따라 자기주변에서 같이 즐기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종작에는 한 푼도 없게 되자 아무도 자기를 돌아봐주지 않았는데다가 그 지역에 심한 흉년이 들어 그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구걸을 하러 다녔습니다. 결국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husks, 곡물이나 씨앗의 겉껍질)를 먹으며 근근히 살아야 하는 비참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탕자가 자기 자신을 볼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때 희망을 발견합니다. 누구에게서요? 네 아버지.

돈도, 친구도, 연인도, 사업도, 사회적인 위치도, 심지어 미래에 대한 꿈도 다 나를 떠났지만, 여전히 나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는 아버지.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셨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아직 함께 있기에 여전히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집근처에 다다랐을때, 그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탕자가 떠난 이후 한시도 그를 기다리지 않은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그를 단숨에 알아보고, 신발을 신지도 않은채로 아들에게 달려와 그를 맞이합니다.

어디 탕자 뿐입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아버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같이 따라해 볼까요?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 언제나 희망은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2. 두번째 착각 “나는 무력하다” 이 생각이 사실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6-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오늘 본문 말씀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새로운 피조물” 아마도 여러분 중에 “나는 예수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무능하기 짝이 없다.”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더 정확하게는 “그리스도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땠을까?”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If anyone is in Christ, the new creation has come, the old has gone.”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계시다고 분명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내 지식, 내 능력, 내 배경은 타인보다 미진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과거의 내가 아닌, 과거의 우리가 아닌, 과거의 교회가 아닌, 새로운 나, 새로운 우리, 새로운 교회로 만들어 가고 계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새로움이란 과거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롭다고 할 때 종종 과거에 못이뤘던 것을 이루는 것을 상상하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로움이란 그리스도의 사건과 역사가 이뤄지는 삶과 존재를 의미합니다.

과거에 바라던 것을 현재에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무능한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능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일을 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우리의 교회 안에, 우리의 삶과 가족 안에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고 계십니다.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더이상 무능한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5:1-2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즐거워한다)”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이 모든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가능성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화해는 우리는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도록 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같이 따라해 볼까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것이 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나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3. 세번째 착각 “나는 쓸모없다” 여러분 이 느낌이 사실일까요?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과 18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15“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8“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성경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때, 구원의 선물만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직분과 사명도 주셨다”. 무슨 말입니까? 쓸모가 있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쓸모 없다는 말은 어떤 용도에 적합하지 않거나,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신체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쇠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쓸모없다는 이유가 될까요? 하나님은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왜요? 사회에서, 세상에서 아직 나를 필요로 해주니까요? 아니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섬기는 직책을 주셨기 때문에.        IT 전문가요 교회 재정 상담가로 활동 중인 크리스 케이글은 “은퇴를 다시 상상하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직장으로 부터 은퇴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인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부터 은퇴하는 것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만약 우리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또다른 기회를 시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지혜와 경험, 재능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자원들을 더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는 또 다른 부르심인 것이다.” 

케이글은 두가지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직장으로 부터 은퇴를 했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것은 변함이 없다. 두번째, 설사 직장에서 은퇴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 사이에 더 집중적으로 전하기 위한 기회에 불과하다.

출애굽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그의 나이가 80세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수명도 짧아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말한대로, 은퇴를 해도 여러번 했을 나이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직분과 사명을 주십니다. 출애굽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사랑하는 알파 연합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부르심 가운데 있는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같이 따라해 볼까요?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하기에 나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싸움을 하기 위한 첫번째 방식을 나눴습니다. 싸움은 안할수록 좋지만 선한 싸움은 할 수록 좋은 것입니다. 선한 열매, 선한 변화, 선한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선한 싸움을 위한 첫번째 길이 무엇이라고요? 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결코 싸움을 할수도, 특히 선한 싸움을 감당할수도 없고, 싸움을 하더라도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높은 자존감의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보다 자신을 우월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는 말은, 여러분이 이미 자랑할만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것,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 안에 행하시고 계신 일들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입니까?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소명 말입니다.

영주권이나 시민권만이 신분이 아닙니다. 자격증이나 직함만이 가능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은퇴의 여부가, 나이의 여부, 심지어 집안 배경의 여부가 여러분의 신분을 나타내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가진 것이나 타인의 평가로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행하고 계시고, 예비하신 일들로 자신을 판단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알파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가 주신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소명 가운데 우리 자신과 교회,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세워가도록 합시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과거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새로운 한해에도 선한 싸움에 승리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May it be so!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선한 싸움의 주인공이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러한 싸움이 우리의 자격과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신분의 존재로 거듭나게 하신, 그리고 지금도 거듭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임을 깨닫게 하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새로워 질 수 있음을 또한 믿습니다. 세상의 직분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줄 믿사오니, 이제는 세상과 상황 속에서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하시고 복되게 하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우리와 우리의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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