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겉모습이 아닌 중심

성령강림절  네번째 주일 / 6월 두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16:6-13, 고린도후서 5:14-17
성령강림절, 겉모습이 아닌 중심
정해빈목사

 

캐나다 사회는 매년 5월을 “아시아문화유산의 달”로 지키고 있고 6월을 “원주민역사의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5월에는 아시아 문화를 기리는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고 6월에는 북미에서 제일먼저 정착한 원주민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리는 행사들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운영된 브리티시컬럼비아(BC) 주 캠루프스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서 어린이 215명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과거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아이들을 원주민 문화와 격리시키기 위해 5-6세 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어 강제로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하였고 그곳에서 백인동화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아이들은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언어 사용을 금지당했고 열악한 환경과 엄격한 규칙 때문에 많은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했습니다. 15만 명의 원주민 아이들이 139개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이번에 유해가 발견된 캠루프스 기숙학교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습니다. 1890년부터 1996년까지 연방정부를 대신해서 카톨릭 교회가 60% 이상의 기숙학교를 운영하였고 나머지는 캐나다연합교회와 성공회가 맡았습니다. 215명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기숙학교에서 살았던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얼마나 많은 학대와 고통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매년 9월 30일을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는 날(Orange Shirt Day)”로 정하고 있습니다. 기숙학교로 끌려가는 손녀에게 할머니가 오랜지색 티셔츠를 입혀 준 것이 유래가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올해부터 9월 30일을 원주민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정부의 공식 휴일로 정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2007년 연방정부를 대상으로 캐나다 역사상 가장 큰 집단 소송을 제기하였고 연방 대법원은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만들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10년 동안 조사를 실시한 후에 총 94개의 권고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권고안 중에는 카톨릭 교황의 사과를 비롯해서 기숙학교를 운영했던 교회의 책임을 묻는 권고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총 15만 명의 피해자 가운데 6,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권고안에 따라 캐나다 정부는 지금까지 280억불의 보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원주민 기숙학교는 원주민을 미개인으로 취급하는 백인우월주의 문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북미에 정착한 백인 개척자들은 원주민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과연 이 지구의 미개인일까요? 자연을 존중하는 원주민들이 미개인일까요? 아니면 자연을 훼손하는 문명인이 미개인일까요? 원주민, 흑인, 아시아인을 무시하는 백인우월주의 문화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원주민들/흑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 갈 때도 있었고 아시아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갈 갈 때도 있었고 백인들의 문명이 가장 앞서 갈 때도 있었습니다. 피부색, 인종, 지역, 종교, 언어 등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문화는 하루빨리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16장은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미래 지도자로 소년 다윗을 선택하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본래 고대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자율적으로 다스리는 사사시대 사회였습니다.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왕의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했습니다. 오늘날의 지방자치시대처럼 각 지파들이 자율적으로 각자의 지파를 다스렸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는 임시 지도자, 판사, 제사장들을 뽑아서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사시대의 자유/자치/자율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자신들을 통치할 왕을 요구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 백성들은 자유/자치/자율을 부담스러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외모가 뛰어나고 가장 키가 크고 베냐민 지파를 대표하는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으로 선택하였습니다.(사무엘기상 9장). 사울은 처음에는 백성들을 잘 이끌었으나 나중에는 욕심이 생겨서 왕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까지 겸임하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의 마음이 변한 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서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한명을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첫아들에게 기름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나머지 아들들에게 기름붓는 것을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양떼를 돌보기 위해 밖에서 일하고 있는 이새의 8번째 아들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은 당시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외모가 뛰어나고 가장 키가 크고 가장 좋은 집안사람인 것에 비해서 다윗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셨습니다. 다윗은 눈이 아름다고 들에서 양떼를 돌보는 성실한 소년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날부터 주님의 영이 다윗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육신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그를 평가절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 도시를 방문하였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존경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은 예수님의 12 제자도 아니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지도 않았고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바울이 글에는 힘이 있지만 말에는 약하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옛날 고대사회에서는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웅변술/수사학이 지식인의 평가 기준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교인들을 향해서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자랑할 것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통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최고의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시대 최고의 랍비/지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육신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평생을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신의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육신의 잣대를 버렸습니다. 육신의 기준으로 볼 때 자랑할 것이 많았지만 그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과거의 자랑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겉모습을 보고 사람을 평가할 때 인종차별과 편견은 계속될 것입니다. 진실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들 모두는 과거의 자랑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차별없이 사랑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사람을 겉모양을 보고 차별하였던 인류의 지난 죄악을 회개하며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성령님을 따라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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