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주일, 생명은 환대를 통해서 자랍니다

성탄절 첫번째 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누가복음서 2:1-7, 2:43-52
송년주일, 생명은 환대를 통해서 자랍니다
정해빈목사

 

서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꼽으라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Amazing Grace, 찬송가 305장)와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Abide with me, 찬송가 481장) 찬송을 말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찬송도 그에 못지않게 잘 알려진 찬송입니다. 이 찬송의 원래 제목은 “내 곁에 머무소서”(Abide with me)입니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고 인도의 간디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기 때문에 지금도 인도는 힌두교 국가이지만 중요한 국가 행사 때 이 찬송을 부릅니다. 이 찬송은 죽음의 위협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평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음의 위협과 싸우면서 이 찬송을 불렀고 병원에서 임종을 맞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날 돕는 주여 합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이 천지만물 모두 변하나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면 사람은 누구나 슬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임종을 앞에 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슬픔과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 때 신앙인은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나의 친구들이 나를 위로 못할 때, 내 곁에 머물러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할 때 신앙인은 하늘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21년 마지막 송년주일 예배를 드리며 이 찬송을 묵상합니다. 지난 1년 동안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습니다. 2년째 계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았고 토론토 한인사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은 아니지만 원로목사님이신 김익선목사님과 이정숙장로님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지난 1년을 살면서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면서 우리는 겸손을 배울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와 동행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고 인내하면서 꿋꿋하게 견뎌 오시고 교회와 지역사회와 가정을 위해 봉사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고통은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Abide with me”(내 곁에 머무소서)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고난과 시련을 견뎠듯이 우리도 이 찬송을 부르며 꿋꿋하게 삶을 이어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누가복음서 2장을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시대상황이 나옵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황제가 세상을 다스릴 때,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황제가 칙령을 내려서 세금을 걷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등록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데리고 북쪽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고향/본적인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황제가 모든 사람에게 호적등록을 하라고 했다든지, 호적등록을 하는데 거주지에서 하지 않고 굳이 멀리 떨어진 고향/본적에 가서 해야 한다든지, 마리아처럼 임신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등록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꼭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본래 북쪽 갈릴리에서 살았던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 왔다가 예수님을 출산한 것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켰기 때문에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라는 명칭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또 다른 구세주가 마구간에서 태어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로마의 구세주는 전쟁승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난 구세주는 정의를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누가 진정한 구세주인가? 세상을 정복하고 식민지 백성들을 억압하고 전쟁승리를 통해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진정한 구세주인가 아니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병자를 고치고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사람이 진정한 구세주인가를 누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천사는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이 왜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일까요? 백성들을 창과 칼로 억압하는 가짜 구세주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평화를 가져다 줄 구세주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이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라고 누가는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삶을 더 힘들게 하고 파멸로 이끄는 권력자는 가짜 구세주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더 정의롭게 만들고 세상을 살리고 치료하는데 헌신하는 사람은 진정한 구세주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람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기로 태어나셔야만 했고 아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돌봄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해산할 때 베들레헴에는 방이 없었습니다. 호적등록하러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방이 없었을 수도 있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했기 때문에 방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나마 누군가가 마구간을 내주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실 수 있었고 가난한 목자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출산한 마리아와 요셉, 마구간을 내준 베들레헴 사람, 멀리서 찾아온 목동들, 아기 예수님에게 자리를 내어준 동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구세주가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집 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집 바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아기는 집 안에서 태어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아기는 집 바깥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집 바깥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가난해서 당신의 아기가 집 바깥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이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후세대가 태어나지 않으면 인류는 망할 것입니다. 모든 아기들이 세상의 구세주입니다. 하지만 모든 아기들은 우리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는 식민지 시대였고 고통스러운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가운데서도 서로를 돌보아주는 따뜻한 사랑 덕분에 메시야는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소년이 된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다가 너무도 신기한 것이 많았는지 부모를 따라 고향에 가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부모는 소년 예수가 친척과 동네 사람들 사이에 있는 줄 알았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 소년 예수가 없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가 지나서야 부모가 알았다는 말은 옛날에는 아이들이 대가족과 친척과 동네 사람들의 돌봄 속에서 걱정없이 자랐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찾았고 3일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하는 어린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은 부모에게는 끔찍한 경험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선생들의 보호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탄절 이야기와 소년 예수의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지만 아기 예수는 이웃의 환대 속에서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소년 예수가 부모와 떨어졌지만 선생의 환대 속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이나 어른을 막론하고 우리들 모두는 지금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힘들면 힘들수록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환영해줄 때, 구세주는 어른이 될 것이고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1년을 돌아볼 때 우리들 모두는 참으로 지치고 힘든 1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말씀처럼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환영해줄 때, 새로운 미래는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환대의 마음을 가지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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