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 사랑에 가 닿을 때

주현절 아홉번째 주일/3.1절 100주년 기념주일 및 청년주일
열정이 사랑에 가 닿을 때
요한복음 2:13 – 17
유상진 목사

저도 사람이라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래도 뭐 어떤 삶의 기준이나 규율 같은 게 있지 않겠습니까? 뭐 좀 거창하게 말하면 무슨 가치관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뭐 여러분들도 그렇겠습니다만, 저의 경우는 이런 기준과 암묵적인 의지로 말의 서열들을 메기게 됩니다. 편하게 말하자면, 좋은 말 싫은 말을 가리는 거지요. 절대 이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 말은 선호해서 사용해야 겠다 뭐 이런 거 말입니다. 제가 싫어하는 말들, 지겹다, 오지랖, 거드름, 순응… 이런 말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저랑 20년째 알고 지내는 여자도 웬만해서 생활 중에 제 입으로 나오는 것을 몇 번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 여자가 이런 말들을 많이 사용하지요. 뭐, 지겹다는 둥, 오지랖이 넓다는 둥… 그럽니다. 이런 말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과 삶의 태도에 관한 말들이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 중에 가장 싫어하는 말을 하나 꼽자면, “수준”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자신과 비교해서 나 보다 못한 사람, 잘난 사람을 분류하고 그것을 수준차라고 합니다. 저는 그 표현이 정말 싫습니다. 제가 그런 표현을 안 쓰는 대신에 또 아까 그 여자가 많이 쓰지요. 수준이 떨어져서 너랑 같이 못살겠다는 유의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다 사람이지 수준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있다면 사람의 수준이란 게 뭡니까? 그동안 자기가 받은 학위, 모은 재산, 직장의 이력, 그리고 알량한 삶의 경험에서 얻은 상처들… 뭐 이런 것들을 모아 놓고 수준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여러분, 솔직히 얘기해서 사람의 수준차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가장 정직한 인식은 이거 하나 밖에 없잖아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이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 머리 꼭대기 저 높은 곳에 계신 당신이 아니라, 내 앞에 올곧게 마주서 계신 당신 앞에만 서면, 당신의 그 거룩한 빛 앞에서면 내 못난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만 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 사이의 수준을 논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올곧게 서 있는 사람이 이미 아닙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런 반면에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을 하나 꼽자면, “온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매일 같이 달라지는 수은주의 높이만 온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함이 있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옆에 가면 왠지 모르게 따뜻합니다. 그 사람 곁에만 가면 이불 홑청이 맨살에 닿는 듯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 옆에 가면 왠지 모르게 가시방석입니다. 어두운 벌판에 우두커니 혼자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차갑습니다. 이 사람의 온도를 오늘 설교제목으로 바꾸자면,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열정이 있는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냉랭한 사람 곁에 있는 것이 좋습니까? 여러분, 좀 바꾸어서 여쭙겠습니까? 여러분은 열정적입니까? 아니면, 열정적이라고 말하기 좀 머뭇거려 집니까? 여러분, 어떠세요? 뭔가 나를 와락~ 사로잡는 그 무엇인가 때문에 전율했던 적은 없었던가요? 그 일에 너무 미쳐 버려서 “이러다가 뭐 일 나는 거 아닌가?”하는 두려움마저 소름 돋도록 느꼈던 적은 없었습니까?

작년입니다. 2019년 3월 29일 뉴욕타임즈의 신문 머릿기사입니다. 오버룩 프로젝트, 말그대로 주목받지 못한 사람들을 조명하는 기획기사입니다. 1851년 이후에 시작된 백인 남성들 중심의 프로젝트기사였는데 작년에는 우리나라의 유관순이라고 하는 17세 소녀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좀 늦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1절 100주년이 되는 올해 1월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을 선정했습니다. 그 기사의 첫 시작은 이렇습니다. 한국 서울, 1919년 봄,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평화 시위 동참에 대해 부름을 받았을 때 유관순이라는 이름의 한 16세 여학생은 자유를 염원하는 민족의 집단적 갈망을 상징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관순열사의 행적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을 위한 첫 현대 교육기관인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의 학생이었고, 1919년 3월 1일 유관순과 4명의 급우들은 거리에 나가 일제 식민통치에 항의하기 위한 최초의 만세운동 현장에서 시위에 참여한 다른 이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리고 다시 3월 5일, 유관순과 그녀의 급우들은 서울 남대문으로 행진, 일본 당국에 구금되었다가 이화학당의 미국인 선교사들의 협상으로 풀려났고, 3월 10일 일제가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몰래 입수한 3.1 독립선언문 사본을 들고 서울에서 약 85km 떨어진 고향, 충청남도 천안으로 달려가, 자신이 다니던 매봉교회를 중심으로 마을 교회들을 돌아다니며 말 그대로 서울의 ‘3.1운동’을 전파하고, 주민들을 결집하여 자체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그 현장에서 부모를 잃었고, 체포, 구금, 재판, 고문과 수형생활… 그리고 수형 생활 중에도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 감옥 안에서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그 사건으로 지하 독방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고, 끝내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석방 이틀을 남겨놓고 옥사하였고, 이때의 나이가 17세였다는 그런 내용들의 기사입니다. 우리 나이로 18세죠. 그리고 이후의 한국민들의 전체적인 피해 상황 같은 것들이 기록된 기사입니다.

수형자 기록부의 사진인데요. 그때 유관순열사의 얼굴은 참 순하게 생기셨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름에 소원을 넣지요. 튼튼하게 자라라고 차돌이, 순하게 크라고 순이… 말 그대로 눈매와 얼굴이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이 얼굴입니다. 저 눈매를 저는 매주일 봅니다. 우리 청년 요나들의 눈매와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뭐 세간에서는 기독교계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기여한 바가 없어서 면피용으로 기독교인인 유관순열사를 과대 선전했다는 논리도 있고, 그런 과한 평가 때문에 한국 역사교과서 8종중에 반이 유관순열사의 이야기를 삭제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거 하나는 알겠습니다. 1919년 3월 1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우리 나라의 독립선언서 공약 3장 중의 하나가 이거였습니다. 최후일인, 최후일각 민족 정당의사 쾌 발표! 최후의 순간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그런데 100년 전의 공약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3.1절 100주년 기념주일 및 청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저는 100년 전의 나라 잃은 백성들의 행진과 오늘 이날을 기념해서 예배를 진행하고 있는 청년들 사이에서 오버랩 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거기서 있었던 그리고 오늘 여기 우리 청년들에게도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 그것은 온도입니다. 열정입니다. 이제 갓 청년목회를 시작했고, 그래서 지난 몇 주간 동안 트럭 운전일이 끝나고 난 뒤에 청년들을 1:1로 만났습니다. 거기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뭐 대화를 하는 거지요. 지난 주간에 만난 청년 중에 한분의 기도제목이 이거 였습니다. 내 모든 열정을 올인 할 수 있는 일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아까 요나회 이한결총무께서 기도했지만 작금의 시대는 우리 청년들에게서 꿈을 빼앗아가는 시대입니다. 청년들이 민족이나 역사나 신앙을 말하기에는 생경스러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을 하늘에 가두고, 끊임없이 장사하고, 그 이익의 술에 취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다수의 권력과, 거기에 아첨하고 빌붙는 맘몬의 노예만이 살아남을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우리 청년들이 막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모든 열정을 올인 할 수 있는 일을 만나게 해 달라는 것이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기도를 드리는 청년이 있어서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 후에 청년들의 기도제목을 나누는 부스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기도카드를 가져가셔서 우리 청년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그 청년이 누군지 궁금하시면 저한테 물으십시오. 뭐하는 분인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제가 아니깐, 저에게 물으시면 상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청년 여러분, 지금 내가 내 안의 열정을 다할 일을 만나지 못했더라도, 내게 열정이라는 게 있나하고 조바심 가지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000년 전에도 여러분과 비슷한 한 청년이 있었거든요. 이 청년은 그저 가정에서는 순종적이었고, 여러분이 그렇게 원하는 학벌이나 지식, 말하자면 스펙도 뭐 별로 없고, 그저 그렇게 아버지의 가업을 도와서 소심하게 시골 한적한 곳에서 노동에 종사하던 청년이었습니다. 무엇엔가 단 한 번도 분노한 적 없고, 열정을 불사른 적도 한 번 없었지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올 법한 그저 편안하고 인자한 인상의 청년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화로운 예수님, 인자한 웃음이 얼굴에 가득 찬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가 자주 보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이“이러다가 오늘 뭔 일 나는 거 아냐?”하는 두려움에 소름이 오싹 돋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내어 쫓고,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시고, “이것을 걷어 치워라!”하고 험상궂게 외쳤습니다. 성전을 그냥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욱 더 경악스러운 것은 노끈으로 채찍까지 만들어서 물리적인 위협까지 가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은 평소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예수님의 얼굴, 너무 한 곳에 집중한 나머지 다른 어떤 상황도, 분위기도 보이지 않고 온통 한 점에만 집중해 버린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 오늘의 예수님의 얼굴이 그런 얼굴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 분의 얼굴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성전정화 사건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울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17절 말씀에,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위의 말씀은 시편 69편 9절 상반절의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보고 시편 69편 9절의 말씀을 머리에 떠 올렸다는 겁니다. 시편 69편 9절의 공동번역본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오늘 본문에 “삼키다”로 표현되어 있는 단어는 시편 69편 9절에 “아칼”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되, “태워버리다. 태워서 소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의 적당한 표현을 찾자면, “산화(散花, 散華)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나라를 위해 죽어 가신 유관순열사 같은 애국선열들의 죽음을 불꽃, 산화라고 표현하잖아요? 오늘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그분의 모습 속에서 제자들은 어떤 낯선 감정을 느꼈고, 그 예수님의 열정을 보면서 속으로 구약의 시편의 말씀을 중얼 거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집을 향한 나의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만약에 이 시편의 본문이 없는 상황이라면 제자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까요? 사실 오늘 제자들이 되뇌였던 시편의 말씀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긍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국적인 표현으로 한다면, “아이구 저러다 뭔 일 나지, 저러다 죽지…”하고 혀를 끌끌 찼을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서른 살 청년 예수와 함께 그 때, 거기에 그 성전에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요? 우리도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슬며시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이구 저러다 뭔일 나지… 저러다 죽지…”그렇게 우리도 혀를 찼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불사른다.”를 직역하면, 불꽃, 산화, 곧 죽음을 의미하거든요. 그리고 종국에는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재판에 회부되었고, 십자가형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정말 불꽃 같으셨습니다. 그분은 30살의 나이에, 3년이라는 공생애를 정말 불꽃처럼 살다 가신 분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3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통해서 인류구원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오늘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불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3.1절 100주년 기념주일 및 청년주일예배로 드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도 예수님처럼 마음의 열정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리 스스로를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열정으로 불 붙어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명에 대한 열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거나 두 달란트 받았거나 다섯 달란트 받았거나 모두가 다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달란트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 열정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런 열정 때문에 교회가 부흥됩니다. 이런 열정 때문에 역사가 진보합니다. 이런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열정이 어디에서 옵니까?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을 담당할 때, 작정 기도할 때, 성경을 통독할 때… 사실 문제는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더라도 열정이 곧 식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이 식지 않는 열정은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윌리암맥래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열정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소원이라고 표현합니다. 열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았고, 그래서 너희와 하나님께 대해 미친 듯 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이 뭡니까? 구원은 발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가더라도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에서, 시간적으로 2000천년의 시간차를 두고, 인종과 풍습이 전혀 다른, 그리고 일면식도 없는 서른 살의 청년이 그 때 당시 숱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십자가에서 그도 똑같이 죽었는데, 예전에 몰랐는데, 그것이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의 사랑이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발견하는 감격이 얼마나 큰지요. 아아, 이제 까지 내가 산 것 내가 산 것이 아니구나. 내가 아등바등 산다고 살았는데, 아아, 그 분의 은혜였구나, 그 분의 사랑이었구나 그렇게 감격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한번 돌아보십시다. 우리들 중에 이제까지 사시면서 내 계획대로 내 마음먹은 대로 다 하시고 사신 분 계십니까? 저는 제 마음대로 못살았습니다. 제 계획대로 못살았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와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끄럽고, 알량한 내 삶의 뒤안길까지 그 분의 사랑으로 채워져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렇게 밖에 고백 못합니다. 여러분은요? 여러분, 이 사랑을 발견하고, 날마다 날마다 이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습니까? 교회는 왜, 나오십니까? 아니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일날 하루정도는 쉬어 줘야지요! 그동안 힘들게 직장에서 일하셨는데 오늘 쉬시지, 왜, 나오셨습니까? 장로님들, 집사님들, 그리고 성도님들 솔직히 딱 까놓고 얘기해서 뭐가 그리 좋아서, 시험 드는 교회의 헌금관리와 재정에 달라붙어서 일하십니까? 뭐가 그리 좋아서 잘 방문하지도 않는 교회 웹싸이트를 붙들고 시름을 하십니까? 그리고 소회의 여성 집사님들, 장로님들 아, 여성들이 하루 세끼 6*3=18, 일주일에 열 여덟 끼를 해대는데 주일날 하루정도는 쉬어야지 뭐가 그리 좋아서 식당봉사 하십니까? 천국 갈라고요? 천국에서 상급을 많이 받을라고요? 아니요, 우리는 천국이 없다 해도, 천국의 상급이 없다 해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주님께서 제게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오늘 일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큰지 이렇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유관순열사의 열정이 왜,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 될까요? 그 열정 가운데 이 사랑이 담보되어 있다는 겁니다. 유관순열사의 열정이 사랑에 가 닿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유관순열사가 옥중에서 가장 많이 부르짖은 것은 다른 수감자들의 무죄함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함께 여옥사에 투옥되었던 분들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매일 낮밤으로 다른 수감자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으깨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 나라에 내 목숨을 바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회한입니다”라는 재판석상에서의 발언만 보아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 열정과 사랑은 가장 가까운 친구입니다. 오늘 왜, 예수님께서 “저러다 죽지…”하고 주변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도록 열정을 불사릅니까? 예수님의 열정이 비로소 사랑에 가 닿은 겁니다. 이 사랑에 가 닿은 100년 전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열정은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지하 어두운 독방이었다면, 이 사랑에 가 닿은 2000년 전 예수님의 마지막 열정은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 위였습니다. 그런데 왜요? 왜, 그렇게까지 했나요? 저도 모르겠어요. 단지 제가 명확히 아는 것은 나는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한 개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 밖에 몰라요. 왜 그 분들이 십자가를 지십니까? 그 속에 나를 향한 사랑이 들어 있어요. 여러분, 이 큰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불붙기 시작합니다. 그 큰 사랑을 마음에 날마다 날마다 아로새긴 사람들은 그 마음의 열정이 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온전히 서기만 하면 우리 가슴의 열정이 결코 식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열정이 식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십자가를 떠나가면 열정은 냉정이 됩니다. 무슨 부흥회 때, 불 받았다고 펄쩍펄쩍 뛰는 것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때문에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와 우리의 삶의 자리에 사역할 때, 은혜는 날마다 새롭게 솟는 샘물입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오늘 제자들처럼 우리를 향해서“하나님의 전을 향한 내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는 시편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낼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하는 요나회 청년여러분, 그리고 알파교회 교우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혹 지치고 시험 들어 쳐져 계신 분들 계십니까? 여러분, 힘내세요. 이 주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십시다.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힘도, 조건도 없는 것 같아도 아무리 작은 보잘 것 없는 열정이라도 이 사랑에 가 닿을 때, 우리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것을 막론하고 여러분,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은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합니다. 열정과 사랑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과 사랑에 가 닿은 열정은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런겁니다. 군대 다녀온 남성분들, 군에서 1식 3찬 식사를 하잖아요? 한번 식사 때 세 가지 반찬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군대에서 1식 3찬을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뭐 똑같은데 어머니가 해주신 1식 3찬을 드시겠습니까? 예, 당연하죠! 그런데 군 취사병들도 열정을 다해서 조리를 하잖아요? 어머니도 정성스럽게 열정으로 밥을 지으십니다. 뭐가 다른 건가요? 똑같은 열정과 힘이 들어가는데 뭐가 다른 건가요? 예, 우리 어머니의 수고와 땀이 이미 사랑에 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리고 교우여러분, 어떤 일을 열정적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그 열정이 사랑에 가 닿았는지 여부에 따라서 그 일의 동기부터 결과까지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이 그 일을 시작하는 동기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라면, 사랑에 닿은 열정의 동기는 사람보다 더 큰 하나님의 시선이 됩니다.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은 그 일하는 자세가 수동적이라면, 사랑에 가 닿아 있는 열정은 그 일하는 자세가 자발적입니다.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은 그 일하는 목적이 나의 유익이라면, 사랑에 닿아 있는 열정은 그 일하는 목적이 하나님과 다른 이들의 유익이 됩니다. 사랑에 가 닿지 않은 열정은 그 일의 결과를 “내가 말이야!”하고 자랑하지만 사랑에 닿아 있는 열정은 그 일의 결과를 놓고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 매일 같이 달라지는 수은주의 높이만 온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도 온도가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온도가 그와 함께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따듯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열정입니다. 열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랑에 가 닿은 열정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사랑 없는 열정, 편하게 말해서 냉정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어떤 경우에든지 식지 않는 열정을 갖고 있다면,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해 집니다. 그리고 알파교회 교우여러분, 우리 교회는 50년이 넘은 토론토 역사상 한인교회 중에서 최고의 고령입니다. 여러분, 알파한인연합교회가 사람의 나이로 따지면, 50살이 넘은 갱년기 시기입니다. 제 나이 정도 되는 거지요. 몸 여기저기서 소통의 문제가 생기는 시기이지요. 눈물도 많아지고, 피도 잘 안통해서 혈압도 높아지고… 여러분, 교회의 나이는 항상 30대 초반을 유지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나이는 30대 초반을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자가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단순한 육체적인 나이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액면 그대로라면 우리들 중에 천국에 갈 수 있는 분이 누가 있습니까? 교회의 나이는 항상 30대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외쳤던 복음, 예수님이 그 시대를 향하여 온 몸을 던져 살았던 그 열정의 나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에게도 꿈이 생겼습니다. 30대 예수님처럼, “저러다가 죽지…” 라는 말을 들어 보고 싶다는 거룩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이런 변수, 저런 변수 다 재보면서 머뭇거리는 목회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저를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러다가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시고, 그래서 예수님이십니다. 나도 한번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 여러분 안 드세요? 예수 믿고, 위대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이왕에 한번 투신한 건데 “이러다가 내가 죽지…”라는 생각 한번 들 만 한 삶을 살고 싶은 욕심 없습니까? 저희 큰누님이 사시는 데가 순천입니다. 이민 오기 전에 형제들 집을 쭉 순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순천 가는 길에 광양제철소가 있습니다. 제가 큰매부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제철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철강석을 녹이는 고로입니다. 이 고로는 한번 불을 붙이면 고로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을 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고로의 수명은 약 15년에서 20년이 되는데, 단 하루를 쉬지 않고 24시간 계속 불을 붙인다는 것입니다. 한번 불을 끄면 고로 안의 철강석이 굳어서 폭탄으로도 잘 처리가 안 된답니다. 그래서 24시간 내내 15년 이상을 계속 쉬지 않고 불을 붙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 큰매부의 설명이 이 고로의 불이 제철소의 심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불이 꺼지면 고로도 못쓸 뿐 아니라 제철소도 올스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 예외 없이 마음의 고로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 고로에 사랑의 불이 붙어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이 사랑에 가 닿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의 생은 불 꺼진 제철소 고로처럼 멈춰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예수님을 사로잡았던 그 열정에 나 또한 사로잡히길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변혁되고, 우리의 신앙이 개조되고,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열정. 하나님, 나에게 내 삶을 다 태워 버릴 수 있는 그 열정, 내 삶을 단 한 순간에 불사른다 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그 불을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서른 살, 그 예수님의 뜨거운 열정을 주옵소서. 이것이 오늘 3.1절 100주년기념 및 청년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의 기도제목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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