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폭력의 행진과 평화의 행진

종려주일 / 고난주일 / 3월 네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1:1-11, 요한복음서 12:12-16
종려주일, 폭력의 행진과 평화의 행진
정해빈 목사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고난주일입니다. 4개의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무셨던 마지막 일주일을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복음서 내용의 절반을 할애해서 예수님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요일에 입성하셨고 월요일에 성전을 심판하셨고 화요일에 성전 제사장들 및 헤롯 당원들과 토론하였고 수요일에 마르다/마리아/나사로의 집에서 식사하셨고 목요일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새벽 대제사장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받으시고 오전 9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가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일주일 전 오늘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해외에서 사는 유대인들과 시골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주셔서 조상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셔서 로마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을 그들은 기도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유월절날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해안가에 있는 기병대와 보병을 예루살렘으로 행진시켰습니다. 기병대와 보병은 칼과 창을 들고 말을 타고 화려한 복장을 하면서 서쪽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로마제국은 무력시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였고 백성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에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동쪽 문을 통해서 성전에 들어오셨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은 폭력의 행진을 가리키고 예수님의 행진은 평화의 행진을 가리킵니다. 로마제국은 군마를 타고 행진하였고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행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진을 통해서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빌라도의 행진이 폭력을 과시하고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행진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빌라도의 행진을 환영하지 않았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왕이나 군대장군은 전차나 군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도시에 입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어미 나귀를 타셨고 그 옆에 새끼 나귀가 어미 나귀를 따라다녔다고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마가/누가/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의 기록처럼 새끼를 돌보는 어미 나귀를 타셨을 수도 있고 다른 복음서들의 기록처럼 어린 나귀를 타셨을 수도 있습니다. 어미 나귀이든 새끼 나귀이든 나귀는 전쟁할 때 타는 동물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거나 농사지을 때 필요한 작고 온순한 동물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백성들을 짓밟는 권력자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겸손하신 왕, 평화의 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두가지 행동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예루살렘 평화 행진을 통해서 로마제국의 폭력에 저항하셨고 둘째로 부패한 예루살렘 성전을 폐쇄하심으로 종교권력에 저항하였습니다. 정치권력에 반대하고 종교권력에 반대했던 이 두가지 사건 때문에 예수님은 붙잡히셔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을 사용해서 악에 저항하지 않으시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악에 저항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악령을 쫓아내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이런 예수님을 두려워하였고 음모를 꾸며서 밤중에 은밀하게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행하셨던 평화의 행진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는 폭력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평화의 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약자를 억압하고 조롱하고 지배하는 폭력의 행진을 멈추어야 합니다. 지난 3월 16일 미국 애틀랜타에서는 21살의 백인 청년이 마사지 업소 3곳에 총을 난사해서 총 8명이 사망하였는데 그중에 7명이 여성이었고 4명이 한인 여성이었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독실한 보수 기독교인이었던 이 청년은 선악에 사로잡혀서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는 아시아 여성들을 악이라 생각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잘못된 증오에 갇혀 있는 사람은 약자를 대상으로 화풀이를 합니다. 가장 만만하고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화풀이를 합니다. 일부 미국 백인 남성들에게 여성혐오주의(Misogeny),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부지역은 바이블벨트라고 불릴 만큼 보수적인 기독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인데 남성우월주의/가정폭력/성폭력/성차별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믿으면, 성경을 잘못 읽으면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남성우월주의/인종차별/성차별의 배후에 잘못된 기독교 신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잘못 믿으면, 예수님의 삶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선악에 사로잡히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유럽 기독교인들이 원주민들을 죽이는 일이 반복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어떤 하나님을 믿을 것인지, 폭력의 행진을 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의 행진을 할 것인지를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나무는 대추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다산을 상징하고 오아시스에서 자라기 때문에 물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가다가 종려나무를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종려나무가 있는 곳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물과 그늘이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30미터까지 올라가고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태워도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는 용기와 강인한 생명을 상징했습니다. 또한 옛날 사사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서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기 때문에 종려나무는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가리켰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 우리에게 종려나무와 같은 풍성한 생명과 안식을 주십시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공정한 재판과 정의를 주십시오.”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삶을 어린 나귀와 종려나무로 비유했습니다. 어린 나귀는 평화와 섬김을 가리키고 종려나무는 고난을 견디는 용기와 생명과 정의를 가리킵니다. 어린 나귀는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길을 걸어가고 종려나무는 메마른 사막에서 뿌리를 깊게 내려 물을 찾아내고 오하시스를 만들어 줍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나귀처럼 무거운 짐을 들고 묵묵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면 종려나무처럼 메마른 사막에 물을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나귀같은 삶을 사셨고 종려나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의 말대로 예수님은 죄악의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는 인류의 수레바퀴를 막기 위해서 홀로 저항하셨고 그 결과로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려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의 낭떠러지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죄악의 낭떠러지로 끌고 갈 것인가,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평화의 길을 우리들도 동참할 때, 폭력과 차별과 죄악의 수레바퀴는 그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종려주일/고난주일을 묵상하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과 독재와 폭력의 행진을 멈추고 평화의 행진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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