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현절 여섯번째 주일 / 2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7:5-8, 누가복음서 6:20-26
정해빈목사

 

우리는 요즘 성서일과에 따라서 누가복음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누가복음서가 사회적인 약자들인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한편으로는 기도와 성령을 강조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회정의를 강조합니다. 수직적인 신앙과 수평적인 신앙,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모두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개인적인 경건생활도 열심히 해야 하고 동시에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서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다른 복음서를 읽을 필요 없이 누가복음서만 읽고 이 복음서의 말씀대로 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는 그 당시 사회에서 소외받고 있었던 여성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성탄절 이야기를 보면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요셉이 성탄절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누가복음서에는 여성들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서 8장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여성 제자들이 나옵니다.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 그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이 갈릴리를 돌아다니려면 그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여성들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이 예수님과 매일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동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뒤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주변에는 겉으로 드러난 남자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여성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갈릴리에서 온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 곁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서를 읽어보면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나은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을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 교단들은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1893년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었습니다. 130년 전에는 여성들이 투표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 사회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조차도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을 차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에 쓰여진 누가복음서는 여성들을 예수님의 모범적인 제자들로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서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복음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슬피 우는 사람은 웃게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핍박받는 사람은 하늘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4가지의 축복을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부요한 사람과 배부른 사람과 웃는 사람과 모든 사람에게서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에는 8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서에는 4가지 복과 4가지 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서 말씀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먹이시고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시고 평지로 내려오실 때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과 두로와 시돈 해안 지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또 병에서 고침받고 귀신에서 고침받기 위해서 몰려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서 여러분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를 당합니다.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난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것을 능력주의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으니까 부자처럼 살 자격이 있고 당신은 능력이 없어서 가난해졌으니까 가난이 당신 책임이라고 말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이 말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는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도 일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내가 가난한 가정,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집안과 좋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게 만들고 부자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런 생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픔과 상처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시험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간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다가 깊게 파인 웅덩이에 제일 먼저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을 가장 먼저 찾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가장 먼저 채워 주십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들은 에너지를 적게 쓰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환경파괴/기후변화는 사람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하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이산화탄소 배출과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부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에너지 소비는 늘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지금보다 더 가난해져야 지구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일인당 에너지 소비를 남들보다 많이 하는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에너지 소비를 많이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먼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보다 자신이 가진 소유를 더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가진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이 귀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물질이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이 재산입니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서에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는 이야기(16장), 욕심많은 부자는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16장), 세금으로 재물을 쌓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하고 재물을 나누는 이야기(19장)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기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정의와 나눔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우리 스스로가 에너지와 소비를 줄이는 가난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님을 멀리하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사는 가시덤불과 같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언제나 열매를 맺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웃을 의지하고 자연을 의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주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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