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열병에서 일어나 이웃을 섬기다

주현절 다섯번째 주일 / 2월 첫번째 주일
마가복음서 1:29-39, 고린도전서 9:16-23
주현절, 열병에서 일어나 이웃을 섬기다
정해빈 목사

 

사람의 정상적인 신체온도는 36.5℃ 입니다. 사람은 에너지의 75% 이상을 체온유지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해 교회당 입구에서 체온을 재보면 건강한 사람들의 체온이 똑같이 36.5℃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신체가 정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체온이 36.5도 인 것은 그 온도에 다다랐을 때 몸 안의 효소 활동이 가장 활발하기 때문입니다. 체온이 1도가 떨어지면 면역력이 30% 감소하고 1도가 높아지면 면역력이 5배 증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체온이 떨어지면 몸 안의 장기와 근육이 딱딱해지고 혈액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아프면 체온이 저절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몸 안에 들어온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 몸이 체온을 높여서 백혈구들을 불러 모으기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 적당히 열이 올라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고열이 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고열이 나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바이러스가 너무 많아서 바이러스에 의해 몸이 공격당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입니다. 코로나에 감염될 경우 무증상으로 감염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40도 가까이 체온이 높아지고 피로, 마른기침, 미각과 후각 기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때는 빨리 고열을 낮추어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를 겪을 때 몸에서 열이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열불이 난다고 표현을 합니다. 세계정신의학사전에 화병(Hwa-Byung)이 등록되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경쟁사회가 주는 스트레스, 정치/경제/사회의 불안, 가족/직장에서의 갈등, 재난이나 정신적인 충격 등이 화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로 인한 격리생활이 길어지면서 육체적/경제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격리생활이 길어지면 화가 쌓이거나 반대로 우울증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인데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분노/화가 쌓이기도 하고 반대로 무기력/우울증이 쌓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병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열병/우울증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우리들 모두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마가복음서 1장을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후에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셔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장소가 회당에서 가정집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처음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회당에서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서기관들/율법학자들 때문에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을 나오셔서 동네와 가정집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시몬의 장모가 왜 열병에 걸려 누워있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워있을 때 큰 고통을 받습니다. 육체의 고통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가사일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열악한 사회환경, 영양부족, 위생, 풍토병 때문에 열병을 앓았을 수도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열병을 앓았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쳤다는 소식이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고침받기 위해 시몬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시몬의 집이 사람들의 모임 장소/초대교회가 되었고 열병에서 고침받은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서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으켰다”는 헬라어는 부활(Egeiro, 에게이로)을 가리키고 “시중들었다”는 헬라어는 섬김(diakoneo, 디아코네오)을 가리킵니다. “일어남과 시중” 이 두가지 단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누워있는 사람을 일으키셨고 사람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부활에는 미래의 부활도 있지만 현재의 부활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도 부활이지만 지금 누워있는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일상을 회복하고 이웃을 대접하는 삶으로 바뀌게 된 것도 부활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똑같이 재현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열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만이 끝까지 곁에 있었습니다. 시몬의 장모도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맨처음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일어나는 곳이고 섬기는 곳입니다. 열병/화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일어나서 이웃을 섬기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밤이 될 때까지 소문을 듣고 온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이른 새벽에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찾았을 때, 주님은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내가 이 일을 하러 왔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도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많은 환자들을 고치는 일은 영광의 일이면서도 동시에 힘든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은 좋은 일이면서도 때로는 힘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조용한 시간에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새힘을 얻으셨습니다. 사람들을 만남으로서 힘을 얻는 순간도 있지만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홀로 기도함으로서 힘을 얻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보여줍니다. 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의 순간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는 첫째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키는 곳이고 둘째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곳이고 셋째 홀로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 3가지 모습이 모두 갖추어져 있을 때, 우리의 삶은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은 복음 전도자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고 해서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 하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예루살렘 모교회가 바울을 파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바울이 파송받아서 고린도 교회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을 대접할 필요도 없고, 바울도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대접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모교회가 바울을 파송한 것은 아니었고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파송을 받았습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예루살렘 모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얼마든지 개척자로서 이에 합당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바울은 최고 엘리트였고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기 때문에 교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엘리트였던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받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고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헬라인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거리낌 없이 헬라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열병에서 일어난 시몬의 장모는 이웃을 대접하였고 엘리트였던 바울은 변화받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시몬의 장모와 바울처럼, 섬김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우리들의 작은 노력으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주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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