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예루살렘의 폭력과 베들레헴의 평화

주현절 두번째 주일/1월 두번째 주일
주현절, 예루살렘의 폭력과 베들레헴의 평화
마태복음 2:1 – 12
정해빈 목사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과 소년 시절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님들, 지금 말씀드리는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로마 황제가 옛날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북쪽 갈릴리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는 남쪽 베들레헴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관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해산을 했고 양을 치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어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마구간 이야기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마태복음 이야기만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마리아와 요셉은 본래 자기들이 살던 베들레헴 집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는데 저 멀리 동쪽에 사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물었습니다. 헤롯 왕이 대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미가서 5장 2절 말씀에 근거해서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에 가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고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은 군대를 보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헤롯을 피해서 이집트로 피신을 떠났고 헤롯이 죽은 다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쪽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정착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분위기와 베들레헴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폭력과 음모가 있었고 베들레헴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롯 왕은 본래 유대 사람이 아니라 에돔 사람이었는데 로마 권력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동쪽을 차지하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로마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다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 다음에는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그 덕분에 유대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잔인하고 의심과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10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의심이 많아서 부인과 아들과 장모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군대를 동원해서 어린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헤롯 뿐만 아니라 헤롯 옆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지식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생명과 평화와 정의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폭력과 음모가 있었다면 베들레헴에는 기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버리려고 했다가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보호하기로 결심했고 나중에는 헤롯의 박해를 피해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께 선물을 드렸고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계시를 받고나서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동방박사들은 신실한 사람들이었고 어린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폭력이 넘쳤고 베들레헴에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왈터 부르거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구약학자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거리가 9마일이라고 해서 “9마일의 차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9마일이면 대략 15km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하지만 두 곳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큰 도시 예루살렘에는 권력과 종교와 물질이 모여 있었지만 그곳에는 폭력이 있었고 베들레헴은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지만 그곳에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 이집트 바로 왕이 히브리 사람들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싫어서 사내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아기 모세를 보호했습니다. 구약성경을 해설한 미드라쉬(Midrash) 책을 보면 모세의 부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가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자 많은 히브리 남자들이 바로가 무서워서 결혼을 안 하거나 이미 결혼한 남자는 아내를 버리거나 이혼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암람(Amram)이라는 이름을 가진 레위인은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약혼자와 결혼해서 아론과 미리암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장차 그를 통해 모세가 태어날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암람이라는 레위 사람이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린 아이는 미래의 희망인데 어린 아이를 죽이면 미래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어른들에게는 어린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헤롯의 명령을 거부한 요셉과 마리아와 동방박사들, 바로의 명령을 거부한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 모두가 생명을 선택하고 보호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아기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난간 것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진정한 왕/메시야/지도자는 자신의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을 몸소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저 옛날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도 이집트로 가서 같은 고난을 겪음으로서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자마자 난민이 되어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기 위해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지난 성탄절 즈음에 네덜란드에서 추방 위기에 몰린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두 달 동안 24시간 예배를 드린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는 국가도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어떤 교인은 앞에 나와서 찬양하고 어떤 교인은 기도하고 어떤 교인은 간증하면서 계속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두 달 동안 쉬지 않고 예배드렸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언제까지 계속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법적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가 고통받는 한 가정을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2장에는 억울하게 고통받는 여인들과 외국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4명의 여인들이 나오는데 다말은 남편이 죽고 나서 친정으로 쫓겨난 사람이었고, 룻 역시 남편을 잃고나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외국 며느리였고, 기생 라합은 기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고, 우리아의 아내 역시 다윗이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바람에 과부가 되었고 강제로 다윗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억울하고 불행하고 차별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을 예수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온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종교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른 외국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에 제일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황제나 헤롯을 경배하지 않고 아기 예수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고 오늘날로 말하면 깨어있는 시민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의 폭력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평화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동방박사들, 모세의 부모와 히브리 산파들처럼 연약한 생명을 축하하고 기뻐하고 보호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같은 교회가 아니라 베들레헴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통받는 사람들, 외국인/나그네/낯선 자들/난민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그런 따뜻한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Violence of Jerusalem and peace of Bethlehem
Matthew 2:1 – 12

In the time of King Herod, after Jesus was born in Bethlehem of Judea, wise men from the East came to Jerusalem, asking, “Where is the child who has been born king of the Jews? For we observed his star at its rising, and have come to pay him homage.” When King Herod heard this, he was frightened, and all Jerusalem with him and calling together all the chief priests and scribes of the people, he inquired of them where the Messiah was to be born. They told him, “In Bethlehem of Judea; for so it has been written by the prophet: ‘And you, Bethlehem, in the land of Judah, are by no means least among the rulers of Judah; for from you shall come a ruler who is to shepherd[d] my people Israel.’” Then Herod secretly called for the wise men and learned from them the exact time when the star had appeared. Then he sent them to Bethlehem, saying, “Go and search diligently for the child; and when you have found him, bring me word so that I may also go and pay him homage.” When they had heard the king, they set out; and there, ahead of them, went the star that they had seen at its rising, until it stopped over the place where the child was. When they saw that the star had stopped, they were overwhelmed with joy. On entering the house, they saw the child with Mary his mother; and they knelt down and paid him homage. Then, opening their treasure chests, they offered him gifts of gold, frankincense, and myrrh. And having been warned in a dream not to return to Herod, they left for their own country by another road. Amen. (Matthew 2:1 – 12)

The story of Matthew chapter 2 reveals the contrast between the violence of Jerusalem and the peace of Bethlehem. Whereas King Herod, the high priest, and scribes in Jerusalem sought to kill baby Jesus, Joseph, Mary, and the Magi in Bethlehem worshiped and protected him. Today’s scripture shows that the church must be the place of joy and peace. Both Joseph, Mary, and Magi in Matthew, and Moses’ parents and Hebrew midwives in Exodus devoted their lives to protect a baby endangered. Their stories teach us that the church must celebrate and protect those vulnerable lives. Just as Jesus’s parents rejoiced with the wise men from the East, we are also called not only to support those in need, but also to celebrate our life with foreigners, strangers, and Gentiles. May God lead us to make a good church, and to live together with suffering people, foreigners, strangers, and refugee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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