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기념주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부활절 두번째 주일/4월 네번째 주일
창립기념주일,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도행전 5:27 – 32
정해빈 목사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입니다. 라인홀드 니버와 리차드 니버 형제가 유명한데 라인홀드 니버는 기독교와 사회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고 리차드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기독교와 사회문제에 대한 책을 읽다보면 꼭 만나는 사람이 라인홀드 니버입니다.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 중 한명으로 니버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니버는 젊은 시절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집단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고 쓴 책이 1932년에 출간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입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헨리포드가 설립한 자동차 공장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한 대량생산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를 보면 노동자가 된 채플린이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정신없이 나사를 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포드는 노조를 싫어해서 노조를 탄압하기도 했고 대량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디트로이트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남부지방에서 흑인들이 많이 이주했는데 백인들이 흑인들을 인종차별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니버는 노동자들과 흑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 책임자들을 만나기도 했고 경영자들과 노동자들을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개인들 사이의 갈등에는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집단들 사이의 갈등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서로의 갈등이 도저히 해결이 안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법정에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하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집단은 도덕/양심/사랑에 무감각합니다. 오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인간 역사를 자세히 보면 민족/계급/인종 갈등이 있을 때 한 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개인 이기주의보다 집단 이기주의(group egoism)가 훨씬 강하다는 것을 니버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니버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하지만 집단과 집단 사이에는 정의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지만 여러 명이 집단을 이루어서 한 사람을 괴롭히면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별로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집단/조직/국가가 무섭습니다. 집단/조직/국가는 본래 성질상 자신들의 힘을 확대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단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도덕/양심/사랑을 쉽게 내버리고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단/조직/국가의 이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하고 적절한 힘의 균형과 정의로운 사회제도가 집단/조직/국가의 탐욕과 이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니버는 말했습니다.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나치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 죄로 붙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겉보기에는 이웃집 옆 사람처럼 아주 선량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은 아무 생각없이 상관이 시킨 대로만 했기 때문에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 집단/조직에 들어가면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악을 행할 수 있는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인 사람도 집단/조직에 들어가면 양심이 마비되어서 끔찍한 악을 행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집단/조직이 얼마나 무섭고 이기적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 말씀을 보며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과 공의회가 사도들/제자들을 옥에 가두고 신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제자들은 붙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시고 높이시고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해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을 했습니다. 사도들이 수동적으로 증언한 것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도들은 예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순교자(martyr)라는 말은 증인을 가리키는 헬라어 Martus에서 왔습니다. 증인(martus)이라는 말에서 순교(martyr)가 나왔고 순교라는 말에서 증인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종교의 박해를 견디면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과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니버가 말한 것처럼 개인이 변하는 것은 약간 가능할지 몰라도 집단/조직이 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로마제국과 예루살렘 종교에 의해서 순교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증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증언은 결국 사람을 변화시켰고 마지막에는 가장 이기적이고 악을 행하는 집단/조직/국가를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을 지라도 부활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어제 2019년 4월 27일은 일 년 전에 있었던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제 토요일 한국에서는 시민단체가 자발적으로 휴전선 서쪽 끝 강화도에서 동쪽 끝 강원도까지 20만 명이 서로 손을 잡는 “미무장지대 평화손잡기운동, DMZ Peace Human Chain Movement”가 있었습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상해임시정부 100주년,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면서 남북한이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를 통해서 평화와 화해와 번영의 길로 나가자는 뜻에서 평화손잡기운동 행사를 실시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도덕/양심/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집단/조직/국가는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도덕/양심/사랑이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일본/한국, 러시아/중국/북한이 오직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집단/조직/국가의 갈등에는 정의가 개입해야 하고 집단/조직/국가가 이기적이 되지 않도록 우리들의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처럼 우리들은 부활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도 중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명도 있고 더 나아가 집단과 사회를 구원하고 치료하고 회복하는 사명도 있습니다. 개인에게 회개와 용서와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으로 은혜받고 용서받고 축복받는 데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노동으로 혹사당하는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흑인들을 위해서 일하고 국가와 회사의 집단이기주의에 맞서서 정의를 외쳤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개인을 향해서는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집단과 조직과 국가를 향해서는 정의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1967년부터 지금까지 52년 동안 토론토에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 법정에서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외쳤던 것처럼, 죽음과 절망과 불의를 몰아내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aste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cts 5:27 – 32

When they had brought them, they had them stand before the council. The high priest questioned them saying, “We gave you strict orders not to teach in this name, yet here you have filled Jerusalem with your teaching and you are determined to bring this man’s blood on us.” But Peter and the apostles answered, “We must obey God rather than any human authority. The God of our ancestors raised up Jesus, whom you had killed by hanging him on a tree. God exalted him at his right hand as Leader and Saviour that he might give repentance to Israel and forgiveness of sins. And we are witnesses to these things and so is the Holy Spirit whom God has given to those who obey him.” (Acts 5:27 – 32)

Today’s Bible passage reminds us that we are called to be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Although the apostles were persecuted by the Roman empire and Jerusalem authority, they did not stop preaching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and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of God. As Reinhold Nieber says, today’s scripture indicates that collective repentance is more difficult than personal change. Nevertheless, we believe that the power of resurrection will change the world, and eventually, all individuals and groups will be transformed into the Gospel. In commemoration of the 52nd anniversary of the founding of the church, we once again confess that God has called our church not only for personal salvation but also for social salvation.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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