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나무와 숲을 돌보는 사람

창조절 첫번째 주일 / 9월 첫번째 주일
창세기 2:4-10, 15, 사도행전 17:22-28
창조절, 나무와 숲을 돌보는 사람
정해빈 목사

 

성도님들 다시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지난 3월 중순부터 8월까지 5개월 동안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들 모두 서로 보고 싶었고 함께 예배드리는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떨어져 앉아서 예배를 드리지만 다시 교회당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코로나19를 경험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쓰신 “코로나 시대가 전해주는 메시지”라는 글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글이기 때문에 소개해 드립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입니다. 막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며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닦으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거울을 닦으면 자신이 보이고 마음의 창을 닦으면 이웃도 보일 것입니다. 사람과 거리를 두라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끼리 모여 살면서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기와 물과 자연의 생태계를 돌보며 조화롭게 살라는 말입니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 마음이 넉넉하여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면 예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위안을 얻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예배당에 가지 말고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나 고요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 나라와 그 뜻에 가까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집합을 하지 말라는 것은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라는 뜻입니다. 모여서 선동하거나 힘자랑하지 말고 사람이 그리운 이들의 벗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무거운 짐을 홀로 진 이들과 나눠진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포근해질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인류를 위협하는 3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이었습니다. 3가지 모두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자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시대를 맞아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합시다. 마스크를 쓰며 말을 줄이고, 손을 씻을 때 마음도 씻고,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연을 더 가까이 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할 때, 이 세상은 더 좋은 세상으로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최근 교회가 코로나19를 발생시키는 사태를 보며 회개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코로나19 감염사태는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멈추어 선 동안에도 욕망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삶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거대한 문명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돌이켜 사는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는 도리어 코로나19의 슈퍼전파자가 되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다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는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분노와 아우성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가 결코 세상보다 이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세상 앞에 미안합니다. 회개로 무릎을 꿇고 참회로 엎드립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고 세상을 화해시키고 세상에 생명을 주지 못하고 반대로 집단이기주의, 거짓우월감과 자가당착, 편견과 혐오를 전파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늘의 음성을 듣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020년 9월부터 창조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의 설교 주제는 “창조절, 나무와 숲을 돌보는 사람, Forest Sunday”입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자세히 읽으면 창조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첫째날에는 빛을 만들고 둘째날에는 물과 물 사이에 하늘을 만드시고 여섯째날에는 사람을 만드시고 이런 식으로 첫째날부터 여섯째날까지 창조의 과정이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장 4절을 보면 창세기 2장에서는 땅만 있었고 물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제일 처음 나옵니다. 창세기 1장은 맨처음부터 물이 너무 많아서 물과 물 사이를 떼어놓아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기록했는데 창세기 2장은 맨처음부터 땅에 물이 없었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 창조 이야기가 서로 다른 것은 쓰여진 시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은 바벨론 포로 시대에 쓰여졌는데 바벨론 지역은 물이 너무 많아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물과 물 사이를 떨어뜨려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창세기 2장은 가나안 지역에서 쓰여졌는데 가나안 지역은 물이 너무 없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메마른 땅에 물을 주셨다고 기록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장을 보면 맨 처음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와 풀이 없었고 메마른 사막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시게 하셨고 나무와 풀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습니다. 나무/숲을 돌보는 동산지기/삼림지기의 사명이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지구라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 지구를 돌보는 사람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지구/에덴동산을 잘 돌보는 사명이 있는데 우리들이 이 사명을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두가지 나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무 자체가 생명이고 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선과 악을 알게 해 줍니다. 나무는 비를 저장하고 동식물을 먹이고 산소를 배출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나무/숲이 있으면 그곳에 생명과 선이 있고 나무/숲이 없으면 그곳에 죽음과 악이 있습니다. 중세시대 수도원에 사는 수녀들은 매일 아침마다 나무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포옹을 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나무가 곧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고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숲을 창조하셨고 동시에 나무/숲 안에 살아계십니다. 중세시대 수녀들이 십자가 나무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매일 아침마다 나무를 껴안고 예수님 잘 주무셨어요? 그렇게 껴안고 인사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나무,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아끼고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나무/숲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무/숲이 있으면 사람이 살고 나무/숲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창조절 절기를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가서 에덴동산을 잘 돌보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동산지기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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