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숨어계시는 하나님

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욥기 38:1-7, 히브리서 5:7-10
창조절, 숨어계시는 하나님
정해빈목사

 

일본의 대표적 현대소설가인 엔도 슈사쿠가 쓴 [침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읽어볼만하고 생각할 점이 많은 소설입니다. 17세기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이 일본에 기독교를 전했는데 일본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주로 농민 기독교인들이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매달려서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밟고 지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만 배교하면 안 되고 너희들에게 기독교를 전한 서양 선교사들도 기독교를 부인해야만 너희들을 살려주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일본에서 33년간 체류했던 페레이라 신부는 기독교 신앙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결정합니다. 이 소설을 보면 그가 십자가를 밟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할 때 하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 음성을 들은 페레이라 신부는 농민들을 살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를 밟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2명의 제자가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에 들어가서 스승을 만났고 스승을 통해서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번째 제자는 스승이 배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고 스승과 달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지만 두번째 제자는 존경하는 스승이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한 것을 이해하고 자신도 배교를 합니다. 그리고는 배교한 사제라는 오명을 쓴 채로 일본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를 결정한 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번째로는 신앙 때문에 구덩이에 매달려서 죽어가는 농민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결정했고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견딜 수 없어서 배교를 결정했습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동료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이 엄청난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농부들이 구덩이에 넣어진 뒤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만약 내가 페레이라 신부라면,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배교하지 않고 농민들과 함께 순교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죽어가는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배교하지 않고 순교한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설사 내가 페레이라 신부처럼 배교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나를 쉽게 비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페레이라 신부는 농민 기독교인들이 고문을 받으며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배교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한 두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존경받는 페레이라 신부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순간이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반드시 나타나셔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나타나셔서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악한 사람들을 징계하셔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도대체 내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있는가? 우리들도 인생을 살면서 페레이라 신부처럼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욥기 38장은 욥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욥기는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3명의 친구와 오랫동안 씨름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신다면 나의 억울함을 말할 것이고 만약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들으시면 나에게 무죄를 선언할 것이라고 욥은 확신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쪽에 가 보아도 주님은 계시지 않고, 서쪽과 남쪽과 북쪽에 가보아도 주님이 계시지 않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렇게 욥이 오랫동안 탄식한 후에 욥기 38장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욥에게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침묵 끝에 나타나셔서 욥에게 많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숨어있고 너의 억울함을 모른 체한다고 탄식하는데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거기에 있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고통받을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똑같이 그럼 너는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에 어디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신비로운 원리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그래서 억울한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피조물인 네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났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책망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욥을 사랑하셨고 욥에게 나타나셨고 욥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욥을 위로하셨고 욥의 생각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독일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먼 곳에 숨어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는 사람과 같다” 엄마와 아이가 큰 집에서 숨바꼭질을 합니다. 엄마를 찾지 못한 아이는 엄마가 나를 버리고 멀리 가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엄마를 원망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엄마가 멀리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야, 엄마 여기 있어, 잘 찾아봐.” 아이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열심히 엄마를 찾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엄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에게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야, 엄마는 집 안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잘 찾아봐.” 엄마는 아이에게 먼저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최선을 다해서 엄마를 찾아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가 무엇을 하는지를 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의 존재가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헛기침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가 숨어있는 엄마를 열심히 찾는 것처럼, 우리들도 숨어계신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만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히브리서 5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고 순종의 삶을 통해서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에도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주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신실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구세주가 될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열심히 당신을 찾는 사람에게만 나타나 주십니다. 문은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을 줄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과 씨름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숨어계실지라도 그리스도처럼 흔들리지 않고 순종과 신실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으며 신실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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