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1, 히브리 난민들

성령강림절 일곱번째 주일 / 7월 첫번째 주일
출애굽기1, 히브리 난민들
출애굽기 1:1 – 11
정해빈 목사

 

여러분에게 사진 2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최근 제주도에 난민 신청을 한 예멘 사람들 사진입니다.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남쪽에 예멘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지금 내전이 벌어져서 많은 국민들이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로 떠났는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다 수용을 못하니까 약 500명이 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에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20만 명이 인터넷으로 청와대에 청원을 넣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예멘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난민 심사를 해서 가능하면 받아주자는 청원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고 종교도 이슬람이고 범죄를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그 사람들을 받아주면 안 된다는 청원이었습니다. 그렇게 반대 청원을 한 20만 명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슬람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니까 받아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테러를 일으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극단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슬람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있습니다. 난민 심사를 해서 받을 사람은 받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받지 말자고 청원하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받지 말자고 청원을 했습니다. 어쩌다가 한국 기독교인들이 일반 국민들보다 더 폐쇄적인 사람들이 되었을까, 누구보다도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차가운 사람들이 되었을까, 한국 기독교가 저런 식으로 하면 일반 국민들이 한국 기독교를 어떻게 볼까, 저런 식으로 하면 전도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전체 기독교인들이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런 생각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저렇게 많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제주도에서 과수원을 하는 기독교인이 아이가 3명 있는 가정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신문 기자가 왜 예멘 가정을 집으로 데리고 왔냐고 질문하니까 집 주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희 집에 빈 방이 하나 있어서 가족을 데리고 왔습니다.”

두번째 사진은 최근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s 표지 사진입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어린 아이가 서로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부모가 어린 자녀와 함께 밀입국을 한 경우 일단 석방한 뒤 재판을 거치도록 해왔기 때문에 가족이 헤어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불법 이민자 부관용 정책”을 발표하면서 부모와 함께 입국한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해서 따로 구금 시설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구금 시설이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어린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백악관에 따르면 ‘무관용 정책’ 도입 후 23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부모와 떨어져 임시시설로 보내졌습니다. 동물 우리처럼 철장이 쳐진 곳으로 아이들을 격리시켰습니다. 보온 담요 한 장 주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부모와 떨어진 아이들은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인 불안을 겪게 됩니다. 언론을 통해서 부모와 헤어진 아이들이 울고 있는 모습이 공개되자 트럼프의 부인인 멜라니가 무관용 정책에 반대한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트럼프는 마지못해서 부모와 아이들을 격리시키는 정책을 취소시켰습니다. 부모와 아이들을 격리시키는 정책은 취소하겠지만 불법 이민자 무관용 정책은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미국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3000년 전 이집트에도 있었습니다. 미국 이야기는 난민들의 부모와 아이들을 떼어놓는 이야기이지만 3000년 전 이야기는 난민들의 아이들을 죽이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 왕이 히브리 노예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나라에 위협이 되니까 히브리인들이 여자 아이를 낳으면 살려주고 사내아이를 낳으면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가족 70명이 기근을 피해서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주라고도 말할 수 있고 난민을 신청했다고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땅이 없어서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을 히브리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떠돌이/나그네/방랑자를 가리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해서 그들의 말을 히브리어라고 부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히브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맨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 이야기를 제외하고 제일 처음 나오는 이야기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인데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과 친척을 떠났습니다. 옛날에 고향과 친척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태어난 지역/집안에 따라서 대체로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서, 믿음의 조상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난민이 됨으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도 난민 생활을 하였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후손 70명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가서 난민 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대교/기독교 신앙이 난민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라오 왕은 공사 감독관들에게 히브리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야곱의 후손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어린 시절에 이집트로 팔려갔지만 꿈을 잘 해석하고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 덕분에 처음 애굽에 도착했을 때 힘들지 않게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죽고나서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 왕이 등장하면서부터 히브리 사람들은 노예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고대 사회에서 자신을 돌봐줄 후원자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고대 사회를 후견인(patron)-수혜자(client) 사회라고 말합니다. 후견인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밑에 사람들을 돌봐 줍니다. 그러면 그 혜택을 입은 수혜자들은 후견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렇게 고대 사회는 후견인-수혜자 관계를 맺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때는 요셉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이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었지만 요셉이 죽고 나서는 더 이상 히브리 사람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후견인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후견인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관심은 유대인이 아니라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나 모여 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 자신을 보호해 줄 후견인을 갖지 못한 사람들, 과거에 노예였던 사람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교회가 바로 그들을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후견인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갈길을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진실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후견인/보호자 되심을 믿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난민의 경험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왔고 16만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많은 해외 나라들이 우리 민족을 도와 주었습니다. 우리들이 어려울 때 그런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들이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후견인이 되어 주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odus1, Hebrew refugees
Exodus 1:1 – 11

These are the names of the sons of Israel who came to Egypt with Jacob, each with his household: Reuben, Simeon, Levi, and Judah, Issachar, Zebulun, and Benjamin, Dan and Naphtali, Gad and Asher. The total number of people born to Jacob was seventy. Joseph was already in Egypt. Then Joseph died, and all his brothers, and that whole generation. But the Israelites were fruitful and prolific; they multiplied and grew exceedingly strong, so that the land was filled with them. Now a new king arose over Egypt, who did not know Joseph. He said to his people, ‘Look, the Israelite people are more numerous and more powerful than we. Come, let us deal shrewdly with them, or they will increase and, in the event of war, join our enemies and fight against us and escape from the land.’ Therefore they set taskmasters over them to oppress them with forced labour. They built supply cities, Pithom and Rameses, for Pharaoh. Amen. (Exodus 1:1-11)

Exodus chapter 1 says that 70 families of Abraham’s grandson, Jacob’s family, escaped from famine and migrated from Canaan to Egypt. They were called “the Hebrews” which refer to travelers, strangers, and wanderers. These Hebrews became the roots of Judaism and Christianity. Abraham, the fathers of faith, was called by God to leave his hometown and relatives. In the old days, people’s destiny was usually determined according to the region and tradition where the person was born. Abraham, however, refused his fate, left his hometown, relatives and father’s house, and became an ancestor of faith. His story reminds us of the fact that Abraham and 70 descendants of Abraham’s grandson, Jacob, were all refugees. The Jewish / Christian faith began with these refugees. The Hebrews could live without difficulty when Joseph was the prime minister of Egypt. But after the death of Joseph, the Hebrews had to live slavery. Through this story, we can see how important it is to have a patron in ancient society. Ancient society is often referred to as a patron-client society. The custodian takes care of the people below, and the beneficiaries are loyal to the custodian. The Apostle Paul said that the church should be a place to care for those who have no power. He said that as the Lord has taken care of the poor and the sick, a church must be the place to protect those who have no power. We remember that when Korea was suffering from war, many foreign countries helped our nation. Since we have received such help, we should be able to help others. We are called to be a church that will rejoice with those who suffer.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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