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신앙의 거리

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세번째 주일
현실과 신앙의 거리
출애굽기(Exodus) 14:1-16
유상진 목사

 

신학을 공부할 때 등장하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뭐 저 같은 사람이 신학을 공부했다고 하는 게 좀 그렇긴 합니다.
저는 신학교를 뒷문으로 들어가서 뒷문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저도 어디서 주워들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중에 하나가 “Sitz im Leben”이라는 말입니다. 이 독일어를 우리말로 옮기자면, “삶의 자리”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이미 100년 전에, 헤르만 궁켈이라는 학자가 시편을 연구하면서 만들어 낸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성서가 쓰여 졌을 때, 그 성서의 기자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 누구를 향해 그 글을 썼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성서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설명 드리면 여러분의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적에 했던 “숨바꼭질” 놀이가 있지요? 어떻게 하나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그렇게 네 박자를 맞추어서 술래가 눈을 감은 채로 말하잖아요?
우리는 멀리서도 아이들의 이 노래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 ‘아아, 아이들이 놀고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자리를 떠난 언어는 추상화를 면치 못합니다. 그 삶의 자리가 싹 빠지고, 글이 되어서 시공을 사이에 두고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해서 읽으면요?
“꼭꼭 숨어라! 니 머리카락이 보이려고 한다!”
그것은 무서운 신적인 진노 앞에 서 있는 초라한 피조물의 이미지가 그려질 수밖에 없지요. 삶의 자리를 떠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이들의 앳된 노래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의 심판을 담당하는 천사의 서슬 퍼런 격성으로 변합니다. 엄청난 의미의 차이가 생기는 거지요.
아니, 이 삶의 자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의미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그 때의 본의와 이 때, 지금의 해석의 거리는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때 거기, 혹은 지금 여기의 삶의 자리를 인식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이토록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삶의 자리 위에서만이 오늘 여기의 의미가 더욱 뚜렸해지기 때문입니다.
말을 좀 그럴 듯하게 해서 “삶의 자리”이지, 이것을 한 단어로 줄인다면 그냥 우리가 사는 “현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북미 캐나다 토론토의 이민자로서의 현실 위에서만이 뚜렷해지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골백번은 더 읽고 들었을 이른바 이스라엘의 홍해도하 사건의 초반부를 읽었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해 주셔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현실적입니까? 솔직히요.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도하 이야기가 굉장히 신나고 감동적입니까?
아니면, 너무나 허무맹랑합니까? 허무맹랑하다는 말이 좀 불경스럽게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흥분과 감동이 없이 읽었다면 그것 하나는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읽은 오늘의 말씀과 우리의 현실의 차이, 말하자면 어떤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밖에도 성서에 등장하는 수 없이 많은 동화 같은 이야기는 어떤가요? 일테면, 창세기 11장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바벨탑이야기라든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는 어떠세요? 왜,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아서 소금 기둥이 되잖아요? 정말 동화책 속에서 나올 법한 그런 이야기잖아요?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 찬치집 이야기는요? 예수님께서 맹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시잖아요? 아마 이런 기술이 지금 있다면, 세계최고의 주류업체를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계최대 주류업체 사장님이 되신다? 요건 좀 신이 나기도 하네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일들이 이 현실에서 일어 날 수가 없잖아요?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도 똑 같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으나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그래서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성서동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일명 이스라엘 백성의 홍해 도하사건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야기, 그 서막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홍해의 기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홍해의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진 그저 꾸며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 하세요? 아니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사실 기독교 안팎에서 홍해 사건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끊임이 없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라는 거지요.
이것을 오늘의 설교 제목으로 바꾸면, “현실이냐? 신앙이냐?”이겁니다. 결국 그 양 끝단의 거리감에 대한 논쟁인 거지요.
아마도 이 홍해의 사건이 인간의 인지 하에서 한 번이라도 일어난다면, 이러한 논쟁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고 생각하는 수에즈만의 직선 단거리가 24Km나 되는데, 우리나라의 진도나 서해의 어떤 섬들처럼 조석의 차이로 생기는 바닷길이 한번이라도 열리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이 홍해 논쟁의 종착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홍해나 지중해처럼 폐쇄된 바다에서는 조석간만의 차가 거의 없거든요. 시나이반도를 가운데 두고 홍해가 이렇게 V자 모양을 하고 있잖아요? 제 손가락을 보세요.
여러분이 보시기에 왼쪽(나는 오른쪽)에 있는 것이 수에즈운하와 열결되는 수에즈만쪽 홍해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아카바만쪽 홍해입니다. 아직 24Km나 되는 수에즈만 쪽의 홍해는 커녕, 18Km의 아카바만 쪽 홍해도 한 번도 갈라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것이 단순한 신앙적인 교훈의 이야기냐, 아니면 현실적인 이야기냐는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해도하 사건은 우리 기독교든, 유대교든, 이슬람교든 각자의 경전에서 굉장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이집트의 최정점에 있는 사건이 바로 홍해도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출이집트의 최정점, 홍해를 앞에 두고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좀 실망스럽습니다.
성서는 출애굽기 14장 11절 이하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과 이집트의 사이에서 아주 애간장을 태웁니다. 우리가 살던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까지 끌고 나와서 우리를 죽게 하느냐? 여기서 죽는 것 보다, 이집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게 항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가라하신 가나안과 이집트의 사이에서 애가 끓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출이집트를 계속 감행할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겁니다.
아니, 파라오가 회유한다거나, 어떻게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다면, 출이집트가 아니라, 환이집트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도 남을 기세 아닙니까? 오늘 이렇게 홍해 바닷가는 가나안과 이집트, 출이집트와 환이집트의 마지막 결정 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탈출”이라고 할 때, 어디서 도망쳐 나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말하는 탈출은 어디서 나오는 것 보다 어디로 향해 가는 것에 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잖아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서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실명도, 할아버지 나홀의 실명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전의 셈의 족보까지 노아와 그 이전의 아담까지 연결되는데 조상이라면, 당연히 그 윗대의 셈, 노아,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은 선조에 대한 불충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 이하에 아브라함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지 아시겠어요? “어디서” 만이 아니라, “어디로” 향했는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출이집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가 출이집트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가 어디냐? “이집트냐? 가나안이냐?”라는 결정점,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최정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길을 걷는 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노예에서 해방으로, 굴종에서 자유인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지상에서 천상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마침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을 순례자라고 부르잖아요? 신앙한다는 것은 그 길 위에서 비켜서 있지 않고, 올곧게 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요, 홍해의 사건을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예식의 원형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 이하에,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다는 어딘가요? 당연히 홍해지요. 홍해가 이런 곳입니다.
말하자면 홍해사건은 3300년 전에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신앙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제가 서두에 여쭈었던 말씀을 다시 여쭙겠습니다. 이 홍해의 이야기가 현실과 동떨어진 그저 꾸며낸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 하세요? 아니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세요?

홍해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연구와 논쟁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히브리어의 얌숲이라는 단어, 원래의 의미가 붉은 갈대의 바다라는 단어인데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성서인 70인역에서 “헤 에르뒤라 달라싸”-붉은바다로 잘못 번역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일 삼각주와 홍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지대의 붉은 갈대밭을 지났다는 겁니다. 당연히 이런 늪지에서 이집트의 기병들은 더 이상 진행을 못했겠지요. 아마도 가장 많은 학자들이 이 학설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같은 논리인데 현재 홍해에 발달되어 있는 붉은 산호초와 해초들이 드러나 붉은 갈대바다 같아보였기 때문에 얌숲이라는 단어를 섰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분들은 홍해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데 더 방점을 두고 있는 분들이지요.
그리고 반드시 홍해 도하가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분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창조과학회 분들입니다.
이 분들은 성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지상과제를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그렇고, 천지창조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정말로 열정적인 분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들에게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당신들의 과학으로 정말 하나님을 증명해 낼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게 증명해 낸 당신들의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해도 나는 믿지 않겠다. 사람의 과학에 의해서 증명된 하나님, 그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사람에 의해서 이것이 참 도라고 불리어지면 그것은 이미 도일 수 없다.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 사람에 의해서 이것이 참 이름이라고 불리어지면 그것은 이미 이름이 아니다. 이미 기원전 동양철학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번 주간의 캐나다 연합교회의 구약 성서일과에 나오는 욥의 마지막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욥기서 전체는 욥과 친구들의 난상토론장입니다. 토론의 주제가 뭐냐? 지금 욥이 받고 있는 이 혹독한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여러분, 그 42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등장하는 첫 시점이 언제인지 아세요? 책의 가장 후반부 38장에 가서야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피력하십니다. 그것이 지난 주간 구약성서일과 였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고 제일 마지막에 할 수 있었던 욥의 행동은 다시 잿더미 위에 앉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주 구약성서일과, 욥기 42장 6절에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사실 욥에게는 이 회개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첫 신호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정직한 인식이 뭡니까?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그것 외에 뭘 더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요, 목사님, 성서에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아니요! 천만에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 하는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은혜, 그 이상의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이념화된 하나님, 교리화된 하나님, 나의 얄팍한 생각과 판단으로 충분히 간파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나 보다 더 크신 분, 당신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삽니다.

제가 너무나 안타까워서 잠깐 샛길로 빠졌습니다만 이번 주간의 성서일과로 설교를 해도 몇 편은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홍해도하 사건에 관련해서 창조과학회분들은 론와이엇이라는 제칠일 안식일교회의 한 탐험가의 보고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홍해 도하지점은 수에즈만이 아니라, 아카바 만이고, 시내산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무사산이 아니라,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라오즈산이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2-30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만한 크기의 누웨이바 해변이 있고, 누웨이바 해변으로 가는 길이 산악이 병풍처럼 쳐진 좁은 소로라는 겁니다. 그리고 느웨이바의 해저 지형도가 최단 직경 18Km로 홍해에서 수심이 가장 낮은 곳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수중에서 고대 이집트가 사용하는 모양의 바퀴살이 발견되어 졌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금으로 된 것도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특별병거라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무슨 호텔 와인 수레 바퀴같던데… 어쨌든 거기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넌 홍해라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홍해가 갈라졌느냐 아니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벌레 같은 글자에 갇혀서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일에 가슴이 아플 뿐 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성서에 적힌 글자에 매몰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도 홍해의 역사적 현실성 규명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홍해는 그 때 거기서 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오늘 이 이국 땅, 온타리오호 해변가에 장막을 친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이집트를 막 시작 했을 때는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을 겁니다. 안그랬겠어요? 낮밤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호위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행진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막다른 홍해 앞에 서기 전까지는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그 희망도 잠깐이었습니다. 뒤에는 자신들을 쫒는 이집트의 군대가 있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뒤로 가자니, 이집트 군대에게 죽을 수밖에 없고, 앞으로 가자니 물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편입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마침내 바로의 모든 병거와 기마와 그의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여,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비하히롯 근처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위기 상황입니다. 사람이 이런 기가 찰 노릇을 당하면,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낙심하게 됩니다.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사실 오늘 홍해 바닷가 장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금 바닷가 해변 장막에는 바캉스 온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닷가 장막에서 바다 경치를 즐기고, 해풍에 몸을 말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애간장이 타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바닷가 장막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기 토론토 이민자들의 삶이 얼마나 닮아 있는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토론토는 온타리오호 북쪽 연안에 있는 캐나다 제1의 도시입니다. 오대호의 수운을 이용해 석탄을 비롯한 석유·밀·잡화 등의 집산지가 되어 호항으로 발전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어디든 높은 아파트에서 남녘 창을 열면 온타리오호의 짙푸른 물결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호수비치가 많습니다. 차로 조금만 달려도 만날 수 있는 호수 해변들이 많습니다. 호수 해변가에 장막을 쳤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이에 해변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친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태어나고 살았던 한국을 떠나와서 토론토 워터프론트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리구 애절한 30년, 40년의 삶을 살았잖아요? 여러분, 여기 낯 설고 말 선 이민의 땅에 사시면서 그럴 때, 없으셨어요?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도저히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날 때 없으셨어요? 앞으로도 못가고 뒤로도 못가는 진퇴양난에 빠질 때 없으셨어요? 여러분, 사실 10시간 넘게 태평양을 날아온 우리 같은 이민자들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잖아요?
처음에는 우리도 여기서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었습니다. 그런데요, 앞, 뒤를 다 둘러보아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이민자들의 삶이 그렇잖아요? 뒤로 돌아가자니, 다시 저 태평양을 건너는 일도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냥 주저앉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우리들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닷가 장막에서 애간장이 끓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온타리오호 해변가 장막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사실 홍해는 3300년 전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여러분의 이야기고, 저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홍해는 더 이상 현실과 동떨어진 우리의 신앙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저희 가족 다섯은 이 바닷가 장막까지 7년 전에 들어 왔습니다. 집사람, 그리고 아직 어린 녀석들, 세 놈을 데리고 태평양을 건넜습니다. 참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비행기를 세 번 갈아 탔는데, 면접관 앞에 입고갈 양복을 인천공항에 두고 왔습니다. 달라스 공항에서는 썸머타임을 모르고 비행기를 놓칠 뻔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택시를 탄 것처럼 비행기 문을 닫자마자 출발을 했다니깐요. 이렇게 들어와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저희 식구들이 참 우여곡절 끝에 들어왔는데 얼마나 멀던지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먼 이국땅, 이 온타리오호 해변 장막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우리가 어떻게 이까지 왔습니까? 이까지 와서 왜, 이 고생을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런 우리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오늘 본문 1절 이하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오던 길로 되돌아가서, 믹돌과 바다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쪽 바닷가에 장막을 치라고 하여라!”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렇잖아요? 탈출을 하고 있는 중이잖아요? 추격자들의 병거를 따돌릴 수 있는 산악이나, 퇴로가 확보된 개활지로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퇴로도 없는 바닷가 해변에 장막을 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홍해를 만나게 된 것은 방향을 잃고 행군하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로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고 싶다고 간 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가기 싫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이끌려서 온 곳이 이 바닷가 장막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이 곳 온타리오호 해변 장막까지 인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창세기에서부터 출애굽기에 이르는 성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 홍해 바닷가까지 오면 하나의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그의 식구들을 그냥 가나안 땅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왜 요셉을 이집트로 팔려가게 하셨을까 하는 겁니다.
왜,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게 하셔서 야곱의 일족을 이집트로 내려가게 하시고, 그 곳에서 수 백년을 살게 하셨을까 하는 겁니다.
왜,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노년에 든 모세를 그의 호렙산 불꽃떨기 가운데서 부르셨을까 하는 겁니다.
그냥 다짜고짜 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가 지시하는 저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겁니다.
사실 그것은 이집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손실이고, 그동안 가나안 땅에서 수 백년을 평화롭게 정착하여 살고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참 이상도 하시지요. 그냥 놔두시지. 그냥 처음부터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오도록 하셨다면,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를 만들지 않았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출이집트의 홍해사건은 그렇게 단순한 민족의 이동 사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로 가나안에 정착한 기원전 13세기 경의 역사적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와 세계를 부자유에서 자유로, 구속에서 해방으로, 굴종에서 주체인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옮겨가려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홍해 이전의 모든 역사가 홍해를 위해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 서러운 종살이를 하시게 한 것도 이 홍해를 향해서 흐르고,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하셔서 야곱의 일족을 이집트로 내려가게 하신 것도 이 홍해를 향해서 흐르고, 어느날 갑자기 야곱을 호렙산의 불꽃 가운데로 부르신 것도 이 홍해를 향해서 흐르고, 그리고 여기까지 막다른 바닷가 장막까지 오게 한 것도 홍해를 향하여 흐르는 한줄기 역사의 강물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온타리오호 해변의 장막에서 격고 있는 모든 슬프고, 아프고, 또 기쁘고 가슴 벅찬 우리 모두의 사연들도 홍해를 향해 면면히 흐르는 한 줄기 역사의 강물입니다.
여러분, 혹 이 더부살이 이민의 삶 가운데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지금 나아 갈 수도 되돌아 갈 수도 없습니까?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갈 데 없는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오늘 여기 온타리오호 해변에 장막을 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믿음 없이 어떻게 여기서 삽니까? 그리고 이 현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오늘 서두에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시면 어떠십니까? 감동적이세요? 현실적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그저 성서에 나오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적인 교훈만을 이야기 하는 겁니까?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현실과 신앙의 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간혹 우리들에게는 캐나다라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국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 저는 그런 풍경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우스꽝스럽지만 또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주 바쁜 출근 시간에 날아다녀야 할 캐내디언구스들이 한 줄로 점잖게 천천히 도로를 건너고 있고, 모든 바쁜 출근 차량들이 일제히 서서 그 수 십 마리의 오리들이 다 건널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에글링턴과 스칼렛이 만나는 지점 즈음에는 큰 사슴이 나와서 도로를 뛰어다니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풍경들은 우리의 고향,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들이지요.

저에게는 또 잊을 수 없는 풍경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이 풍경은 여기 본토인들도 본 적이 없는 그런 풍경일 것입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전철을 탔습니다. 키플링에서 출발하는 블루어라인 전철요. 그 때가 오전 시간쯤 되었을 겁니다. 키플링에서 전철이 출발하잖아요? 그 다음코스가 이슬링턴입니다. 보통 종점에서 한 코스 가서 내리는 사람들이 없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다 앉아 있는데 제가 앉아 있는 곳에서 왼쪽 편 구석에서 무슨 내릴려는 인기척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별 대수롭지 않게 보았는데 뭐가 걸어 나오는데 사람이 아니라, 비둘기 한 마리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겁니다. 사람들 시선도 아랑곳 않고 터덜터덜 걸어 나와서 전철 문 앞에 서는 겁니다. 날아다녀야 할 비둘기가요!
그리고 이슬링턴에 전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니깐 또 터덜터덜 그렇게 걸어 내리는 겁니다. 전철을 탈려고 했던 흑인청년 하나가 흠칫 그 비둘기를 보고 머뭇거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이 비둘기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냥 플랫폼으로 걸어 나가는 겁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습니다. 뭐 낯선 풍경이 신기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순간 비장해 졌습니다.

무언지 모를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제가 메모하는 습관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만큼은 잃어버리기 싫어서 재빨리 수첩을 꺼내어서 몇 글자 적어 놓았습니다. 잃어버리고 있던 그 수첩을 꺼내서 보니 개발새발 이렇게 써 있는 겁니다.

소리 없이
비둘기
이슬링턴에서 내린다.
닳아졌는지, 어디서 잊어 버렸는지…
뭉퉁한 발, 상처투성이 세월을
뚜벅 뚜벅 걸어서 출입문 쪽에 선다.
일제히 쪼아대는 사람들의 시선,
차라리 돌아보지 마라.
이 큰 문 앞에서 점 점 작아지는 니 뒷 모습,
니 어깨 죽지, 속 깃털이 떨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문이 열리기까지 애타는 마음 들키지 마라.
이슬링턴 스테이션, 낯선…
문이 열리고
타려했던 검은 청년 멈칫 너를 바라보고
너는 아랑곳 않고 또 그 걸음으로
뚜벅 뚜벅
낯선 이슬링턴 스테이션을 겨를 없이 지향한다.

그 신기한 풍경을 재미있는 웃음으로 기억해도 될 텐데, 제가 눈물겹게 비장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타국에 온 지 얼마 안 되고, 그 때는 뭐 제가 교회의 목사도 아니고, 처자식 먹이려고 한참 막노동을 할 때였습니다.
뭐 지금도 상황이 그렇게 나아 진 것은 없지만, 그때는 무슨 교회 개척을 한다고 포도원에 늦게 들어 온 일꾼처럼 한참 조바심이 나 있는데, 그 때, 그 심정으로 보니깐 이 길 잃은 비둘기가 꼭 제 모습이더라고요. 언제 닳아진 것인지 잊어 버렸는지 뭉퉁한 발… 그 두발로 힘에 부치는 큰 문 앞에 서 있는 뒷모습이 꼭 저더라니깐요? 적어도 그 때 만큼은 그 비둘기랑 제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는 시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도 시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저는 시의 가장 큰 매력을 어떤 대상과의 합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다에 대한 시를 쓴다고 하십시다.

바다는 푸르다.
저 깊은 바다…
아스라이 밀려오는 포말…

뭐 이렇게 쓰면 이것은 시도 아닙니다. 그냥 나는 바다이러라.  그러면 그것은 아주 좋은 시가 됩니다. 아마 전문적인 문학인들은 자신들의 시론이 다 따로 있겠지요. 저는 제 나름대로 시의 가장 아름다운 매력의 정점이 이 합일 이라고 봅니다. 시를 해석한다는 것은 이 합일을 읽어 내는 것입니다. 시를 이렇게 읽을 때, 그 시는 감동이 됩니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감동이 안됩니다. 도통 영혼의 떨림이 없지요.

여러분, 오늘 설교 처음에 드렸던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시면 어떠십니까? 감동적이세요? 현실적입니까? 아니면, 이것이 그저 성서에 나오는 현실과 동떨어진 신앙적인 교훈만을 이야기 하는 겁니까? 오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현실과 신앙의 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홍해 앞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홍해 바닷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홍해 바닷가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홍해 바닷가에서 불평하며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형제자매여러분, 오늘본문 15절 이하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것이다.”

저희 가정의 이민 생활이 7년이 넘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한인 이민선배님들에 비하면 분수대 앞에서 물총 쏘는 격이지만 어쨌든 7년 몇 개월을 생존을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저는 이미 오래 전에 2년 동안 목회했던 개척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그 때까지의 등록교인은 4가정 우리집 식구들까지 하면 5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식구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우리집 가훈을 다시 정하겠다. 뭐 우리집은 근본도 없는 집이라, 우리집 가훈은 그 때, 그 때 제 기분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집 가훈은 “막 살자!”다.
어린 녀석들이 너네집 가훈이 뭐냐 그러면 뭐 알지도 못하면서 “막 살자!” 그러는데 얼마나 웃깁니까? 그런데요, 이것을 목사인 제 식으로 좀 풀어 놓자면 이겁니다.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라!”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식탁에 다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아니, 고백 했습니다. 아빠가 그동안 너희들 교육환경, 또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의 책임감… 이런 것 때문에 너무 조심스럽게 살았다. 너무 많이 운산하면서 살았다. 너무 많이 타산하면서 살았다. 너무 많이 조바심치면서 살았다. 마치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았다. 아빠 이제 막 살꺼다. 우리집 가훈은 막 살자다. 이 낯선 땅에서 니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만 믿고 한 번도 내딛지 않은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 어디 저 뿐이겠어요? 어떻게 저와 저의 가정만이겠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우리 신앙과 생의 홍해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 모두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온타리오호 해변에서 이국의 낯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온타리오호 해변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온타리오호 해변에서 힘든 이민의 삶을 불평하며 아우성치는 우리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해변가 장막에서 들려오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여러분, 이 말씀이 똑똑히 들리십니까?
너는 앞으로 나아가라!
너는 바다 가운데 마른 땅으로 행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이 말씀에 아멘 하십시다.
그리고 저 교회 문을 열고 거침없이 나아 갑시다.
하나님만 믿고 나갑시다.

그럴 때, 더 이상 우리에게 현실과 신앙은 양면이 아닙니다.
그럴 때, 그 거리는 사라지고, 우리의 현실과 신앙은 어느새 하나가 됩니다.
그럴 때, 아침에 눈을 떠서 보는 캐나다의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태양은 성성한 하나님의 눈길이 됩니다.
그럴 때, 이른 출근 길, 머리를 쓸어 올리는 북미의 새벽바람은 차라리 정금 같은 하나님의 손길이 됩니다.
그럴 때, 바쁜 일상에 쫓겨서 허기를 달래며 먹는 빵 한 조각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성찬이 됩니다.
그리고 또, 늦은 밤, 천근만근 피곤한 몸으로 퇴근 했어도 이런 비루한 나 하나 믿고 쌔근쌔근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는 아아, 차라리 거침없는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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