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아쉬움 속에서 감사를 고백합니다

창조절 여덟번째 주일 / 10월 네번째 주일
신명기 34:1-12, 데살로니가전서 2:1-8
창조절, 아쉬움 속에서 감사를 고백합니다
정해빈 목사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으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김준엽 뇌성마비 시인이 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김준엽 시인이 쓴 시가 맞습니다. 이 시인은 내 인생의 가을이 쓸쓸하지 않도록 더 많이 사랑하고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서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거두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이 아름답고 풍성한 가을열매들처럼 아름답고 풍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후회와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아름답고 감사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으로 읽은 시편 90편은 전체 150편의 시편 중에서 유일하게 모세가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안식처(dwelling place)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계셨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계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 풀이 아침에 돋아나서 꽃을 피우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시면 우리의 인생은 한 순간의 꿈과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날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우리의 시간은 너무도 짧기만 합니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기 때문에 값어치가 있습니다. 원래 귀한 것들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때가 되면 주님의 품으로 부르셔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간이 너무 짧고 우리의 삶에 후회도 있고 아쉬움도 있지만 삶에서 죽음에서 죽음을 넘는 삶에서 언제나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편안히 머무를 영원한 거처(dwelling place)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떠났다가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식할 수 있고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34장 말씀을 보면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인생을 마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120세였고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성공의 순간도 있었고 실패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바로왕과 담판을 벌였고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였고 홍해바다를 건넜고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하였고 40년 광야 생활을 지나서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잘 돌보지 못했고 젊은 시절에 동포를 괴롭히는 이집트 사람을 보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였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들을 보고는 화가 나서 십계명 돌판을 깨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모세 입장에서 보면 분명 아쉽고 억울한 일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또한 모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산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제국과 대결했고 말 안 듣는 히브리 백성들을 이끌고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스트레스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120세까지 장수하였고 마지막까지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보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평생의 목표였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둘째로 그렇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모세는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억울하고 아쉬움 많은 인생을 살면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히브리 동포들을 축복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신명기 34장을 읽었는데 바로 앞장 신명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히브리 백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마음 속에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섭섭하고 히브리 백성들에게 섭섭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동포들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감사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120세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내 인생에 후회와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아쉬움이 있지만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후손들을 축복한다면 우리도 모세처럼 마지막까지 건강하고 아름답게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거처/안식처가 되시니 우리는 불안해 할 필요도 없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항상 감사하고 후손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축복하면 오래 삽니다. 장수의 비결은 감사와 축복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여러분에게서든 다른 사람에게서든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주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살전 2:5-7) 사도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영광/대접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녀를 돌보듯이 유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면서도 개인적인 명예/영광/탐욕을 부리지 않았고 항상 감사하며 겸손하게 처신했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모세와 사도바울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성공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많은 시련과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항상 감사하였고 이웃을 축복하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하는 것을 다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쉬움이 있지만 이미 많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안식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름받고 쓰임받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드리고 후손들을 축복하며 인생을 마감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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