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기억, 그 사이에서 / 유상진 목사

추수감사절/창조절 다섯 번째 주일 / 10월 두 번째 주일
추억과 기억, 그 사이에서
예레미야 29:1, 4-7 ,디모데후서 2:8-15, 누가복음 17:11-19
유상진 목사

 

지난 주간에 저희 둘째 조카딸이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한참 국제연애를 하던 애인을 대동하고 왔습니다. 뭐 둘이서 결 혼을 할 모양입니다. 한국에서 방금, 입국하고, 인사를 하러 온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결혼을 앞두고 집안 어른께 인사를 하러 온 것이지만 어른이 뭐 어른다워야 인사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원래 사람이 가볍고, 그 딸애의 애인은 몇 년 전에 보았던 터라 얼굴이 익숙했습니다. 무슨 무슨 서방 그러면서 저는 가벼운 농담을 곁들여서 곧 부부가 될 그 커플하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점잖은 인사 자리가 아니었지요. 언제나 그렇지만 이렇게 집에 손님이 방문하고 돌아가면 저희 아내가 항상 같은 말을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꼰대처럼 그러지 좀 마라!”는 겁니다. 요사이 저희 아내와 저는 꼰대 주의보 동맹을 맺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꼰대 짓을 하면 서로에게 준엄하게 경고를 하는 겁니다. 뭐 나름 저희 부부는 꼰 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어르신들 중에서 ‘꼰대가 뭐여?’하고 궁금해 하실 분들을 위해서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흔히 자신의 구태의연한 생각을 젊은이들에게 강요하는 좀 나이든 사람을 꼰대라고 부릅니다. 우리 알파교회의 평균 연령이 좀 높으신데, 그럼 우리 교회는 꼰대 교회인가? 아니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꼭 생년 월일을 기준으로 하는 물리적인 나이가 꼰대의 기준은 아닙니다. 제 식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의 호기심이 없는 사람, 배우기 를 멈춘 사람, 변화를 멈춘 사람…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사람이 꼰대입니다.

그러니, 이 꼰대들이 하는 가장 쉬운 일은 자신이 살아온 대로 그냥저냥 사는 겁니다. 그러다 어쩌다가 동창들끼리 모여 옛 추억이야기를 나누면서 답답한 속을 달래는 거지요. 그 추억의 이야기는 다양합니다. 여자 꼰대분들의 경우는 학창 시절 이야기, 처녀 시절의 이야기, 남자 꼰대분들의 경우는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뭐 군대에서 축구 하던 이야기는 백미 중의 백미지요. 그 밖의 고향 이야기,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작당이나 자신들의 성공 이야기는 단골 메뉴가 됩니다. 여기에 무용담 이나 거기에서 느낀 성취감까지 곁들이면 그 시간만큼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 없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제가 이 예비부 부와의 만남에서 딱 요랬던 거지요. 저는 재밌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가 “20년도 더 넘은 니 결혼 이야기를 왜 하냐?”는 겁니다. 제가 그랬던 거지요.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그러면서 결혼을 앞둔 연인들에게 오래전 라떼의(나 때의) 결혼 이야 기를 한 거지요. “꼰대라떼”라는 말은 무슨 커피 메뉴가 아니고요, 오래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입니다. “라떼는(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시작하면 이미 꼰대라는 겁니다. 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그렇게 ‘꼰대는 되지 말자!’ 다짐하고, 또 다 짐했는데요, 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난 한 날의 저녁은 꼰대가 되어 버린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우리 중에 그래도 연배가 어린 편에 속한 저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추억만 많아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추억은 하염없이 많아지는데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지요?

추억과 기억은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사실 우리 각자는 추억과 기억의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뭐 복잡하게 추억이 따로 있고, 기억이 따로 있어? 거기서 거기지!’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추억과 기억은 현재의 것이 아닌 과거의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데서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구별해 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추억”과 “기억”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추억”이라는 말과 “기억”이라는 말을 따로 만들었겠지요. 그리고 이 추억과 기억에 대해 구분하는 것도 사람들마다 다릅니다. 어떤 분들은 “살면서 경험을 통해서 얻은 기억에 자신의 감정을 입힌 것이 추억이다.” 그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흔히 우리가 “씁쓸한 추억”이라든지 “행복한 추억” 이라든지 그런 말을 하잖아요? 다 추억이라는 말 앞에 감정 형용사가 붙은 거지요. 추억과 기억을 나누는 차이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겁니다. 뭐 일정정도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제 나름 이 추억과 기억의 미묘하지만 명확한 차이를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제 식으로 좀 쉽게 설 명 드리겠습니다. 추억은요, 내가 꺼내고 싶을 때만 꺼내는 이야기이고요. 기억은요, 내가 꺼내지 않아도, 사실로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추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 나 일”, “기억”이라는 말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추억은 자신이 꺼내고 싶을 때, 언제든지 꺼낼 수 있는 이야기, “Recollections”이고요, 기억은 굳이 꺼내지 않아도 자신의 의식 속에 이미 사실로 간직된 이야기, “Memories’”입니다. 저의 추억과 기억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추억이 더 많으세요? 아니면, 기억이 더 많으세요? 고유의 성격상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추억을 더 많이 말합니다. 뭐 꺼내 보이고 싶은 거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염없이 추억은 많아지고, 기억은 점점 사라지는 거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한 번 질문해보세요. 추억과 기억에 대한 정의가 우리에게 좀 더 심층적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교통하시고, 교제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손에 쥐어진 이 성서 66권을 성삼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런 사실들을 다시 확인하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이 성서는 추억의 전달일까요? 아니면, 기억의 전달일까요? 좀 쉽게 다시 여쭙겠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쥐어진 이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 성서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어떤 전달의 과정이 있어서 지금 우리의 손까지 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언어와 그것을 전달하는 문자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그 오랜 옛날에 이 성서는 오늘날의 꼰대처럼 심심풀이 땅콩처럼 꺼낸 추억을 전달한 걸까요? 아니면, 굳이 꺼내지 않아도 각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이미 사실로 간직된 기억을 전달한 걸 까요? 이러면 좀 쉬워지지요? 여러분, 대답해 보십시오. 성서는 추억의 전달일까요? 기억의 전달일까요? 예, 성서는 기억의 전달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의 부름으로 함께 교독한 성서일과 시편 66편을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66편 3절에 회중들의 찬양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 회중들이 놀란 이유는 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셨으므로,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였다.” 여러분, 이 시편의 노래로 오늘 추수감사절예배의 부름을 함께 교독한 오늘을 사는 우리나, 이 시편으로 직접 노래한 2500년 혹은 2700 년 전의 저 고대 근동의 시인이나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억의 전달인 거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걸어서 바다를 건넌 그 이야기는 이미 3300년전의 이야기이니깐요. 이것은 기억의 전달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시편이 노래하는, 사람들이 바다를 걸어서 건넌 이야기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홍해도하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현재 이스라엘, 지금 우리가 이 토론토에서도 함께 살고 있는 Jewish들의 역사 속에서 가장 장미침대 같은 이야기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요.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께서는 그런 질문을 저에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말대로 이 3300년 전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전달됐다면, 그것은 기억의 전달이라기보다 추억의 전달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Jewish들의 그리움의 감정이 잔뜩 들어간, 그래서 언제든지 심심풀이 땅 콩처럼 꺼내놓는 추억에 더 가깝지 않습니까? 더구나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오늘 이 21세기에는 일어나지 않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이미 Jewish들의 감정으로 왜곡되어 버린 추억 아닙니까?” 그렇게 질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서는 기억의 전달입니다. 우리가 지면상 오늘 주보를 통해서 시편의 말씀들을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제가 아까 인용한 6절의 말씀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셨으므로, 사람들은 걸어서 바다를 건넜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기뻐하였다.” 여러분, 하나님이 바다를 육지로 바꾸셔서 사람들이 걸어서 바다를 건넌 그 현장을 직접 바라보고, 기뻐한 주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그리고요? 그 “우리”는 그때, 모 세와 함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한 5~600년 후의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을 노래하는 시인과 회중들은 그때 거기 그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목격하고, 기뻐했다 이겁니다. 여러분 성서는 이렇게 어떤 그리움 같은 개인적인 감정과 회한이 뒤섞인 추억의 전달이 아니고, 지금 현재 나의 의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선명한 기억의 전달입니다. 여러분, 2022년 10월 9일, 오늘 이 추수감사절 한낮에 우리가 이 시편의 노래로 함께 예배의 부름을 교독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보살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정말입니까? 여러분, 정말 이것이 더 이상 2600년 전 저 힘없고 연약한 포로 생활에 시달리던 어느 보잘것 없는 공동체의 노래가 아니라 오늘 이 이민의 땅, 토론토에서 사는 이 작은 공동체, 알파한인연합교회의 고백 맞습니까? 솔직히요!

여러분, 성서는 누가 뭐래도 지금 현재 나의 삶의 현장, 내 삶의 의식 속에 살아 숨 쉬는 선명한 기억입니다. 성서는 기억 의 전달입니다. 그 생생한 기억이 세대의 벽을 뚫고, 문화와 경계의 벽을 뚫고, 두터운 인습의 벽을 뚫고 오늘 똑같이 나에게 전달되어서 지금 나의 삶속에서도 생생하게 체험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목사의 기본적인 의무, 아니 비단 목사만이 아니 라, 성서를 읽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이 응당 가져야 할 제일의 의무는 이 전달된 기억을 오늘 생생한 나의 삶의 말씀으로 해석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서는 더 이상 어떤 시도 아니고, 교훈서도, 역사서도, 예언서도 아닙니다. 어떤 처세서나 교 양서나 교리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성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요 최근에 제가 저희 아내와 차를 타고 오래 운전해서 어딘가를 간 적이 있습니다. 늘 차 안에서는 대화를 나누지요. 어쩌다 우리 살림살이 이야기가 나왔어요. 뭐 저희 살림살이는 제가 가진 것이 없고, 버는 것이 적어서, 그날 벌어서 그날 먹는 날품팔이 살림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식 구들이 이 토론토로 이민 온 것이 올해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10년 동안의 이런저런 기억을 나누었습니다. 그 기억을 나누면서 집사람과 저의 떨림이 같은 거예요. 공명한 거지요. 제가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수희야, 우리가 이미 홍해를 건넜다!” 저의 아내도 격하게 동의하더라고요. 그 차 안에서 우리 둘은 행복해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보살펴 주십니다! 주님께 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모든 것이 풍족한 곳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라고 이 추수감사절 온가족 예배에서 가장 먼저 고백하신 여러분, 여러분 지난날 이민의 삶이 어떠셨길래 이렇게 고백하시나요? 실족하여 넘어질 뻔한 적이 수도 없었던 거 아니에 요? 차라리 주님께서 건져 주시지 않았다면 빠져나올 수도 없는 수렁을 수도 없이 만났던 거 아니에요? 여러분 기억을 더듬 어 보십시오. 어떻게 이 성서가 그때 거기서 만의 이야기인가요? 아니지요!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생한 기억으로 살아서 우리의 의식 속에 간직된 말씀, 지금도 선선한 눈매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요한 음성이지요.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이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힘내어 살았습니다. 저처럼 비루한 사람이 이런데, 여기 이민 선배님들의 삶은 어떠셨을까요? 낯설고 물선 이 이민의 땅에서 차라리 나를 반기는 것이 은혜의 눈물 아니었나요? 아아,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서일과 서신서의 말씀은 디모데후서입니다. 오늘 본문인 디모데후서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포함 하여 보통 목회서신으로 분류하는 성서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바울이 목회자로 활동하는 사랑하는 제자지요, 디모데에 게 보낸 목회에 관련한 참고서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실제로 목회 과정에서의 문제들이나 지침들에 대해 조언하는 책 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의 첫 일성이 되는 디모데후서 2장 8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고,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계속해서 14절에, “신도들에게 이것을 일깨우십시오.” “일깨우다.”라는 말은 다시 기억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개역개정은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 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와 디모데가 직접 목회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너는 지금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 거 지요. 여러분, 지금 바울이 하는 이 질문이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에만 하는 거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이 질문은 오늘 추수감사절 온가족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기억하고 있느냐?”, “너의 신앙과 삶의 주추가 추억이냐? 아니면, 기억이냐?”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추억과 기억의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추억에 더 기대어 사십니까? 아니면, 기억에 더 가까이 기대어 사십니까? 사실 그렇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사람들은 나이가 점점 연만하여지면서 기억은 줄어들고 추억이 더 많아집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지는 거지요. 어떤 사물과 삶의 문제를 관성적인 태도로 반복하면서 더 이상의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부분에서도 똑같은 거 같아요. 여러분, 정말 신앙생활에도 꼰대가 있습니다. 수십 년을 예수 믿고 살았는데 매일의 삶 에 대한 신비함도 없고, 하루 세끼 마주하는 밥상 앞에서 일용할 양식을 대하는 감격도 없고, 아침에 눈을 떠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내 코가 그 처음의 생기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은혜도 없다면,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 님 나라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감사도 없다면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점점 기억을 잃고, 추억 속에서 만 사는 꼰대 신앙인이 아닌가?’ 조용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 이상의 호기심이 없고, 이미 배우기도, 변화도 멈춘 신앙인, 한마디로 미래가 없는 꼰대 신앙인이 우리들 중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서의 말씀은 혹 영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신앙인들, 추억과 기억, 그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서릿발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복음서의 말씀은 예수님에게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의 이야기입니다. 나병을 오래전 에는 문둥병이라고 낮춰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병균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한센병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새번역 성서에는 나병환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편의상 저도 나병환자라고 지칭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도 그렇 지만 고대사회에서 나병환자들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을 공동체에서 완전히 격리되기 때문입니다. 당 연하지요, 나병은 심각한 감염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구나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자칫하며 마을 전체가 나병촌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한 마을이 몰살되는 거지요. 그러니 오늘날과 다르게, 예수님 당시에 이 나병은 어떤 육신적인 병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성서에는 나병환자를 “레프로스”라고 부릅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 “하나님께 버 림 받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나병은 그들의 인격과 영혼도 말살시키는 병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쩌다 나병환자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는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만 했습니다. 거리를 다닐 때는 “나는 부정한 사람입니다.”라고 큰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이 미리 피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고 병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오 늘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에 걸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 주셨잖아요? 뭐 진흙을 사용하시기도 하고, 안수하시기도 하고… 오늘 이 열 명의 나병환자의 경우는 그냥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 누가복음 17장 14절에, “예수께서는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당연히 치료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지요. 당시의 율 법에 따르면 나병이 치료되었을 때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확인이 완료되면 성전에서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리는 것이 공식적인 절차였습니다. 당연히 그 절차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제일 첫 번째 절차를 지시한 거지 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는 중간에 몸이 깨끗하게 치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14절 하반절에, “그런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당연히 이들은 율법에 따라서 해야 할 절차들을 다 끝내고 각자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겠지 요.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끝나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끝나야 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양상이 좀 다르게 번집니다. 15절 이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그게 어여삐 보였던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한 명의 나병환자에게만 축복하십니다. 오늘 본문 19절 에,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게 축복해 주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로서는 좀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단 한 사람이 반드시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에 꼭 엎 드려야 할 필요성이 성서 본문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냥 돌아간 다른 아홉 명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 한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뭐 예수님의 입장에 서는 그 아홉 명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서 뭐라 말씀하실 명분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직접적으로 야단을 치거나 저주를 내 리시거나 하신 일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 한 명의 오지랖 때문에 불행한 아홉 명이 양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을 전지적인 시점으로 읽어서 그렇지요. 여러분이 직접 나머지 아홉 명의 입장이 되어서 상황을 한 번 보십시오. 이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들 중에 어떤 한 명이 자신들과 다른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모릅니다. 그래 서 그것 때문에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궁극적인 구원에서 자신들이 소외되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런 사실도 모 른 체 단지 지금 여기서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최상의 행복일 뿐입니다. 딱 추억속을 헤매는 꼰대인 거지요. 꼰대! 이렇게 볼 때, 열 명의 병이 다 낫기는 했으나 이 한 명과 나머지 아홉 명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너무나 큰 실존 의 차이 아닙니까? 여러분,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이 하나와 나머지 아홉의 차이를 만든 겁니까?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표현한다면 추억과 기억의 차이입니다. 내가 꺼내고 싶을 때만 꺼내는 감정으로 세탁된 추억에 기대어 있는지 아니 면, 내가 꺼내지 않아도, 내 의식 속에 사실로 존재하는 실존적인 기억에 기대어 있는지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조아린 이 한 명은 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홉 명의 보통 사람들이 육체적 인 해방의 단계에서 만족했지만, 이 한 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혼의 해방을 누리잖아요. 모든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병 고침을 받았지만, 저 깊은 영광과 감사의 영성에 가 닿은 사람은 이 특별한 단 한 사람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서 믿는 사람들로 분류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는 건가요? 진정한 영광, 진정한 구원은 이 세상의 어떤 조건에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온다는 사실. 우리는 그거 믿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의미 에서 오늘 이 단 한 명의 나병환자는 하나님의 영원의 영역 안에 들어와서 자신의 본질을 기억해 내는 사람, 이 지상에 살면 서도 정신은 살아 있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자신의 의식 속에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 “레프로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영혼까지 말살당할 수밖에 없는 보잘것 없는 한 명의 나병환자였다는 실존적인 사 실을 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가장 깊은 병고에서 해방된 지금도 이 지상의 추억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의 본질을 더욱 기억해 내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행복과 안락이 있는 세상의 풍요를 향해 뛰어가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주 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

여러분, 이것이 2000년 전의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나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름 열심히 살았고 많은 업적도 이루었습니다. 그것을 추억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자부심도 있습니다. 말 설고, 물선 이 이민의 땅에 서 참 열심히도 일했습니다. 돈벌이에 몰빵해서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영끌해서 좋은 집도 샀습니다. 그래서 상류사회의 일원 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장도 되고, 정치가도 되고, 유명한 상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애쓰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직 한가지 우리가 반듯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본질이 아니라 는 사실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법관이나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그 법관의 판결을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죄수나, 돈이 많은 어느 부잣집의 사모님이나 그 집에서 일하면서 그날 하루 먹을 것을 버는 가정부나, 석 학으로 칭송받는 대학 교수나 배운 것이 없어서 저 공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3급 공돌이나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신분이나 사회적인 지위도 그 사람이 상류든, 하류든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으로는 아무런 차 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 본질을 감싸고 있는 겉싸개일 뿐입니다. 좋은 말로 이야기 하자면 예쁜 포장지 같은 겁니다.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예쁘게 포장을 해도 그 포장지는 다 풀어 해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포장지의 가장 선명한 필연성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의 영역 안에서 나의 본질이 뭡니까? 여러분,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누구하나 빠짐없이 다 나병 환자 아닙니까? 지금 내 피부가 성성하게 보이지만 잠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탱탱한 피부는 탄력을 잃습니다. 그 리고요, 조금만 지나면 그 피부는 썩고 맙니다. 다 썩어져서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우리 중에 이미 나병환자가 아닌 사람 여기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이 사실, 이 실존적인 기억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오늘 이 단 한 명의 나병환자는 가장 결 정적인 순간에 이 세상에서의 추억이 아니라, 가장 명확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본질, 가장 실존적인 사실을 기억해 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기억해 낸 그는 가정과 행복과 안락이 있는 세상의 풍요를 향해 뛰어가지 않았습니다. 내 생명의 주관 자가 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돌아와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2000년 전의 나병환자의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질에서 지금껏 내가 이룬 신분이나 지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거기에는 상류도 하류도 의미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 오늘 이 한 명의 나병환자처럼 추억이 아니라 펄펄 살아있는 실존의 기억에 기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살아가는 삶의 형편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가 이 생을 사는 동안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궁극의 구원을 누리면서 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 뭡니까? 우리의 가장 선명한 기억에 기대어서 오늘 우리가 단 한 명의 나병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한 영광과 진실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 야 할 기억의 영성입니다.

추억과 기억, 그 사이 어디쯤에서 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구약의 말씀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길게 설명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구약 성서 본문 예레미야 29장 1절은 2600년 전에 이국 땅에서 사는 한 작은 공동체가 받은 어떤 편지의 첫 마디입니다. 거기에 는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와 받는 수신자가 굉장히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이것은 예언자 예레미야 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편지로서, 포로로 잡혀 간 장로들 가운데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비롯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아간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보낸 것이다.” 자, 한번 보십시다. 예레미야라고 하는 예언자가 포로로 잡혀서 타국에 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네요. 그런데 그 포로 생활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포로로 잡혀간 장로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지금 이 포로 생활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정황증거입니다. 당연합니다. 이 포로들이 가고 싶어서 간 곳이 아니에요. 가기 싫다고 안가도 되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 먼 타국땅에서 자신도 모르는 우여곡절 속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실 저는 이 첫 대목을 읽으면서 이 이후의 편지의 내 용이 이렇게 돌아가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저의 심정이 그런데 이 편지를 직접 받아 읽는 타국땅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있는 이민자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사실 이 예레미야의 편지는 그 당시의 포로들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신탁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타국의 이민자들에게 이 편지를 보낸 시기가 언제냐? 시드기야 재위 9년에 유대가 완전히 멸망하는데 아직 그 이전의 시기입니다. 그러니깐 나라가 멸망하지도 않고 아직 남아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시기예요. 그런데 먼저 볼 모로 잡혀서 낯설고, 말 선 이 이국땅에 막 도착한 때였습니다. 이때는 예레미야를 제외한 대부분 예언자들의 메시지나, 국가적인 여론이 대 바빌론 항쟁을 통한 독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딱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제 막 낯설고 말 선 외 국 수용소에 연행되어 온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4절 이하에 나오는 편지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이민 1세대와 1.5세대들에 게 요구하는 내용이지요.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여러분, 과수원을 경작해서 씨를 심고 묘목으로 키우고, 그것을 어른 나무로 만들어서 열매 를 따 먹을 수 있는 정도는 몇 년 정도 걸릴까요? 아니 1세대나 1,5세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2세대가 자라서 다시 결혼 을 해서 아이들을 낳는데 몇 년이 걸릴까요? 사실 이 편지의 내용 액면 그대로를 보자면 이 수신자들, 이제 갓 우여곡절 끝 에 이민 온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주문 아닙니까? 더구나 마지막 7절에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라.”는 요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매국 행위와도 같습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이민자들은 이렇게 불편한 편지를 받아 든 겁니다.

저는 이 불편한 편지를 받아 든 이민자들의 입장은 차치하고, 이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는 예레미야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라고 이런 편지를 써서 보내고 싶었을까요? 아마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편지를 써 서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은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였을 겁니다. 오늘 “추억과 기억, 그 사이에서…”라는 설교의 제목으로 비추어 본다면, 예레미야는 저 사울왕을 시작으로 가장 광대했던 다윗왕과 가장 찬란했던 솔로몬 왕을 거쳐서 23대에 걸친 그 찬란했던 유대 역사의 추억에 기대지 않은 것이지요.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역사에 기대어 있는 겁니다. 차라리 한 인간 존 재로서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기억해 낸 거지요. 낯설고 말 선 유배의 땅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이민자들에게 이 편지는 하늘이 나한테만 꺼져내려 온다 할지라도 이 기억을 놓지 말아라, 차라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쓴 혈서입니다. 아니면,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떤 철학자의 고백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다 끝장난다 할지라도 우리의 이 또렷한 기억은 흐트러질 수 없는 거지요.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 이 이민자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 의 말씀을 낭독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명한 기억 위에 우리의 삶과 신앙의 주추를 놓는 이상, 이 말씀은 저 포로 생활의 저주가 아니라, 차라리 축복입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이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 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이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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