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불안한 존재에게 평화를 주시다

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두번째 주일
요한복음서 20:19-310
부활절, 불안한 존재에게 평화를 주시다
정해빈 목사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그만큼 더 큰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은 크게 3가지의 이유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첫째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의학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졌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옛날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대량살상무기, 테러, 집단전염병, 자연재해,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새로운 죽음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죽음에 대한 공포가 현대인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둘째로 현대인들은 삶에 대한 회의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옛날보다 먹고 살기는 좋아졌지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삶에 아무런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할 때, 왜 살아야 하는 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 삶이 지루하고 힘들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셋째로 사람들은 죄/죄책감 때문에 불안을 느낍니다. 옛날에 비해서 세상사는 것이 더 힘들고 복잡해졌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다보니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일도 많아졌고 경쟁할 일도 많아졌고 이웃에게 죄를 지을 일도 많아졌습니다.

폴 틸리히는 현대인들이 겪는 이 3가지의 불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오는 불안, 삶의 공허함 때문에 오는 불안, 죄책감 때문에 오는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때가 되면 죽어야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요, 죽음 이후에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죽음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은 내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와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고난에서 일으켜 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삶을 긍정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셋째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서로 경쟁하고 상처주고 다투면서 산다 하더라도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의 허물을 용서하셨던 것처럼,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의하면, 부활절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였으니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세상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제자들에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세상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사람들의 죄와 불안을 씻어주면 죄와 불안이 사라질 것이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지 않으면 죄와 불안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할 사명이 제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항상 삶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불안, 건강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죽음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해 집안에 숨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때로는 이러한 죄와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을 피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것처럼 코로나 전염병이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은 세상에서 도피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불안과 관련하여 옛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들이 많았는데 불안의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하늘의 신에게 부탁했습니다. 불안의 신은 자기가 사람을 빚었으므로 사람이 자기 소유라고 말했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은 하늘의 신은 자기가 생기를 넣었으므로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땅의 신이 등장해서 사람이 본래 흙에서 나왔으니 사람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3명의 신은 사람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 지를 최고의 신인 제우스 신에게 물었습니다. 제우스 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늘의 신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하늘의 생기를 가져가시오, 땅의 신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육체를 가져가시오, 불안의 신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 사람을 소유하시오.” 로마 사람들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불안의 신의 소유가 되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은 하늘의 신의 소유가 되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 육신은 땅의 신의 소유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생각처럼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매일매일 불안의 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신 후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안을 이길 수 있는 부활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마가 나타나서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일주일 후에 다시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도 도마처럼 주님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질 수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증거를 보아야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불안을 씻어주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사람들을 일으켜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못자국을 만졌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세계 곳곳에서 부활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뚫고 부활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은 불안한 존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말씀하셨습니다. 3차원 또는 4차원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고 부활백성으로 이 땅을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모든 의인들과 순교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죽음에서 일어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부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나타나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죄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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